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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2장 1화)

2장. 거리 제로

by 구정훈



빛톨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LA의 햇빛보다
그녀 안에 켜진 결심이 더 밝았다.


경춘선 전철 안
퇴근길 집으로 향하는 연우는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국에 올 때까지
제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긴장에 묻힌 긴 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품은 채
같은 바람 속에서
같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세상은 아직 차갑고
두 사람의 시간은 불확실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거리 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2장 1화.


<거리 제로>


새벽이 저물고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 창문 너머로 부드럽게 쏟아지는 빛이 방 안의 공기를 깨우고 있었다. 방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적막했지만, 빛톨은 어제와는 다른 공기의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따라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속삭임은 마치 유리창을 통과해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는 듯 가까웠다. 그녀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키보드를 두드리자 노트북의 검은 대기 모드 화면이 깨어나며 화면이 서서히 밝아졌다.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려 있는 연우의 사진을 바라보며, 이제 곧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그녀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마우스 포인터는 항공사의 홈페이지 결제 버튼 위에서 맴돌았다. 손끝이 계속 떨려왔다. 지난밤 연우에게 "한국으로 간다"고 말했지만, 결제 버튼을 누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걸 누르는 순간, 모든 게 정말로 시작되는 거야...’ 지난밤부터 머릿속으로 수없이 반복한 결심이었지만, 손끝에서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스며들었다. 혹시 이번에도 어긋나는 인연은 아닐까, 다시 상처만 남게 될까 하는 불안이 손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노트북을 덮었다. 아침은 밝아왔지만,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직 끄지 않은 침대맡 스탠드의 조명빛은 햇살을 뚫고 빛톨의 얼굴에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준비가 된 걸까...’


빛톨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침대 위에서 내려와 방을 둘러봤다. 이 작은 방은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녀의 유일한 은신처였다.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면서, 이 방은 더 이상 그녀를 지켜주는 곳이 아니라, 그녀를 가두는 벽처럼 느껴졌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간밤에 허기만 달래던 누룽지 몇 조각과 아침의 쓴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나 화장대 앞에 섰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어쩐지 낯설었다. 한때 행복과 자신감으로 빛나던 눈빛은 공포에 질린 듯 바래 있었고, 깊은 피로가 볼 아래 그림자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술을 물고 중얼거렸다.


'한국에선...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겠지...
연우씨는, 적어도 연우씨는... 나를 필요로 할 거야.'


지난 밤 사이 빛톨은 연우에게 통화 후에도 몇 차례 메시지를 보냈다.


'피곤하지 않아?'
'보고 싶어. 사랑해.'


빛톨은 그 메시지들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연우에게 쓸 답장을 쓰려다 멈춘 횟수가 몇 번을 넘기고서야,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난 괜찮아. 준비 잘하고 있어.'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곧 갈게’라는 결심이 숨어 있었다.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이번엔 화장품 아마존 론칭을 위한 준비 서류들을 정리했다. LA의 작은 방 안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서울의 미팅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밝은 형광등, 차가운 유리컵 속에 맺힌 물방울, 그리고 서류를 펼친 채 긴장된 얼굴로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


그곳엔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한국에서 화장품 회사를 하며 브랜드를 키우고 있었고, 빛톨은 그 화장품의 북미 진출을 위해 밤마다 마케팅 플랜을 짜고 있었다.


간단히 정리한 문서, 현지 시장 조사자료, 트렌드 예측 보고서까지. 서류를 모니터 한쪽에 띄워놓고 기획안을 하나하나 수정할 때마다 화면 속 커서가 깜박이며 작게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그 생각 뒤에 남은 침묵은, 망설임과 기대가 한 데 얽혀 만들어내는 낯선 울림 같았다.


사업 이야기를 꺼낼 때면 빛톨의 목소리엔 생기가 돌았다. 누군가의 시선에 갇혀 숨조차 얕았던 시간과 달리,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려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아직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들게 해 주니까.


굳은 마음으로 내쉰 숨, 뛰는 듯한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또렷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엉킨 마음이 가슴을 두드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결심이 꺾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붙잡았다.

찰칵.
창문이 열리자 로스앤젤레스의 맑은 공기를 머금은 상쾌한 바람이 한순간에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바람결은 벽과 커튼을 스치며 긴 침묵을 흔들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새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환영하듯, 낮고 단호하게 그녀의 귀에 다가왔다.


이제, 방 안을 메우던 정적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은 바람과 섞여, 마치 이 도시에 다시 태어나려는 듯 커다란 울림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음성전화를 알리는 휴대폰 진동이 작게 울렸다. 연우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전화를 받았다.


“잠은 좀 잤어?”


“아니야. 지금이 딱 좋아. 이 시간만큼은 내 시간 같거든. 연우씨는? 거긴 지금 새벽 3시인데... 잠은 잤어?”


빛톨의 목소리는 자신보다 오히려 연우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연우는 LA와 서울 사이의 시차를 초월해 이어지는 이 대화가, 서로의 삶을 조금이나마 붙잡아주는 것 같은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항공편 예약은 했어?”


“아직...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아직 조금 떨려.

누르는 순간부터 우리가 만나는 그날, 그리고…

헤어져야 할 그날까지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 버릴 것 같아서…”


연우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가 연우와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조차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그의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새벽과 그녀가 있는 LA의 아침은, 지금 연우의 눈에 보이는 이제 막 떠오르는 희미한 달빛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내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그 말에 빛톨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전화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걱정하지 마. 준비 잘하고 있을게. 한국에 가면 강남역 근처에 있을 거야. 가인이 회사도 교대역 근처고. 그리고 우리가 자랐던 잠실도 바로 옆이니까. 거기서는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꼭 보여줄게. 자기랑 천천히 걸으면서, 그동안 못 본 것들을 다 볼 수 있도록.”


그녀는 순간적으로 상상했다. 좁은 골목길, 비 오는 날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간판, 그리고 낯설지만 익숙한 사람들과 공기.


‘다시 일어설 거야. 이번에는... 내 삶도 사랑도...'


그들의 전화는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빛톨은 침대 옆에 한국에 가져갈 선물과 꼼꼼히 준비한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긴 전화기 너머, 연우의 목소리는 서울의 새벽 공기를 머금고 있었고 서로의 말 사이에는 작은 숨결 같은 정적이 이따금씩 스며들어 있었다. 그 정적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연우씨는 내가 한국에 가면... 뭐부터 하고 싶어?”


빛톨은 그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설레었다.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일상에 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연우의 머뭇거리는 목소리는, 그녀의 인생에 다시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두근거림을 되살리고 있었다.


연우는 창밖으로 옅은 새벽빛이 번져오는 걸 느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음... 자기랑 새벽 시장에 가고 싶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그 시간에, 자기가 골라주는 옷도 사고 싶어.

그리고 아침에는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국밥집에 같이 들어가서, 따뜻한 국밥 한 숟갈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 그렇게 있으면... 자기와 함께 살아 있다는 걸 가장 잘 느낄 것 같아서.”


빛톨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 답은 누군가의 바람이 아니라, 오랜만에 자신을 향한 순수한 관심처럼 들렸다. 그 순간 마음속에 작은 불빛이 켜지는 듯했다. 그 불빛은 잔인한 불안을 조금씩 밀어냈다.


“너무 좋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 언니랑 새벽에 동대문 시장에 간 적 있었어. 새벽 공기,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 근데 나... 그 속에서 다시 섞일 수 있을까?”


빛톨의 목소리는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연우는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불안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거긴 변한 게 없어. 모두 다 그대로야. 자기는 그곳에서 다시 웃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는 내가 자기 옆에 있을 거니까.”


빛톨은 숨을 고르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떨어진 한국의 동대문 시장의 장면들이 오래된 기억처럼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연우와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적셨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화장품 사업 이야기로 이어졌다. 빛톨은 두 손으로 노트북 위에 펼쳐놓은 시장조사 보고서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 이번에 한국 가면 가인이하고 미팅을 잡아놨어. 자기도 같이 가줄 거지? 가인이에게 자기에 대한 이야기도 해놨어. 아마존에 론칭할 전략부터 준비해야 할 것들까지..."


"자기가 마케팅이랑 IT 전문가니까, 너무 든든해.”


그 말에 연우는 마음속으로 작은 다짐을 새겼다. 빛톨이 이토록 간절하게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자신에게 그 준비의 한 축을 맡기고 있다는 걸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었다.


“그래. 안 그래도 내가 프레젠테이션 준비 중이었어. 북미 지사 설립건, 아마존에 판매자로 등록하는 것, 수출 절차와 배송 프로세스, 라인업 할 제품들 마케팅과 가격 정책, 페이지 디자인까지... 반드시 성공시킬 거야.”


연우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자신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 자신감은 빛톨에게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내쉴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빛톨은 전화기 너머로 연우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믿음이 이 긴 기다림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얻기 위한 통화가 아니라, 서로를 지탱해 주는 숨결 같은 약속이 되고 있었다.


전화가 끊긴 후에도, 방 안엔 연우의 목소리가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빛톨은 노트북을 탁자에 놓고 앉았다.


모니터 속 항공사 예약 화면이 여전히 열려 있었고 마우스 포인터는 결제 버튼 위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떨림 속엔 조금 전 연우와 나눈 대화가 준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괜찮아. 이제는 정말로 시작할 수 있어.’


빛톨은 작은 소리로 숨을 내뱉고,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더 단단히 쥐었다. 커서가 다시 깜박이며 그녀를 재촉하는 듯 보였다.


‘연우씨가 기다리고 있어. 한국에 가면, 나를 위한 시간과 숨 쉴 공간이 있을 거야.’


손끝이 결제 버튼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이제...


클릭.


화면이 새로 고쳐지고 잠시 로딩 표시가 돌았다. 조용하던 방 안엔 노트북 쿨러가 미세한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다음 순간,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화면 중앙에 떠올랐다. 이메일 알림도 동시에 울렸다.


빛톨은 손을 떼지 못한 채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 어떤 순간보다 확실히 빛톨의 시간이 시작되는 울림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빛톨의 하루는 분주했다. 결제 후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새벽까지 뒤척이던 그녀는 연우에게 보내주었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행동으로 하나씩 옮길 차례였다.


그녀는 연우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낼 생각을 하면서도, 연우의 일상과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리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강남역 인근 에어비앤비 숙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하얀 시트가 잘 정돈된 방, 작은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한 때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회색빛 도심, 밤에는 따뜻한 간접 조명이 켜질 것 같은 거실. 그녀는 사진을 확대해 보며 ‘이곳이라면 연우도 마음에 들어 하겠지...이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연우씨가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에어비앤비에서 마음에 드는 숙소 몇 곳을 골라, 연우에게 사진과 위치를 전송했다.


‘어때? 이곳은 너무 좁을까?’
‘여기는 강남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야. 가인이네 회사랑도 가깝고...’


메시지를 쓰면서도 손끝에 설렘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울린 연우의 답장, “좋다. 여기가 괜찮네. 신혼집 같은데 나는 마음에 들어.”


그 한 줄에 밤새 얽혀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부엌으로 가서 물 한 컵을 마시고 돌아온 빛톨은 다시 미팅에 쓸 자료를 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은 오랜만에 매끄럽게 움직였다.


조카에게 줄 동화책과 과자, 친구에게 전할 영양제를 주문했다. 노트북을 끄자 검게 빛나는 모니터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전에 없이 행복으로 번져 있었음을 알아 보았다.


‘세상에서 작은 일 하나 하려 해도, 이렇게나 많이 내 이름이 필요하구나...
내 이름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잃은 채 살아왔을까.’


준비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 분주함 속에서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결제하고 예약하며, 아직도 자신이 그녀의 이름으로 세상에 속해 있다는 기쁨이 작은 숨결처럼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미용실과 피부관리숍 예약은 그녀의 아침을 바쁘게 열었다. 부시시한 머리카락, 피로가 스며든 피부... 그 모습으로 연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자신의 얼굴은 더 이상 무너진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하고 전화를 걸어 예약을 마쳤다.


전화를 마친 빛톨은 휴대폰 화면에 띄운 연우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진 속 연우는 웃고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영상으로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영상통화를 하자고 졸랐지만, 연우는 매번 영상통화를 부담스러워했다.


“전화로는 말을 하기 편한데, 얼굴 보면 내가 할 말을 잊을 것 같아서...”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빛톨은 핸드폰 속 연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은 웃음을 지었다.


연우의 목소리는 항상 차분했지만, 그 속엔 아직도 긴장감이 얇게 묻어 있었다.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를 확인하고, 밤새 통화를 이어가는 사이였지만, 연우에게 빛톨을 바라보며 하는 영상통화는 쉽지 않은 벽처럼 보였다.


빛톨은 이미 연우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연우의 MBTI는 쉽게 다가서거나 공감하기 힘든 INTP, 혈액형은 소심한 A형. 통화를 하면서도 감정으로 판단하거나 처리하지 않고, 항상 이유를 찾고,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려 하고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려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 상황에선 나라면 이런 선택을 했을 거야. 왜냐하면...”


연우는 무엇이든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한 후 마치 논문을 발표하듯 조심스레 말했다.


처음엔 그런 말투가 낯설었지만, 빛톨은 점점 그 신중함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찾고 있던 믿음직한 벽을 만난 것처럼.


‘아직 나에게 수줍어하는 거겠지...’
그녀는 연우의 사진 속 눈동자를 보며 자신을 마주 보는 듯한 기분에 작게,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매순간 그런 연우의 솔직한 긴장과 신중함이, 빛톨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기다려온 따뜻한 배려 같았다. 이제 그가 있는 한국으로 가면, 서로의 눈을 피할 필요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이 가슴 깊숙이, 작은 전율처럼 번져갔다.


빛톨은 시계를 보며 연우의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근무가 막 끝날 시간이겠다 싶어, 메시지 창을 열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금 전화해도 돼?'라고 문자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평소 연우는 전철 안에서는 통화하지 않았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혼자서 긴 침묵에 잠겨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연우는 퇴근길 전철 안이라고 했지만, 작게 통화하면 괜찮다며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빛톨은 연우에게 전화를 걸고 혼자 있는 방안에서도 조용히 숨을 고르듯 말을 꺼냈다.


“숙소는 결정했어. 내가 마지막에 보낸, 강남역 바로 뒤에 있는 숙소로 정했어... 그리고 항공편 시간이랑 숙소 주소는 자기 메일로 보냈어. 인천공항 도착은 3월 27일 오후 5시야.”


연우는 짧게 웃음을 섞어 대답했다.


“이제 정말... 우리가 만나는 거네.”


그 짧은 대화 속에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긴장과 설렘이 교차했다. 누가 먼저 사라질지 두려워하던 밤들은 이 목소리가 서로를 붙잡아주듯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의 숨결로 확인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빛톨은 부엌에 서서 따뜻한 물을 끓였다. 주전자가 작은 소리를 내며 김을 뿜어냈다. 그녀는 컵에 티를 우려내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연우씨가 도와준다고 해도 정말 잘할 수 있을까... 혹시 내가 뭔가 부족해 보이면 연우씨 마음이 식는 건 아닐까...’


생각은 점점 꼬리를 물고, 불안은 작은 그림자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부풀어 올랐다.


허브티 한 모금을 마셨다. 피어오르는 향기에 마음을 기댔지만,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한 연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


“아니... 오히려 즐거웠어. 이렇게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 오랜만이니까. 나, 자기랑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정말 좋아.”


그녀는 그 말이 끝나자 마음속에 따뜻함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마치 연우의 목소리 하나로 금방이라도 부풀던 불안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의 연우도 자기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돌아온 빛톨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로스앤젤레스의 밤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먼지 낀 창문에 부서져 번졌다. 가만히 숨을 고른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한국에 가면... 정말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을까...’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때로 속삭이듯 부드럽다가도, 금세 귀를 때리듯 거칠게 변했다. 밤마다 되뇌던 계획이 머릿속을 끝없이 맴돌았다. 한국 도착 후 무엇을 해야 할지, 연우를 처음 마주하는 그 순간의 그의 표정은 어떨지, 비즈니스 미팅에서 주주들에게 꺼낼 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든 것이 세세하게 각본처럼 그려졌지만, 단 한 가지,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만은 끝내 명확한 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긴장감은 작은 한기처럼 손끝을 지나 심장 아래 어딘가에서 고동으로 울렸다. 혹여 연우의 얼굴에서 미묘한 실망을 읽게 되면, 모든 준비가 무너지고 스스로를 한없이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게 될까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 거실 어딘가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장품 광고를 위해 만든 SNS에 공개된 번호로 하루에도 여러 번 낯선 남자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빛톨은 연우와의 통화 외에는 더 이상 휴대폰을 몸 가까이에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순간, 시곗바늘은 연우의 퇴근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호가 끊어질까봐 황급히 휴대폰 소리가 들리는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식탁 의자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불안한 생각에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 짧은 순간조차, 빛톨은 연우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두려움과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제 막 집에 도착했어. 문 열자마자... 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더라.”


그제야 빛톨은 조용히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전화를 붙잡고 있는 손끝까지 따뜻함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힘들었지? 식사는 했어? 맨날 누룽지만 먹지 말고”


“응... 입맛이 없어서 그렇지 뭐... 그래도 힘들진 않아. 지금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좋아.”


“그래도 뭘 좀 먹어야지. 그렇게만 먹다간 진짜 쓰러진다.”


연우의 다정한 꾸중은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는 따뜻함을 깨닫게 했다. 그 작은 목소리가 흔들리던 그녀의 마음에 작은 닻을 내려주고 있었다.


빛톨은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연우를 비추던 달빛을 떠올리게 하는 은은한 달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LA의 방 안을 희미하게 적시고 있었다.


“기억나? 예전에 내가 자살하려고 해변에 차를 세워두고 며칠 동안 거기 있었던 이야기.”


“응... 그 얘기 듣고 정말 많이 놀랐었어. 하지만 그때 자기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줬잖아.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아”


“그때...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필요 없는 사람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자기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걸, 그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 알 것 같아.”


연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빛톨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단단하고 새로운 결의가 마음 깊이 와닿았다.


“기다린다기보다는...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돼 있어. 늦었지만, 결국 가장 필요한 순간에 서로를 찾은 거라고 생각해.”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연우씨랑 영원히 우주를 떠다니고 싶어.”


짧지만 단호한 고백이었다.


연우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 빛톨이 겪어온 고단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어떤 말이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지 그리고 무슨 말을 가장 하고 싶은 말인지를 마음속으로 천천히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꼭 자기와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만 자기가 원한다면... 어디 있든, 그곳이 어디든 함께 있고 싶어.”


그 짧은 대답에, 빛톨은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 심장 아래 어딘가에서 조용히 파동 치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 이제 정말 가는 거야.”


통화 속에서 연우도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우리... 같은 시간을 살 수 있겠네.”


“응. 이제는 연우씨가 있는 곳으로 내가 가는 거야.”


빛톨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이 방 안에서 몇 번을 울고, 몇 번을 포기하려 했는지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마음속에서 단단히 울리는 한 문장이 있었다.


‘이제 내 인생을... 다시 내 손으로 쥘 거야.’


그날 밤, 두 사람의 목소리는 밤하늘을 가로질러 이어졌다. 비록 지구의 정반대, 서로 다른 대륙에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만큼은 같은 밤, 같은 별빛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알았다. 이 만남은 도망이나 회피가 아니라, 서로를 지키기 위한, 서로를 다시 살아내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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