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리 제로
새벽부터 아침까지, 그 시간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빛톨은 밤을 꼬박 새우며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LA의 어둠은 서서히 물러가고, 창밖엔 여린 새벽빛이 실처럼 흘러들어 방 안을 적셨다. 잠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밤이었지만, 눈꺼풀은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부터 연우의 목소리가 닿는 그 시간이었기에...
창밖이 조금씩 밝아올수록, 마음은 점점 연우에게로 기울었다.
‘연우씨는 지금쯤이면 퇴근했을까? 샤워는 했을까? 혹시 지금...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기다림의 끝에는 어김없이 연우의 숨결 같은 빛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회색빛 서울의 밤공기는 여전히 묵직했고, 빛톨의 입국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독할 만큼 느릿하게 흘러갔다. 정지된 듯한 골목 위로 퍼지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은,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연우는 그 불안한 불빛 사이로 그녀의 그림자를 느끼는 듯, 휴대폰을 손에 움켜쥐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머릿속엔 어느새, 그녀의 아침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쯤, 발소리를 죽인 채 부엌 한켠에 홀로 선 그녀가 조심스레 커피를 내리고 있을까.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창밖엔 가로수의 실루엣이 잠든 듯 머물고, 머지않아 떠오를 빛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겠지.
연우는 언젠가 그 아침 풍경 어딘가에 자신도 함께 있기를 바라며, 불안으로 일렁이던 마음을 조심스레 가라앉힌다.
'지금쯤, 빛톨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나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연우는 생각에 잠긴 채, 그녀가 무사히 아침을 맞이하기를. 그 하루가, 온전히 자신에게 건너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연우의 밤이 깊어갈수록, 빛톨의 아침은 밝아왔다.
그들의 시간은 언제나 어긋났지만, 그 어긋남이야 말로 둘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깊은 연결이었다.
서울과 LA, 16시간의 시차.
연우는 빛톨의 오늘을 살고 있었고, 빛톨은 연우의 어제를 견디고 있었다. 연우와 빛톨은 서로 다른 하루를 지나면서도, 하나의 사랑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휴대폰 알림이 울릴 때마다, 연우는 어제를 품은 그녀로부터 오늘의 숨결을 받고, 빛톨은 아직 오지 않은 하루를 연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맞이한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이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조여오던 마음이 풀려난 서로의 숨결에 하루를 맡겼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진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수천 마일의 거리를 그리움으로 엮어 붙이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빛톨의 창은 어느새 아침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긴 밤을 견디고 마주한 아침은 늘 짧고 아쉬웠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잠을 권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연우는 글을 보내고 빛톨은 음악을 보낸다. 그러다 더 이상 응답이 없으면 그제야 연우가 잠든 것임을 알고 빛톨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어쩌면 그 평온한 침묵이야말로, 가장 다정한 대답 같았다. 그 평온함 속에서, 빛톨도 침대로 지친 몸을 눕힌다.
낮과 밤이 어긋나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매일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마치 서로가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듯이.
빛톨과 연우는 그렇게 시간의 경계에 선 채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좀처럼 흐르지 않는 날짜를 세고 또 세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빛톨의 전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빛톨의 한국행 소식을 알아차리고 난 뒤부터였다. 그는 별것 아닌 일에도 시비를 걸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간섭했다. 법적으로는 이미 남남이었지만, 그는 언성을 높이며 빛톨의 짐을 대놓고 풀어 살펴보거나, 독립을 준비하며 사둔 가구들을 허락도 없이 처분하는 등 점점 노골적인 집착을 드러냈다. 그 집은 더 이상 그녀의 피난처가 아니었다. 매일이 한층 더 숨 막히는 감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자, 빛톨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잠시 후, 현관문이 ‘쿵’ 하고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녀의 심장도 얼어붙었다.
그날따라 전 남편은, 자신이 아끼던 물건이 사라졌다며 거실에 쌓인 빛톨의 짐을 거칠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문 너머로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거센 파도처럼 방 안을 덮쳐왔다. 이윽고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여행 가방과 서류들을 마구 뒤엎으며 고함을 질렀다. 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그는 마치 그녀가 다시 체포되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엔, 빛톨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도 곧바로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만약 그녀가 다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면, 그토록 애타게 준비해 온 한국행은 단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방 안의 공기는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잠시 뒤, 시간차를 두고 각각 도착한 경찰들이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재를 위해 말을 주고받는 경찰 뒤편으로 전 남편의 시선은 여전히 매서웠고, 그 눈빛만으로도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빛톨은 경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손끝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침착한 대응 덕분에 그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자, 더 이상 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빛톨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어 증거를 챙겼고, 가쁜 숨을 고른 뒤 곧장 법원으로 향했다.
법원 접수창구 앞, 그녀는 한참을 서 있다가 학생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접근금지 신청서 작성법을 물었다. 목소리는 작게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로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사건 경위서와 경찰 신고 기록을 증거로 함께 제출했다.
법원을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차가운 공기와 뒤섞여 빛톨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얼음처럼 딱딱한 두려움이 숨죽인 채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접근금지 명령조차 어기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어떡하지, 경찰도 곧바로 도와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뿌리처럼 얽혀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정말 괜찮을까... 이번엔, 정말로 안전할까...'
머릿속에 스치는 의문들은 그녀를 끝없이 붙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작은 희망의 빛도 묻어나고 있었다. 앞으로의 보름 동안만이라도 전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깊게 파인 상처 위에 얆게바른 연고처럼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래, 이제 며칠 안 남았어. 그리고 연우씨가 있는 그곳으로 가는 거야...’
빛톨은 숨을 고르며 손가락을 꽉 쥐었다. 두려움이 더 몰려오기 전에 그녀는 그렇게 침묵 속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다행히 법원은 신속히 움직였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 전 남편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집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빛톨은 그날 있었던 일을 곧장 연우에게 알렸다. 접근금지 신청서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고, 전 남편이 한참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지난밤의 일을 담담히 전했다. 오히려 그녀가 불안해하는 연우를 먼저 다독였다. 그 말을 들은 연우는 잠시 깊은숨을 내쉰 뒤,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긴 밤을 지나 서로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두 사람은 한국에서 진행될 비즈니스 미팅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존에 화장품을 론칭하기 위한 전략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며 문제점을 짚고 대안을 나누었다. 그 대화 속에서, 빛톨은 자신의 삶이 손에 잡힐 듯한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현실을 함께 살아낼 준비가 하나씩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쌓아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삶을 위해, 빛톨은 몰두했고 집중했다. 얼굴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시장 규모와 소비 흐름, 투자 제안 범위를 문서로 정리해 주주 설득 방안을 준비했고, 새롭게 발굴한 피부관리 디바이스의 한국 수출 가능성도 연우와 심도 깊게 분석했다. 아마존 론칭을 위한 미국내 법인 설립과 판매자 등록 절차를 꼼꼼히 챙기며, 둘은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냈다.
연우는 사업 기획서 맨 앞에 빛톨의 이름을 크게 새겨 넣었다. 마치 세상에서 잊혔던 그녀의 이름을 다시 세우듯,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그녀의 존재를 선명히 되찾아 주고 싶었다.
“이 사업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이야. 자신 있지?"
"다행히 자기가 한국에 있는 동안 내 시간을 온전히 비울 수 있어. 회사에 휴직계를 냈거든. 캠프 합류는 아직 확정도 안 됐고, 중요하지 않은 자리라면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한 달 동안은 매일 같이 있을 거야. 비즈니스 미팅, 꼭 성사시키자. 자기를 하루라도 그곳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아.”
빛톨에게 한 그 말은 다짐 같기도 했고,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설득이기도 했다. 빛톨은 그 목소리 안에서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두려움 대신 기대감이 빛톨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무너진 마음 위에 다시 '내일'을 그려보았다.
빛톨은 매일 착실하게 모든 일정을 소화해 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필요한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하고, 비즈니스 미팅에 사용할 자료들을 검토하고, 본사와의 연락도 빼놓지 않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바쁜 날들이었다. 그녀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만큼은 잠시 머릿속을 비울 수 있었기에, 스스로를 그렇게 일에 집중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우에게서 걱정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사진 보냈어. 너무 놀라진 마. 어차피 한국 오면 알게 될 거라 미리 알려주는 거야.”
"나 사실, 얼마 전에 머리를 좀 다쳤어"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사진 속 연우는 머리에 두툼한 거즈를 대고 있었다. 얼굴도 평소 보내주는 사진보다 훨씬 수척하고 창백해 보였다.
“괜찮아. 생각보다 큰 상처는 아니야.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그래서 알려주는 거야”
하지만 연우의 담담한 말과 달리, 진실은 훨씬 무거웠다. 정수리 부근이 10센티미터 넘게 찢어진 데다, 두개골에 강한 충격을 받아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받았고, 혹시 모를 뇌출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MRI까지 찍은 상황이었다. 연우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농담처럼 말했다.
“덕분에 회사에 휴직계 냈어. 이제 낮에도 통화를 마음 편히 할 수 있어.
큰일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지만 빛톨은 생각은 달랐다. 휴대폰 화면 속 연우의 상처 부위를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혹시 머리에 후유증이 남지는 않을까,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불안은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졌다.
“혹시 어지럽거나 구토 같은 증상은 없어?”
“이상 있으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해. 어머니는 알고 계셔?”
“엄마한텐 산에서 미끄러졌다고만 했어.
머리 다친 건 몰라. 알면 걱정하시고, 그게 더 스트레스니까.
나 진짜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새벽에도 그녀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오면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응답이 늦어지면 꺼진 화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을 달래야 했다. '혹시 연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빛톨의 불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짙어졌다.
침대 위에서 자세를 몇 번이나 바꿔봐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사고 당시 연우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머리가 멍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혹시나 그가 잠들며 쉬고 있을까 봐, 그녀의 손가락은 끝내 화면을 누르지 못했다.
그렇게 설렘과 걱정이 끝없이 교차하는 긴 밤이 또 한 번 그녀를 할퀴고 지나갔다.
한편 연우는 어둠 속에서 불을 끄고, 이어폰으로 빛톨이 보내준 음악을 들었다. 가사가 끝나고 이어지는 긴 정적 속에서 쉽게 잠들지 못한 채, 꼼꼼하게 다시 한번 사업 안을 검토했다. 작은 오탈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 속엔, 다가오는 시간과 빛톨의 모든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LA의 밤바람이 무심히 창틈으로 들어와 머리칼을 스쳤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여행용 가방 위엔 달빛이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것 같았다. 비행 편 확인, 예약 바우처 출력해서 따로 챙겼다. 여권 옆에 접어둔 기획서까지. 빛톨은 마지막으로 가방의 지퍼를 닫고 방 한가운데 놓인 캐리어를 바라봤다. 이제 정말 떠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하며 눈을 감았을 때, 휴대폰 알림음이 조용하던 공기를 가로질렀다.
"짐이 많을 텐데... 여기서 공항까지 택시비가 얼만데 택시를 타고 가려고 그래.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 휴대폰도 미리 꺼서 트렁크 안에 넣어두고 준비하고 있어."
전 남편이었다.
문장에는 전혀 위협적인 기색이 없었지만, 그 지나치게 평온한 말투가 오히려 낯설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투처럼.
빛톨은 잠시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 갑자기?'
갑작스레 친절을 가장하며 공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하필, 휴대폰을 꺼서 트렁크 안에 넣으라는 것일까?
그녀는 바로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침묵하던 연우는 숨을 삼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안 돼. 택시 타. 그리고 비행기 타기 전까지 휴대폰은 손에 꼭 쥐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냥 불길해. 무슨 일 생기면 신고할 수 있도록 잊지 말고 휴대폰은 꼭 들고 있어야 해.”
빛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미 마음은 정해졌다는 듯, 전 남편에게 단 한 줄로 답을 보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택시 타고 갈 거야.”
빛톨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가도 문득 일어나 캐리어를 다시 열어보았고, 가방 손잡이, 여권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뒤 가방을 닫았다. 단단히 닫힌 가방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밤, 로스앤젤레스의 별빛이 아스팔트 위에 흩어졌다. 한국까지의 비행시간은 12시간.
내일이면, 드디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연우를 마주하게 된다.
잠들기 전, 빛톨은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디어 내일... 출발해.
자긴 공항에 나오지 말고 숙소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이어진 통화.
숨소리만 오갔지만, 그 숨결만으로도 두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 있는 듯했다.
“조심히 와. 기다리고 있을게.
오늘은 우리 둘 다 조금이라도 자자. 내일... 드디어 만나니까.”
연우의 전화는 짧았지만 단호했고 따뜻했다. 장시간 비행에 조금이라도 그녀의 휴식을 위한 짧은 통화였지만, 빛톨은 연우와의 통화가 끝나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밝기 전, 그녀는 택시를 불렀다. 거리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았고, 로스앤젤레스의 주택가 새벽은 기묘할 만큼 적막했다.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전 남편의 문자. 생각하기도 끔찍했지만 어쩌면 그의 마지막 시도는, 그녀의 목소리를 지우고,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으려는 것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라, 은밀한 삭제였다
새벽을 가로지르는 택시가 공항을 향해 빠르게 달렸고, 그녀의 시간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창밖에 빛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택시를 타고 연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손에 꼭 쥔 휴대폰의 미세한 진동이 그녀의 심장과 박자를 맞추듯 울리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녀는 숨 쉬듯 혼잣말을 했다.
“이젠, 내가 나를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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