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돌아보지 마
그녀는 법적 결별 상태로 이혼 소송 중이었지만, 갈 곳이 없던 그녀는 아직 전 남편의 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전 남편은 누나인 이혼 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혼에 대비하며 그녀를 철저히 이방인 취급했다.
단 한 푼의 재산도 그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빛톨은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친정에서 도움받아 산 자가용마저 남편 명의였고, 경력도 단절되고 직업도 없이 길바닥으로 쫓겨날 위기에 몰린 그녀에게 지금의 집은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였다. 그녀는 지금 그 어디에도 마음 편히 숨 쉴 공간은 없다.
그녀는 변호사를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실제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소송을 결심한 건, 자신을 두 차례나 자살로 몰아넣은 정신적 학대와, 18년 동안 LA와 보스턴을 오가며 시부모와 남편에게 헌신한 시간에 대한 배신감만으로는 편견을 뚫고 잘 준비된 저들을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저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남편과 시댁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경멸하며 “골디거”라 불렀고, 그녀가 시댁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정신적으로 불안한 여성이라는 악의적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에게 그녀는 혐오와 비하의 대상으로 규정되어 버린 듯했다.
법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그녀가 전 남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법은 그녀보다는 유대인 상류층 가문, 그리고 변호사 누나를 통해 법적 조력을 쉽게 받는 전 남편 쪽에 훨씬 유리하게 작용할 것만 같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고립된 그녀의 모습은 그곳에서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집 안의 갈등은 날로 격렬해졌다. 전 남편과의 언쟁은 매번 언어폭력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달았다. 심지어는 나와 통화하는 도중에도 그의 거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고, 그녀가 흥분해서 나에게 보내오는 집안 사진 곳곳에는 그녀를 비하하는 전 남편의 낙서가 집안 이곳저곳에 남겨져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전해져 오는 그녀의 떨리는 숨소리는, 이 문제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했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나의 심장도 쪼그라드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연락이 며칠간 끊겼다. 연락이 닿지 않는 내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녀의 소식을 알 방법은 없었다. 며칠이 흐른 뒤에서야 다시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고 나는 그날 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전 남편과 언쟁 끝에 그를 밀쳤고, 남편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말을 들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남편의 일방적인 진술만으로 상황은 이미 결론이 난 듯 보였고, 경찰의 표정에는 오직 그녀를 추궁하겠다는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형식적으로 집 안을 살핀 뒤 그녀를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경찰의 시선은 마치 “이 여자가 언제든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의 항변은 냉랭한 목소리로 듣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날 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유치장으로 이송되어 갇히게 되었다.
유치장에서 그녀는 자살방지 독방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 이유를 깊이 고민하지 않고 자살방지 독방에 있었다고만 말을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 남편이 그녀가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경찰에 알린 탓이었으리라 생각됐다.
독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옷을 모두 벗은 뒤 거칠고 차가운 안전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찢어 자살을 할 가능성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살 방지용 옷은 마치 벌처럼 살을 찔렀고, 따가움이 밤낮없이 이어져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매 순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기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그녀였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불법 체류자 보듯 경멸했고, 그들의 표정은 돈 많은 미국인을 유혹한 ‘아시아 여자’라는 시선을 숨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내내 유치장 안에서의 참혹한 시간은 나를 더욱 침울하게 했다. 식사는 포크나 수저 없이 손가락으로만 집어먹는 차가운 음식으로 나왔다. 비웃는듯한 교도관의 시선은 언제나 차갑게 문틈 너머로 그녀를 감시했다. 그녀는 숨조차 허락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때 알았어. 나는 내가 아니라, 위험물로 분류된 존재라는 걸.” 그녀는 독방에서의 사흘을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백 번 “왜?”를 되뇌었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한국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감옥에 있었으니 이런 것쯤은 좋은 경험이 될 거야”라며 다소 엉뚱한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달랬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묻어나 있었다.
얼마나 공허했을까. 그녀는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니었고, 매 순간 숨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조용한 절망처럼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내가 걱정할까 두려웠는지, 감금되었던 기억을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려주듯 담담히 이어갔다.
유치장에서 풀려나 돌아온 날, 그녀는 집 안이 여전히 어질러진 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TV에서는 쇼 프로그램 소리가 흘러나왔고,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돌리던 남편은 그녀가 들어서자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얼굴에는 ‘왜 이렇게 빨리 나왔지?’라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가 처한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녀는 자신에게 돌아올 곳조차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법이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고 말했다. 남편 역시 경찰서에 감금되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 남편만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약자 편이 아닐까? 라는 생각한 그저 나의 희망에 불과했고, 그녀조차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인 거 같아"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 아버지의 추억이 남겨진 곳, 그 흔적을 따라 건너온 미국은 이제 그녀에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고, 자신이 집의 주인도, 손님도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속 깊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답답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웃들도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경찰차가 왔던 그 밤, 창문 너머로 그녀가 연행되는 장면을 이웃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남편은 이웃들에게 “아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그녀의 전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덕에 그녀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적대감 어린 시선과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았다. 이웃과 말다툼을 벌이다 다리가 차여서 멍이 든 사진을 나에게 보내오고는 그들과 당하지만 않고 한바탕 했다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나에게 사진을 보내곤 했다.
문제는 밤이었다. 정신질환을 의심한 이웃 중 누군가는 밤마다 그녀의 집 앞을 서성였고, 창문 너머 인기척은 그녀를 잠 못 들게 했다. 통화 중에도 그녀는 내내 긴장했고, 커튼에 비치는 그림자가 머물다 사라지기라도 하면 숨이 막혀왔다. 남편의 차가 없는 날에는 보다 대담하게 창문 근처까지 다가와서 창문으로 무엇을 자꾸만 던지며 툭툭 치는 소리에 그녀의 창에다 누구냐고 여기서 사라지라고 소리치는 등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엑스가 집에 있을 땐 숨을 쉴 수 없어. 나를 자꾸 건드리니까. 그런데 남편이 보스턴으로 가버리면 마음은 편하지만 좀 무서워. 누가 자꾸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 같아.”
그녀는 방 안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통화 중에도 귀를 곤두세우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차가운 바닷속에서 파도에 휩쓸린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고 통화를 이어가며 안심시키는 것뿐이었다.
LA에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그녀는 위험함을 무릅쓰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빗방울이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와 희미한 도시 불빛에 묻힌 빗줄기. 그녀는 그 풍경을 영상으로 찍어 내게 보냈다.
“지금 비가 와.”
그녀의 들뜬 목소리와 함께 전해진 빗소리는 내게 위로처럼 들렸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랜만에 마음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곤 했다. 그녀도 비를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이면 산책을 나서거나 창밖을 오래 바라본다고 자주 말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한국에 있을 때의 기억을 꺼냈다.
“아주 어릴 때 장마가 오면 마당에 빗물이 고이고, 개구리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빗소리 들으면서 아빠랑 부침개 부쳐 먹던 기억도 나.” 그녀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밝아졌다. 그날만큼은, 우리 둘 다 불안에서 벗어나 빗소리와 함께 평온하게 잠들 수 있었다.
희망을 잃은 미국은 그녀에게 너무도 낯설었다.
“나… 이러다 정말 길에서 자게 될까 봐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그 한마디는 내 마음을 처절하게 짓눌렀다. 그 말에는 단순한 불안이 아닌, 방 안을 가득 채운 공포와 절망,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는 참담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가 한 인간이 아니라 출하를 기다리는 동물처럼 사육되며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구석에 스스로를 감금한 채 불안과 절망만을 벗 삼는 그녀의 현실은 나를 절망시켰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전화를 끊을 때마다 나는 이 모든 걸 막지 못하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우리는 밤마다 통화를 이어갔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의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그녀가 혼자가 아니란 걸, 누군가 함께 밤을 버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새벽까지 이어진 통화 속, 떨리는 숨소리를 듣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박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내가 보낸 글을 읽을 때마다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글을 보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게 느껴져.” 그 목소리는 마지막 숨결처럼 간절했고, 그 한마디는 내 안으로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어둠 속에서 꺼내는 일이라는 것을. 지독한 고립과 공포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단 하나의 빛이 되고 싶어 했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어둠 속에서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라고 속삭인 뒤 전화를 끊는 밤은 무한히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다음 달 한국에 갈래."
"나, 자기 만나러 한국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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