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의 시간은 갑자기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44/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스페인북부와 포르투갈편-15)

by 이경석

1492년 1월, 드디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무슬림을 상대로 한 국토회복운동)가 막을 내렸다.


야심많은 카스티야-레온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이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비밀 결혼식까지 치르며 통일 스페인 왕국의 기초를 놓은 지 20여 년 지났을 때였다. 이베리아반도에 마지막 남은 무슬림 타이파, 그라나다 왕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사진6-72. 그라나다의 항복을 받고 있는 이사벨 여왕, 그라나다 로열채플에서 촬영 ©이경석)


그로부터 2개월 후 템플기사단의 우려는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승리의 전리품이 된 알함브라 궁전에서 고시한 칙령(Alhambra Decree)을 통해 이사벨 여왕은 스페인을 가톨릭 신정일치 국가로 선포한다. 그리고 7월까지 모든 유대인들과 가톨릭으로 거짓 개종한 무슬림은 당장 스페인을 떠나도록 명령했다. 물론 재산은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었다. 파장은 컸다.


우선은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의 재산이 탐났겠지만, 주로 상업, 은행업, 의료계 등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빠져나가며 스페인은 다시 농업국가로 전락한다.


(사진6-73.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야경 ©이경석)


같은 해에, 가톨릭의 교리와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을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1478년 코르도바에 처음 선보였던 종교재판소도 전국에 확대 설치했다. 레콩키스타의 명분이기도 했지만, 통일 스페인 왕국은 가톨릭 근본주의 혹은 가톨릭 순혈주의를 앞세우며 이전까지 유지하던 관용 정신을 포기했다.


게다가 악명높은 종교재판소는 공포정치를 조장해 감시사회를 만들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도 누군가의 밀고로 재판을 받게 되면 고문을 받았다.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고문을 멈추지 않았으며, 고문에 굴복해 없는 죄를 고백하면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던 종교재판은 이미 템플기사단이 경험했던 악몽이었다. 게다가 기사단은 이미 이단으로 낙인찍혔고, 교황은 조직의 해체까지 지시했다. 따라서 첫 타겟은 유대인과 무슬림이겠지만, 가톨릭과는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졌다고 의심받는 자신들이 곧 과녁이 될 게 뻔했다.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남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하릴없이 맡겨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콜럼버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런데 그 와중에 홀연히 콜럼버스가 나타났다. 역시 1492년이다.


그해 4월경 그는 그라나다 인근에서 이사벨 여왕을 만났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 중인 포르투갈과 달리, 대서양을 직선으로 돌아 인도로 가겠다는 계획안을 내놨다.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 준비를 착착 진행중이라는 소문에 초조하던 이사벨 여왕은 결국 콜럼버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해 8월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다섯 척의 배를 이끌고 항해를 시작했고, 다음 스토리는 잘 아는 것처럼 10월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인 콜럼버스의 집요함이 만들어낸 훈훈한 성공담으로 읽혀왔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을 1485년에 처음 만나 똑같은 제안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프랑스나 포르투갈과 접촉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성공 뒤에는 유대인들의 아픔이 있었다.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맺은 계약은 항로 개척 과정에서 발견하는 땅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에 관한 것이었다. 항해 비용은 순전히 콜럼버스의 몫이었다. 당연히 스페인 왕가의 금전적 지원은 없었다. 콜럼버스는 투자자를 모집해 선단을 꾸렸다. 요샛말로 하면 민간투자사업에 스페인에서 쫓겨날 처지의 유대인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선원을 자청했고, 재산을 바쳤다. 누구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던 계획이었지만 4개월 만에 출항이 가능했던 이유다.


최근에는 콜럼버스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연구결과까지 나오고 있다. (콜럼버스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이란 건 최근에 밝혀졌지만, 출생연도나 그의 가문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가 유대인이건 아니건 콜럼버스는 당시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의 마지막 탈출구였다.


이사벨 여왕이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알함브라 칙령으로 인해 결과적으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자발적으로(?) 이 무모한 도전에 내놓은 셈이 되었다. 여왕은 돈 한 푼 안 썼으니 실패해도 그만이었다. 반대로 덜컥 신항로라도 개척되면 포르투갈이 수십 년간 이룩해놓은 성과를 순식간에 능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가성비 제대로인 사업이었다.


(사진6-74. 콜럼버스의 무덤, 세비야 대성당 ©이경석)


상황이 다급해진 템플기사단도 달려든다. 바스코나 마젤란과는 달리 콜럼버스가 템플기사라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가 탔던 배에는 포르투갈 탐험가들처럼 빨간 크로아 파테를 돛에 선명히 그려 넣었다. 템플기사단도 콜럼버스 선단에 합류한 정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일찌감치 레콩키스타를 끝내고 관용의 정신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의 뒤를 이어 1497년 가톨릭 순혈주의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일까? 순혈주의가 선포된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처럼, 1497년 포르투갈에선 템플기사인 바스코가 홀연히 리스본을 떠났다.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 수십 년 동안 번번이 좌절해야 했던 인도양 루트를 단번에 개척했다.


우리는 통상 항해왕 엔리케와 바스코를 동시대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둘은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세대도 다르다. 1460년 엔리케가 죽은 후 대항해는 사실상 멈췄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고작 상아거래나 노예무역에 안주하면서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488년 몇 번의 시도 끝에 역시 템플기사였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쪽 끝에 다다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여기를 넘어서기까지 다시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바스코의 성공으로 폭풍의 곶 혹은 절망의 곶이라 불리던 아프리카 최남단의 이름도 희망봉으로 바뀌었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가톨릭 순혈주의가 발흥하자마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콜럼버스와 바스코가 혜성처럼 등장해 신항로 개척을 순식간에 완수한 것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퇴로가 없는 템플기사단에게 항해왕 엔리케의 죽음에 이어 가톨릭 순혈주의로 조성된 위기가 강력한 자극을 준 것이다.


1519년 또 다른 템플기사, 마젤란이 등장한 이후 템플기사단의 활동은 어느 순간 이베리아반도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엑소더스라도 일어난 듯, 대항해를 계기로 신대륙에 새로운 본거지라도 차린 걸까? 기사들이 빠져나간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의 용맹함을 잃어버렸다. 1588년 영국 해군에 전멸당한 무적함대는 그 신호탄이었다.


여기에 그나마 남아있을 템플기사마저 모두 이베리아반도에서 탈출하는 결정적 사건이 터진다.


1700년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가 스페인 국왕이 된 것이다.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라니! 부르봉 왕조가 어떤 왕조인가? 템플기사단의 철천지원수인 카페왕조의 필리프 4세 혈통으로 이어진 왕조다. 기막힌 악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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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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