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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1장 1화)

1장, 돌아보지 마

by 구정훈



1장. 돌아보지 마


1장 1화.

<공항>


창밖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하늘은 아직 맑지도 어둡지도 않은 채 중간쯤에 머물렀고, 강남역 골목 어귀의 상점 간판들은 하나둘 불을 끄기 시작했다. 밤새 쌓인 먼지와 이별전야의 잔기운이 가시지 않은 방 안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우리가 한 달간 함께 지냈던 이 낯익은 공간은 작별의 침묵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와인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젯밤 마시다 만 커피의 남은 흔적이 투명한 컵 안쪽에 말라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빛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들었다. 우리는 그 컵을 치울지 말지 모른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떤 감정도 명확하게 이름 붙이지 않은 채 흐르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짐은 이미 어젯밤 다 싸두었다. 캐리어 두 개, 중간 크기의 가방 하나. 우리의 지난 한 달이 전부 그 가방 안에 담겨 있었다. 방 안은 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장대 위에는 그녀의 립밤과 아침에 바를 간단한 화장품 몇 개만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고, 그녀가 개어준 내 옷가지들이 침대 발치에 가만히 포개져 있었다.


그녀와 함께한 이곳의 물건들을 집으로 옮겨갈 수 있다면 옮겨가고 싶었다.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우리를 위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나와 그녀의 흔적이 묻어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첫날 샴페인을 마시기 위해 구입한 한 쌍의 와인잔. 하지만 이상하게도 와인잔에 손을 뻗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버리기도, 간직하기도 어려운 감정처럼 말이다.


“이거 버릴까?” 그녀는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했지만, 그녀 역시 무언가 참아내기 위해 애쓰는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우리가 처음 구입했던 물건이니까, 내가 집으로 가져갈게. 자기가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땐 이 잔으로 한잔 해야지” 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진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그 와인잔을 가방에 넣지는 않았다. 이미 내 짐도 가득 차서 가방에 넣으면 와인잔이 깨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함께 마지막으로 방을 정리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고 사랑을 키웠던 고마웠던 이 공간에 감사함이라도 전하려는 듯 쓰레기를 분리수거를 하고, 집에서 가져왔던 침대 시트를 벗겨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욕실에서 세탁 바구니를 꺼내고, 샴푸와 바디워시를 정리했다. 그녀가 무언가 정리하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칫솔 두 개는 컵 안에 여전히 나란히 꽂혀 있었고, 그것들을 손에 쥐고 가만히 멈춰 있는 그녀의 손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떨림은 이 순간이 올 것임을 알면서 이미 익숙해지려고 노력한 감정이었다.


두 눈이 약간 벌게진 채 욕실에서 나온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이 방, 괜찮았지?” 내가 말했다. 무엇이 괜찮았는지를 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녀를 위해 이 말을 꼭 남기고 싶었다.


“응. 좋았어. 특히 저 창문. 저기 앉아서 자기와 함께 비 오는 소리 듣는 거, 나한텐 진짜 꿈같았거든.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녀의 말에는 지난날의 평온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비를 좋아했지만,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오늘 만큼은 하늘이 맑기를 간절히 바랐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마친 우리는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늘 걷던 골목을 함께 걸었다. 무정해 보이는 회색빛도시는 아직 덜 깨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대가 우리에겐 가장 잘 어울렸다. 우리는 아주 조용히, 서로의 발걸음에 맞춰 케리어를 끌며 천천히 걸었다.


“기억나? 우리 처음 여기서 자기가 반갑다고 내 뺨에 키스했을 때?” 나는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쥐며, 그날을 꺼내듯이 말했다.


“응. 자기가 얼어붙어 있는 거 같아서 처음 보고 나도 모르게 자기 뺨에 키스를 했었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데 자기인 줄 알겠더라.”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그냥 몸이 그렇게 반응하던걸.” 그녀가 그 말을 하며 웃어주었다. 그 웃음은 짧았지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 되었다.


정류장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말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른 아침의 강남역. 바람을 타고 바닥을 뒹구는 전단지,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모든 것이 그저 일상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속도로 천천히 걸었다. 시간이 이대로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공항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 그녀는 창가에 앉았고, 나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말 대신 손을 맞잡았다. 손의 온도가 서로의 마음을 대신했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모두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걷던 거리와 건물들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았다. 머물렀던 곳이 빠르게 작아졌고, 그만큼 그녀와의 시간도 얇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여전히 곁에 있었고, 손을 맞잡고 체온을 나누며, 같은 마음으로 이 도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이별의 시작이 아니라, 우리가 끝까지 지켜낸 마지막 안부라고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유리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제법 낮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고, 우리는 그 흐름에 맞추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그녀는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나는 그 옆에서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국수속을 하기 위해 서 있는 줄은 예상보다 훨씬 짧아 보였다. 우리는 걸음을 늦췄고, 자꾸만 속도를 줄이게 되는 자신을 모른 체했다.


그녀의 발끝은 조심스러웠고, 나는 옆에서 맞춰 걷는 척하며 멈추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우리가 이 길을 천천히 걷는 이유는, 아직 서로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천천히 걸을까?”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자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공항에서 나눈 첫 번째 말이자, 마지막의 시작이었다. 출국 수속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식사는 공항 2층의 조용한 한식당에서 했다. 공항의 생선구이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음식은 마치 준비되어 있다는 듯 빠르게 나왔다. 그녀는 한참 동안 접시만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조심스럽게 뼈를 발라낸 고등어구이를 한 점을 들어 내 밥 위에 올려주었다.



그림자처럼 입술에 걸린 미소는 무너짐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어처럼 보였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그녀의 사진을 담았다. 그녀가 미국에서 시간을 거슬러 나에게 온 이후에 생긴 버릇이었다.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언제 어디서든 모든 흔적을 남기는 것이 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나는 물 잔에 손을 댔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대화가 끊긴 자리에서는 사소한 동작조차 필요 이상으로 무게를 가졌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앉아 있었지만, 이미 서로를 건너기 어려운 거리에 다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했다.


“천천히 꼭꼭 많이 씹어서 먹어.” 그녀가 말했다. “응. 그럴게.”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입 안에서 씹히는 감촉만이 남았고, 맛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나란히 물 잔을 들고 서로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다음 생의 기억이라도 지금 만들어두려는 듯이. 그러나 그 순간조차 금세 흘러갔다.


아직 시간이 조금은 남았다고 생각했다. 미리 게이트를 확인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앞은 생각보다 붐볐다. 사람들은 줄을 서 있었고, 누군가는 표를 확인했고, 누군가는 이미 떠나 있었다.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게이트 앞으로 도착한 순간, 그녀가 내 셔츠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 작은 접촉이 무너짐을 막고 있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이별의 장면이 생각과 다르게 급하게 진행이 되었다.


“금방 또 볼 거야.”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감싸며 말했다. “우린 행복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그 말은 믿기보다는 믿고 싶다는 선언 같았다. 그녀가 그 말을 믿는 듯 입술을 깨문 듯 입가에 주름이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를 안았다. 내 팔도 그녀의 등을 감싸안았다. 그 따뜻한 체온이 말없이 서로에게 흘러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장소리조차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은 너무 조용했고, 조용해서 더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해.”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만,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말보다 더 큰 감정은 때론 말로 옮길 수 없다는 걸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고, 몇 걸음 걸은 뒤 잠시 멈췄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돌아보지 마.”


뜨거워지기 시작한 눈시울을 그녀에게 들키기 싫었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지만 고개는 끝내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그 장면은 내 마음에 아주 깊게 박혔다. 그 말은, 그녀가 눈물을 참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 뒷모습을 내가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무언의 결심이었다.




공항은 언제나 누군가의 기다림과 누군가의 이별이 겹겹이 교차하는 곳이다. 오늘,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다시 밤과 낮이 정반대인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유리벽 게이트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공항의 소음과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오직 내 시간만이 가만히 멈춰 있는 듯 느껴졌다. 눈을 감아도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더 주고 싶었던 다정함, 다 전하지 못한 감정, 그러나 단 하나도 의심하지 않았던 마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돌아서지 못했다. 혹시나 그녀가 게이트에서 보이지 않겠다 싶은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는 혼자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의 그 마지막 장면은, 끝까지 바라본 눈빛보다 끝내 돌아보지 못한 시선 속에 더 오래 남았다. 그녀는, 어느 아름다운 시절보다 나에게 오래 남았고, 시간보다 깊이 내 안에 새겨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헤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살아내기 시작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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