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절기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이며 양력 10월 8~9일 무렵에 든다.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 농촌은 오곡백과를 수확하기 위해 타작이 한창인 때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날씨에 이렇게 민감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긴 추석 연휴 비가 계속되니 안타까움과 평소 좋아하는 비라서 안정감이 동시에 드는 시기인 듯했다. 혼자였다면 조용한 숲 속에 있는 카페를 찾아 따뜻한 카페라테를 한 잔 시켜놓고 나빠진 시력이지만 좋아하는 책을 한 권 읽고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우다다 뛰어다니는 아기를 잡느라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기가 더 크기 전 까진 카페에서 차 한잔은 그저 사치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두 돌 아빠의 현실이다. 한로 시기엔 농촌에서 수확으로 바쁘겠지만 도시에서는 날씨가 좋아 어디로 갈지 찾아보고 방문하기 바쁜 나날들인 것 같다. 문제는 날씬데 비가 오는 날이 많다는 것이 변수였다. 하지만 갈 사람은 간다. 우리도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제주도.
이곳을 말하니 다들 그랬다.
'아니, 제주도에 뭐 있어? 혹시 집 샀니? 호호'
제주도를 자주 간다며 다들 우스게 소리를 했다. 하지만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 현실적으로 적었다. 만 24개월 이하 일 땐 비행기 좌석을 끊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처음엔 외국으로 가자고 했으나 아기가 비행기에서 조용히 있어 줄지 의문 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선 가까운 곳으로 가보자 했는데 후보군이 후쿠오카 정도였다. 그러나 걱정나라 왕비인 아내가 걱정이 많아 결국 국내로 목적지를 돌렸고 최종 선택지는 익숙한 제주도가 되었다.
결혼 때 코로나로 외국 여행이 어려워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매년 제주도를 찾았다. 심지어 태교여행도 제주도였으니 꽤 많이 다녀온 것은 맞다. 그만큼 우리에겐 좋은 추억이 많은 곳이 제주도였다.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 날. 아기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추석 전 날 아침에 일어나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내가 자다 일어나 보니 밤새 잠을 못 자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체온계로 열을 재보니 37.7-8이 나왔다. 약간은 애매한 상황이라 어찌할까 하다 병원을 가기로 했다. 하필 평소엔 들고 다니던 해열제가 없어 할머니 댁에 남아 있던 것을 먹이고 망설임 없이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병원에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꽤 많은 부모들이 와있었다. 대기를 하면서 아기를 지켜보니 열이 조금 내려가고 있었다. 역시나 감기였다. 어디서 걸렸을까? 부모의 불찰 같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얼른 낫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와서도 기운 없이 옆에서 앉아있던 아기는 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추석 당일도 오전엔 괜찮았다가 오후엔 또 올라가 저녁 늦게쯤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와 이모가 아쉬워했지만 익숙한 환경이 낫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집에 오고 나서 새벽에 열이 안 떨어져 급히 병원을 다시 찾았다. 새벽 6시 비가 오는 날씨였고 병원은 연휴기간이라 한산했다. 6시에 병원 문을 연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내일이면 제주도를 가야 하는데 아내와 나는 고민이 깊어졌다. 가는 것이 맞을까?? 당일 아침 우리는 아기의 컨디션을 수시로 체크하며 비행기를 타러 갔다.
공항에서도 아기는 컨디션이 안 좋았다. 비행기에서 울기라도 하면 민폐이기에 조마조마했지만 무난히 도착했다. 급히 점심을 먹고 숙소로 가려했으나 미리 알아본 식당은 예정도 없이 휴무였다. 다른 식당을 찾아 한 끼를 잘 먹고 숙소에 들러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무리 안 하는 것으로. 그래도 성산 일출봉은 가보자고 해서 갔다가 낭패를 봤다.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서 아기에게 안 좋을 같아 급히 내려왔는데 하필 옆에 있던 절에서 넘어져 얼굴에 상처가 나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툭툭 털고 일어날 아기였지만 이날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얼굴에 피 투성이로 울고 있는 아기를 보며 여행 첫날이 뭔가 힘겨운 하루가 되고 있었다. 그래도 다음날부터는 컨디션이 좀 괜찮아져 여기저기 다니며 옛 추억에 잠시 빠져들었다. 스냅 사진도 촬영을 잘 마쳤고 그렇게 3일간 제주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기는 한 번 울음이 터졌다. 좁은 곳에서 오랫동안 있었으니 자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냥 한 자리 더 예약해서 아기에게 주는 것이 맞지 않았나 싶다.
여유와 걱정 그리고 힘겨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여행. 혼자라면 절대 느껴볼 수 없는 행복감과 조바심도 있는 여행. 그래도 나중에 이 또한 멋진 추억이 될 거라 믿고 함께하는 여행에 큰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날씨로 인해 여러 상황이 안 좋았지만 가을날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추워져 이런 날을 즐기려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 사이 아이는 조금 더 클 것이고 나 또한 조금 더 나이를 먹어 갈 것이기에 오늘 같은 기분은 안 들 것이다. 그저 주어진 현재에 만족하며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