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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14. 2019

카메라의 윤리를 묻다

다큐멘터리 <난민> 리뷰


<난민>, 넷플릭스. 25분 정도의 짧은 다큐멘터리. '난민'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이 붙은 데 비해서는 난민 자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난민들을 피사체로 사진을 찍는 사진가 다섯 명을 따라다니는 이야기. 케이트 블란쳇이 나레이션을 했다. 유엔난민기구 홍보대사라고.


다큐에 등장하는 사진가 다섯은 이렇다. 한 명은 난민선을 타고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접경지역에 도착한 난민들이 독일에 이르기까지 함께 따라가는 사람이고, 한 명은 콜롬비아에서 마피아로 인해 난민이 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고, 한 명은 미얀마 난민들을 찍는 사람이고, 한 명은 카메룬에서 난민들의 초상을 찍어주고, 한 명은 뉴욕에서 미국 시민이 된 난민들의 초상을 찍어준다.


사실 이 주제는 쉽게 감상적으로 다뤄져선 안 되는 주제다. '가엾고 불쌍한 난민'을 피사체로 해서 세상에 난민의 실상을 알리겠다는 식의 사명감은 대체로 '안전한 자들'의 자족적인 정의놀음으로 귀결되기 쉽다. 실제로 그런 논쟁적 사례들은 많다. 예를 들면 쿠르디라는 소년의 시신을 우리는 어떻게 소비했던가. 쿠르디에 눈물 흘렸던 우리는 정작 우리 앞의 예멘 난민들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던가. '아름다운' 혹은 '불쌍한' 사진은 그 대상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지 않음이 전제돼 있기에 감상의 대상으로 마음껏 객관화할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다섯의 사진가의 작업 중 몇몇은 분명 이 지점에서 논쟁적이다. 특히 미얀마를 현장으로 삼은 사진가는 이 지점에서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접경지역에서 출발해 독일까지 따라간 사진가는 독일을 배경으로 난민 한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당신이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라"고 주문한다. 그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건 고민의 여지가 필요한 지점들이다.


하지만 다른 사진가들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그들은 난민들의 초상을 찍어주는 일을 한다. 일종의 사진 봉사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남루하지만, 아니, 남루하면서 아름다운 일상을 기록해주거나, 백색 벽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남겨주는 일들이다. 첨부한 사진의 사진가는 카메룬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다. 난민 가족과 사진가의 저 환한 웃음을 보라. 콜롬비아에서 난민들과 살아가는 사진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불행하지만 사진은 세상을 바꾸지 못해요. 세상은 우리가 바꾸는 거죠. 사진은 못해요."


어쨌거나, 이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난민들이 좁아터진 난민선을 타고 마침내 접경지역에 다다르는 순간을 촬영한 장면인데, 멀리서 주황색 배, 아니 주황색 구명조끼로 가득해서 주황색이 된 배가 해변에 닿는다. 그 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온다. 아이들은 엉엉 운다. 그 아이들을 달래면서, 부모들은 하늘로 기도를 올린다. 누군가들은 그들이 난민이 된 것이 이슬람교의 야만성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까지 살아남아 닿게 용기를 준 것 또한 바로 그 이슬람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앞서 사진가들의 윤리에 대해 얘기했지만, 이 다큐멘터리 자체의 윤리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한순간을 포착할 뿐이지만, 영상은 흘러가는 모든 순간을 포착한다. 첫 장면을 담아내는 영상에서, 배에 있는 한 난민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그를 찍는 카메라를 발견했기 때문일 터다. 사진가는 그를 찍은 사진을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영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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