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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1장 2화)

1장, 돌아보지 마

by 구정훈


1장 2화.

<빛톨, 기다림 끝에 도착한 이름>



그녀를 만나기 전, 나는 몇 번의 실패와 인간관계의 상실감으로 괴로워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결국,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로 이어졌다.


그 이별은 잔인한 침묵의 이별이었다. 마치 누군가 꽉 채웠던 마음을 모두 가지고 방을 빠져나간 것 같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없었고, 끝났다는 말도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상대의 다정함이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픔보다 익숙해질 무렵, 나는 비로소 그것이 ‘끝’이었다는 걸 받아들였다.


어디에도 쏟아낼 수 없는 감정들만 남았다. 친구에게 털어놓기엔 내가 너무 한심해 보였고, 지인에게 말하자니 ‘그럴 줄 알았다’라는 반응이 싫었다. 어찌 버텨보려 했으나, 급격한 체중감소와 부정맥, 호흡곤란이 오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치료도 받아 보았지만 결국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의 병이었다.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괜찮은 방법 같아서 말을 줄였고, SNS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특정한 이름도, 구체적인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그저 내 안의 고통을 한 겹씩 걷어내듯 페이스북에 조금씩 이별과 사랑, 그리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갔다.


하나씩 쌓여가는 글은 무너진 마음에 씻어 내리는 빗소리 같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들었고, 누군가는 듣지 못했다. 그 글 아래에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렀고, 누군가는 '슬픔'을 표시했다. 대부분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아주 낯선 이름 하나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처음엔 아무 말 없이 음악 한 곡이었다. 다음 날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또 한 곡. “이 음악, 오늘 같은 날엔 어울리더라고요.” 하지만, 나는 그 메시지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것 자체에 지쳐 있었고, 누군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조차 무례하게 느껴질 만큼 내 마음은 닫혀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매일같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떤 날은 피아노 솔로곡 하나, 어떤 날은 기타 연주에 짧은 메모를 덧붙였다. “오늘 하루도 좋은 글 고마워요.”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아무 말도 괜찮아요. 그냥 듣기만 해도 돼요.”


나는 계속해서 응답하지 않았다. 글을 올리기 시작하며 이따금씩 나와 같은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되고 위로가 되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으며 위안을 주고받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메시지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나와 같은 상처도 없어 보이고, 공감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계속 위로의 음악과 문자만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런 문자가 부담스러워서 그녀가 곧 지치기를,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녀는 묵묵히 나의 무응답을 통과해 매일을 건넸다.


그 지속되는 다정함이 어느 순간 내 마음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왜 이 사람의 위로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걸까. 다정함조차 언제부턴가 나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는데, 그녀의 말은 이상할 만큼 둥글게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짧은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그것이 우리가 나눈 첫 대화였다.


그 뒤로 우리는 조금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미국 LA였다. 시차가 달랐고, 공간도 엇갈렸지만 그녀는 늘 내가 깨어 있는 시간에 맞춰 말을 걸었다. 그것조차 배려처럼 느껴졌고, 나는 조금씩 경계가 허물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다시 겁이 났다. 어쩌면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다시 사랑하고, 다시 다치고, 다시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두려움은 차라리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는 쪽이 더 낫겠다는 확신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녀의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서였다. 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었고, 그렇게 몇 주를 흘려보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휴대폰에서 계속 메시지 음이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확인하니 그녀에게 오는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아직 침대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을 듣지 않으려 휴대폰을 꺼버렸다. 출근하면서 킨 휴대폰에는 스무 통이 넘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괜찮은 거야?”, “자고 있겠지만, 그냥... 걱정돼서.” “어떤 말도 필요 없으니까, 이 음악만 들어줘.”


나는 그 메시지에 끝내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을 했는데, 내가 응답을 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 무언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밀어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건 모순이었고, 동시에 절박함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말없이 보냈다. 그 사이, 그녀의 말을 줄어들었다. 어느 날은 짧은 음악 한 곡만을 남길 때도 있었다. “그냥 듣기만 해 줘요.” 그 말이 왠지 마지막 인사 같아 괜히 가슴이 쿡 내려앉았다.

'괜찮은 걸까. 내가 너무 쌀쌀맞게 대했나... 그녀의 마음이 다친 것은 아닐까.'

미안해하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사이 내 마음엔 또 다른 외로움이 조금씩 차올랐다.


며칠 후, 그녀에게 마지막이라는 듯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꿈에 당신이 나왔어. 이건 아마 내가 진짜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 한 번만, 마지막으로 연락해보고 싶었어.”


나는 그날 밤,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런 침묵을 깨려는 듯 그녀는 익숙한 사람과 통화하는 듯 내내 자기 얘기만 했다. 꿈 이야기. 그리고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 어린 시절 이야기, 이민자로서 겪었던 경험들. 나는 듣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고, 그 안에서 나는 어쩌면 나와 닮은 구석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었다.


공통점도 많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그녀와 나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웃사촌이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에도 우리는 같은 지역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자기 이야기만 하던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췄다가, 조금은 쑥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도, 그게 내가 아니라 내 과거의 그림자가 대신 말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그냥... 음악만 보냈어. 그게 내가 당신을 덜 신경 쓰게 하며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같았어.”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고, 그리고 내가 그 상처를 오해할까 봐 더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나 역시, 그녀가 내 마음을 쉽게 읽지 않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으니, 그 마음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과, 동시에 나를 향한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 말에 나는 오래 묵혀두었던 어떤 안쓰러움을 느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덜 아프게 하기 위해, 조심스레 다가서던 시간을 기억했다.


그녀가 솔직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그녀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부담이었다. 내 안의 폐허는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고, 그 빈터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게 미안하고 두려웠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술자리에서 만취한 사람과 다투다가 맥주병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서 봉합을 받았고, 뇌에 영향이 있을까 안정을 취했다. 얼굴도 엉망에 회사에 나갈 수 없어 몇 주 동안 병원과 집만 오가며 회복을 이어갔다. 걱정하는 주변과 어머니에게는 '산에 올라갔다가 뒹굴었다'라고 둘러댔다. 그 사실을, 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알렸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내 곁을 비우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하루 몇 번이나 내 상태를 확인했고, 조금이라도 안 좋은 낌새를 느끼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새벽엔 수면 음악을 보내주었으며, 때로는 “그냥 오늘도 건강해서 고마워”라고 짧은 안부를 남겼다. 아무도 연락할 수 없던 그 시간 동안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내온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두운 방에 누군가 작은 전구 하나를 켜는 것 같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어디로든 향할 수 있게 해주는 빛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아무 조건도 붙지 않은 다정함만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줬고, 나 역시 그녀 앞에서는 아픈 상태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편안함에 아무 말 없이 통화를 하다 몇 번이고 잠에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게 너무 좋은 사람이다. 너무 따뜻하고 조심스럽고... 그래서 오히려 겁이 난다. 나는 늘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지켜주고 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소중해서, 이대로 그녀를 외면하면 시작하지도 않은 관계지만 이 소중함 조차도 오래갈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말해야 했다.


"사실 당신은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야.
그런데... 나, 욕심내고 싶어. 당신이랑... 사귀고 싶어. 이 말을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그녀는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떨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기다리고 있었어."


그건 끝에서 시작된 사랑의 시작이었다. 서로의 고통을 감지하고, 무너지는 마음 위에 음악을 얹고, 그 마음을 조심스럽게 덮어준 관계.


우리는 서로에게 말보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다정함은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었다. 나는 꿈에서 나를 데리고 나타난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다정함을 지켜보고 있다 믿었고, 그 따뜻한 바람이 내게까지 닿은 것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아직 모든 것이 조심스럽지만, 이제는 조금씩, 그녀의 빛을 믿어보고 싶다고... 아직은 서로에게 서툴고, 먼 거리만큼이나 조심스럽지만, 언젠가 이 마음이 닿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웃을 수 있기를...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빛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 대신 ‘빛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쓰던 그 글들처럼,

아직 알지는 못했어도,

언젠가 도착할 것으로 믿고 있었던 빛이 나에게 도착을 했다.


그 빛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와,

가장 어두운 시간 속에 잠겨 있던 나를

천천히 밝혀주고 있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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