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스페인북부와 포르투갈편-14)
템플기사단의 포르투갈 지부는 토마르(Tomar)에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서쪽 언덕에 1160년 무슬림을 물리치고 세운 성곽이 있다. 증축을 거듭하며 현재의 수도원이 되었지만, 기사단이 만든 건축물이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템플기사단의 것이라 인증이라도 하듯 중앙집중식의 성당이다.
16면체의 예배당 내부는 정말 화려하기 그지없다. 색감이 다채로운 그리스정교회 성당에라도 온 듯 벽면은 구석구석 프레스코화와 템페라 성화로 가득하다. 성화 사이는 모두 금박으로 장식해 럭셔리 그 자체다. 19세기 초 여기까지 침입한 나폴레옹이 탐낼만 했겠다싶다. 실제로 벽화 일부를 뜯어갔다고도 한다.
예배당 중앙에는 세고비아의 베라크루즈 성당에서 본 것처럼 8개의 기둥이 폐쇄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집 안의 집이다. 템플기사단의 성당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 공간은 특별한 의식이 치러진 장소였을 것이다. 1515년 마누엘 1세가 서쪽 바깥벽을 터서 직사각형의 사제단 예배실(Chapter House)과 연결시키니 예루살렘 성묘교회와 유사한 평면이 만들어졌다.
그 공간의 경계에 이콘(성화)으로 채워진 큰 아치가 세워졌고, 그 반대편 벽에는 크로아 파테를 꼭대기에 올린 마누엘 양식의 창문이 만들어졌다. 마누엘 양식은 대항해 시대를 연 국가답게 배에서 쓰는 매듭이나 해초, 어패류 등을 모티브로 하는 장식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토마르 성채에서 강 건너편에는 산타 마리아 도 올리바우(Santa maria dos Olivais)라는 이름의 소박한 성당이 있다. 포르투갈 지부를 이끌었던 그랜드마스터 22명의 무덤이 안치된 템플기사단의 판테온이다.
토마르를 건설했던 3대 그랜드마스터, 구알딩 파이스(Gualdim Pais)도 여기 있다. 그는 무슬림한테 빼앗은 땅에 수많은 성채를 건설하여 지배권을 확고히 다진 영웅이다. 현재의 포르투갈 지도에서 토마르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레콩키스타 동안 마치 6.25 전쟁 시절 우리나라의 38선 같은 곳이었다. 서로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며 전선이 정체되었던 접전지였다.
구알딩은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군 경험을 살려 주요 요지에 성채를 세우고 방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리고 1190년, 무슬림의 대대적인 반격을 물리치면서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스페인 국경부터 차례로 몬산토 캐슬, 카스텔로 브란코 캐슬, 알모룰 캐슬, 폼발 캐슬 등이 모두 그가 건설한 성채들이다. 피비린내 나는 극한의 전쟁터였지만, 하나같이 천혜의 절경을 끼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1312년 템플기사단 해체의 바람은 포르투갈에도 불어닥쳤다. 포르투갈은 무슬림과의 전쟁을 13세기 초에 이미 마무리했지만, 합병을 호시탐탐 노리는 스페인(카스티야 왕국)의 위협을 받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사단을 해체할 마음이 없던 포르투갈 왕 디니스는 템플기사단을 곧장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바꿨다. 조직이나 재산 모두 그대로였다. 이름만 변경했을 뿐이다. 1319년 교황의 공식 허가까지 받았다. 토마르 성채는 그대로 그리스도 기사단의 본부가 되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부터 왕족이 그랜드마스터를 맡았다. 교황의 군대가 아닌, 국왕의 군대가 된 것이다. 그랜드마스터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항해왕’ 엔리케였다.
셋째 왕자였던 엔리케는 일찌감치 왕위를 포기하고, 대신 1420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가 된다. 이즈음 그는 이미 대항해에 꽂혀 있었다. 포르투갈 최남단, 대서양을 향해 돌출한 사그레스(Sagres)는 그의 꿈이 시작된 곳이다.
바라만 봐도 영혼을 집어삼킬 듯 덤벼드는 파도를 정면에서 맞선 50m 높이의 아찔한 절벽이 삼면을 두른 작은 반도다. 지금은 서핑의 성지이지만, 모두들 세상의 끝이라며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던 여기에 엔리케는 항해학교를 세웠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언젠가 저 파도를 거슬러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무모한 주장을 당시 누가 이해했을까? 더구나 포르투갈은 기나긴 전쟁을 거쳐 이제 막 독립을 보장받은 신생 국가였다. 그런 엔리케를 믿어준 든든한 후원자는 그의 아버지 주앙 1세 대왕이었다.
서자였던 주앙 1세는 적자였던 이복형 페르난두 1세가 아들 없이 죽자 포르투갈의 왕위우선권을 주장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한판 붙어야 했다. 1385년 포르투갈 중부의 알주바로타에서 포르투갈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패배했다면 지금의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앙 1세는 아군보다 무려 5배나 많은 카스티야군을 단 한 시간 만에 섬멸하고 아비스(Aviz) 왕조를 열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만든 건축물이 세계문화유산, 바탈하(Batalha) 수도원이다. 바탈하라는 말 자체가 ‘전투’다. 주앙1세 부부는 물론, 항해왕 엔리케 역시 여기 묻혀있다.
그런데 이때 맺어진 앙숙 카스티야와의 평화조약은 포르투갈에게 약이자 독이었다.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평화롭게’ 고립된 것이다. 노동력도 한정되어 있고 20세기 초에나 등장하는 질소비료 같은 것도 없던 중세 시대에 봉건영주들은 땅을 빼앗아 노동력과 식량을 확보해야 했다. 지리적 고립은 사회적 불만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나마 무역과 상공업이 싹트면서 새로운 경제환경이 조성되고 있으나 지중해의 제해권은 베네치아 공국에 이어 오스만제국이 거의 독점했다. 포르투갈은 낄 틈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엔리케가 생각했던 대안은 지중해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이 알았던 아프리카는 지금의 서사하라에 위치한 보자도르(Bojador) 곶까지였다. 여기를 넘는 게 1차 목표였다.
주앙 1세가 엔리케에게 맡긴 템플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은 이 꿈에 대한 투자금이 되었다.
지금 사그레스에는 작은 성곽 외에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항해학교를 세웠다지만, 그것이 진짜 학교였는지 혹은 도서관이나 조선소였는지조차 확인이 불가하다. 유럽의 지리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등을 부르고 엔지니어를 길러 기존의 배를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게 개조했을 거라는 후대의 상상만이 전설처럼 떠돌 뿐이다. 항해기술과 선박건조술의 진보가 짧은 기간 동안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이유를 나름 설명하고팠을 것이다.
솔직히 당시 유럽의 석학들이 변두리의 낙후된 국가에 모였을 것 같지도 않고, 파도가 매서운 절벽은 배를 건조할만한 환경도 아니었다. 지금도 사그레스는 대항해를 상징하는 포르투갈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지만(포르투갈의 국민맥주 이름도 사그레스이다), 세계사를 바꿀 만큼 대변혁이 일어난 장소치곤 신기할 만큼 관련 기록이나 책 한 권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엔리케가 무엇을 했었는지는 앞으로도 여전히 미스터리겠지만, 어쨌든 1434년 기어이 보자도르 곶을 정복한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과정에 템플기사단의 인력과 지식, 그리고 막대한 재산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실제로, 빨간 크로아 파테를 새긴 카라벨선을 타고 엔리케의 뒤를 이어 대항해를 떠난 이들 모두 그리스도 기사단(템플기사단)이었다. 대표적인 템플기사가 바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이다.
리스본의 서쪽, 벨렝지구는 그의 선단이 출항했던 곳이다. 벨렝탑은 하루에 두 번 밀물에 잠기는 1층이 정치범을 가두었던 수중감옥으로 악명높았다. 지금은 육지가 확장되면서 탑과 거의 붙어있지만, 원래 이 탑은 수심이 깊은 테주강 한가운데 있어 큰 배를 접안 했던 선착장이었다. 대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바스코도 여기서 국왕 마누엘 1세를 알현하고 멀리서 가져온 진귀한 향료를 풀어놨다. 탑 곳곳에 새겨진 문양은 크로아 파테다. 템플기사단의 소유였단 의미다.
마누엘 1세는 바스코가 몰고 온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근처에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고 거대한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짓도록 하였다. 마누엘 양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수도원 교회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국민시인 카몽이스(그의 시는 신트라의 땅끝, 호카곶에서 만날 수 있다), 왼쪽에 바스코의 무덤이 있다. 화려한 조각의 석관에도 역시 크로아 파테가 선명하다.
수도원 구경 후 옆 가게에 잠시 들러 막 구워내 진노랑 열꽃이 활짝 핀 에그타르트를 사는 건 리스본 트래블러의 예의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수녀들은 옷을 빳빳하게 하는데 계란의 흰자를 사용한 후 남은 노른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에그타르트를 처음 만들었다 한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은 그 비법을 전수받은 원조 가게다. 노른자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야들야들한 단맛은 단박에 정신마저 흐느적거리게 한다. 세 번째 리스본이지만 매번 데자뷰까지 느끼며 게걸스레 처묵처묵하게 되니, 혹시라도 다시 여길 온다면 그건 순전히 저 사악한 에그타르트 때문일거다.
수도원에서 테주강변으로 나오면 장엄한 발견기념비가 있다. 1960년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대항해 시대의 주역 33인이 조각되어 있다. 배를 모티브로 한 기념비는 금세라도 출항할 듯 역동적인데, 제일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대장은 당연 항해왕 엔리케이다. 그리고 그 뒤로 16인씩 두 줄로 그를 따른다. 서쪽에는 주로 화가, 시인, 수학자, 항해사, 선교사인데, 동쪽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 많다. 바스코를 비롯해 브라질을 발견한 카브랄, 최초로 세계일주를 떠난 마젤란도 눈에 띈다. 모두 그리스도 기사단의 템플기사들이다.
템플기사들은 앞장서 말을 버리고 배를 탔다. 아무리 그랜드마스터가 원한다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에 막대한 재산을 내놓고, 뱃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하지만 템플기사단의 입장에선 그들이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지 이해가 된다. 프랑스 왕에게 배신당한 뼈아픈 경험이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가가 그들의 생명을 연장해 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콩키스타에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바꿔말하면, 레콩키스타가 끝나고 이들 가톨릭 왕가가 얼마든지 딴마음을 먹게 되면 기사단은 또 어떤 수모를 당할지 미리 대비해야만 했다. 그랜드마스터가 된 항해왕 엔리케가 정확히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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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6-61 : By Gorivero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353040
사진6-62 : By ho visto nina volare from Italy - PORTOGALLO2007, CC BY-SA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196534
사진6-63 : By Alvesgaspar - Self-photographed,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559319
사진6-64 : https://www.portugalvisitor.com/portugal-attractions/santa-maria-do-olival
사진6-65 : https://www.en-vols.com/en/getaways/sagres-portugal-legendary-peninsula/
사진6-68 : https://ourplanetimages.com/belem-tower-portug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