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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국제이사

by 베를린부부

살다 보면 짐이 늘어난다. 세상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많은 양의 재화를 필요로 한다. 의식주 수단부터 그 외에 취미나 놀이 등등, 살림이 늘어나는 방법과 이유는 늘 변화하고 진화한다. 특히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를 계속 생산해 낸다. 분명 방금 깨끗하게 치운 쓰레기통을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채워 놓는 마법을 부리기도 하고, ‘논다’는 소명아래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아이들은 지나간 흔적마다 모두 살림살이가 되곤 한다. 가족의 이사는 단순한 거주지의 변경이 아니다. 집안 곳곳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며 저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사색도 해야 하고, 살림의 당사자와 협상도 해야 한다. 누군가는 버리라 하지만 절대 버리지 못하는 나의 물건이 그렇다.


작년 봄 내내 이어진 화상면접으로 8월 말, 한국으로의 귀국이 결정됐다. 3달 정도 이어진 면접 기간 동안 설마 설마 하던 한국행이 결정되며, 우리 부부는 본격적인 이사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살던 집부터 온갖 살림살이를 어떻게 할지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물건뿐만 아니라 모든 행정절차에 수반된 많은 서류 작업은 덤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떻게 작별인사를 전할지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이사로 인해 몸이 힘든 것 외에 사실 마지막 인사는 상상만으로도 뭉클하기에 ‘나중에 진짜 결정이 되면 고민하자’고 일부러 미루고 미뤄놨었다. 우리의 귀국에 대한 결정은 사실 주변 몇 명 빼고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우리는 ‘처분할 수 있는 건 모두 처분한다’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서울이 목적지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었기에, 어떤 물건을 챙긴다 해도 언제쯤 다시 사용하게 될지, 그때까지 어떻게 보관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당장 필요한 것’과 ‘나중에라도 가져가야 할 것’으로 나눴다. 당장 필요한 짐은 6개의 캐리어에 나눠 우리와 함께 가고, 나머지 짐은 박스형태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대략 정해진 짐의 정도는 25박스였다. 그 외 모든 가구와 부엌 살림살이, 옷가지는 처분과 양도, 중고판매 등을 통해 처리했다.


모든 짐은 항공편을 통해 우리보다 먼저 한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독일과 한국 사이 오가는 화물양이 많아 선박 편 화물과 크게 가격 차이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선박 편이 별도의 포장비용과 세관비용, 운반함을 짜는 등의 기타 비용으로 더 비쌌다. 항공편 기준으로 한 박스당 운송료는 대략 100유로 정도로 보통의 택배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대행사를 통해 비행기 편을 타는 상황이라 무게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다. 이때부터 여러 비행기 편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 그리고 한국에 와서도 ‘짐’과 ‘무게’의 굴레는 끝나지 않았다.


배송시간은 3주 정도로 세관까지 생각하면 길게 걸리진 않았다. 선박 편으로 보냈으면 더 오랜 시간 걸렸을 것임을 생각하면 도리어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짧은 시간만큼 세관은 밀도 있게 짐을 검사한 모양이었다. 분명 베를린에서 짐을 쌀 때 특별히 모든 박스를 새로 구입해 빳빳한 테이프로 열심히 포장을 했건만, 모든 박스는 걸레가 된 상태로 도착했다. 특히 몇몇 상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세관'이라는 굵은 글씨가 새겨진 박스테이프로 칭칭 감겨온 박스는 화물차에서 내리기도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다행히 물건은 크게 파손되지는 않았지만 보낸 상태로 아주 얌전히 도착하던 '이전 시절'의 배송과정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듯했다. (몇 해 전만 해도 3-4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아주 깨끗한 상태로 짐이 왔다 갔다 하곤 했다. )


우리가 사용하던 베를린의 살림살이는 내가 혼자 살던 시절의 살림들이 많았다. 우리 부부는 한국형 ‘혼수’보다 그저 쓰던 거 쓰다가 고장 나면 바꾸는 식으로 지냈다. 그에 맞게 나이가 적당히 먹은 가구들과 살림들은 애초부터 한국에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러니 당장 필요한 살림들 외의 큰 가구들과 집기들은 현장에서 바로 처리를 해야 했다. 마침 한국의 지인분들이 베를린에 나오시려는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우리가 살던 집으로 오시기로 결정되며 큰 짐들은 모두 처분하지 않고 그분들이 쓰시는 방향으로 해결됐다. 그분들도 베를린으로 오시며 모든 살림을 한꺼번에 마련하는 게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쓸 수 없게 되면 하나씩 하나씩 바꿔가시던지 처분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귀국 후 거처가 결정될 때까지 ‘임시로, 임시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급한 대로 사서 쓰고, 웬만하면 또 참고, 미루며 그렇게 수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 가족이 도착한 곳은 네 명이 임시로 쓰기에도 비좁은 곳이었다. 힘들게 이고 지고 온 살림들은 대부분 캐리어에서 나오지 못하고 몇 개월을 잠들어 있었다. 당장 필요한 물건들은, 가지고 온 것과 새로 산 것이 한 데 정신없이 뒤섞여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베를린에서 곱게 배송 보낸 짐은 풀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본가로 보냈다. 25개의 박스가 부모님의 집으로 도착하는 날, 배달하시는 분 조차도 이게 무슨 짐인지 의아해하시며 나에게 되묻길 반복하셨다.


이사 과정에서 가장 골치 아팠던 살림은 ‘책‘이었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이곳저곳에서 모아 온 책들은 버리지도 못하고 모두 들고 와야 했다. 특히나 무게가 무거운 건축책들이 문제였다. 높은 해상도의 널찍하고 두툼한 책은 도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진을 차근차근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매체였다. 한 권에 3-4킬로그램씩 나가는 책들은 몇 권만으로도 허용 주게인 20킬로그램을 훌쩍 차지하곤 했다. 무게는 거의 책이 잡아먹고, 부피는 옷이 차지했다. 박스마다 무게를 차지하는 책 때문에 짐을 싸는 사람이나 옮기는 사람이나 푸는 사람 모두 고생이었다. 힘들게 아껴 아껴 사 모은 책들은 국제 이사에 아주 큰 걸림돌이었다.


제대로 된 장난감도 없이, 제대로 된 책도 없이 긴 시간을 유량 한 아이들이 마음에 많이 걸렸다. 마트에 갈 때마다, 어떤 아이가 가지고 노는 걸 보며 자신도 갖고 싶다고 하지만 '나중에 이사 가면', '짐 다 풀면', 그렇게 차일피일 오래도 미루고 또 미뤘다. 자신들의 공간에서 한참이나 무언가를 조물딱 하며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의 집중력마저 흐려놓은 건 아닐까 항상 미안해했다. 그리고 2주 전, 드디어 우리는 새로운 집에 모든 짐을 풀었다. 아직도 휑한 아이들의 방을 보며 하나씩 하나씩 무엇을 어떻게 채워나갈까 하는 고민은 이제 행복한 고민이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한참을 헤매고 찾고 서로에게 물어야 한다. 집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물건들과 친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손을 뻗으면 무엇이 어디 있는지, 손에 익은 물건들과 장소들에 대한 기억은 매번 스쳐 지나간다. 어떤 물건을 버리고 왔는지, 새로 샀는지, 아직도 헷갈리기만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과거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이제는 열심히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환경에도 적응하게 될 것이다. 창고에 고이 쌓아둔 박스를 보며 언젠가 우리의 '이사소동'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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