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돌아보지 마
2003년, 빛톨은 한국을 떠났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서로를 몰랐다. 그녀는 강남역 부근의 어학원에서, 나는 역삼역 부근의 회사에서 그 비슷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녀와 불과 몇 백 미터 거리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우리는 어쩌면 같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같은 지하철 칸에 몸을 실었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모르는 채 같은 도시의 밤공기와 빛나는 간판들처럼 서로를 지나치고 있었겠지. 그저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그녀와 인연을 맺기로 결심한 뒤부터, 나는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던 그날의 공항을 상상하곤 한다. 유리벽 너머로 부드럽게 번지던 아침 햇살, 기대로 속을 가득 채운 캐리어들, 한없이 이어진 긴 사람들의 줄. ‘그녀는 출국장으로 걸어 들어가며 울었을까, 아니면 끝내 눈물을 삼켰을까.’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 전 서울에 있을 때, 강남역 근처의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그 시간들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에게서 무언가 아득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고 느꼈지만, 나는 그 여운을 정확히 읽어내진 못했다.
그녀는 자연을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일종의 회피처럼 느껴졌다. 복잡하고 정감 없이 돌아가는 도시가 불편한 사람들은, 종종 말 없는 고요한 풍경에 마음을 자주 기대곤 하니까. 그녀가 나무와 아이들과 비를 유독 좋아한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빛톨은 175센티미터의 늘씬한 큰 키와 서구적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영어강사와 모델활동을 병행하며 밝은 성격으로 활발한 시기를 보냈지만, 막상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시절 그녀는 오히려 세상에서 자신을 격리를 하는 쪽에 더 가까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현재 그녀의 가족은 모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지금은 서로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꺼낼 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조용하고 침울해서, 무거운 종소리처럼 내 마음에 쓸쓸한 잔향처럼 남았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성격이 상당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눈에 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한 발 물러서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성격처럼 보였다. 목소리는 늘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두꺼운 막으로 자신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화통화를 하며 이따금씩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젖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시절 바보 같은 날들을 보냈다는 말도 항상 빠트리지 않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대학교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빛톨에게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대화 틈틈이 묻어 나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고, 감정의 끝이 날카로운 분이었다고...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할 때면, 꼭 어딘가 약간 흥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끝이 빨라지곤 했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때 집에서 자살하셨어.”
“엄마 때문이었어. 그날 아버지는 학교에서 교수들끼리 문제가 있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했거든. 그런데 엄마는 성격이 예민했고, 늘 아버지와 싸웠어.”
“그날도 엄마의 잔소리만 아니었어도, 아빠는 그렇게 자살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녀의 말투에서 흔들리는 듯한 아슬아슬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빠는 가끔 나를 안고 집 앞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며 웃어주곤 했어. 그때가 내가 느낀 유일한 평화였어. 아빠랑 자기랑 많이 닮았어. 자기처럼 똑똑하고 글도 잘 쓰고... 아빠가 자기를 보면 많이 좋아하셨을 텐데..."
그 말 이후, 그녀는 그 이후로는 아버지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와 벤치에 앉아 본 하늘의 파란색이, 그녀에겐 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짐작만 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자살이 그녀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나는 그녀의 남겨진 감정들 사이로, 천천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그 이후로 가족들과 멀어졌다고 했다. “오빠랑 언니랑도 연락이 점점 줄었고… 엄마랑은, 그냥, 싸우는 게 지쳤던 것 같아.”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이따금씩 나에 대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물어보며 우리의 인연이 어디서부터 이어져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가 괴로운 기억을 꺼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했다. 그래서 더 집중해 들었다. 그녀는 이후에도 몇 번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설명하기보다, 기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꺼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세이를 마무리하면 그녀를 세상에 남겨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어두운 기억조차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 믿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미국 유학시절은, 아직 이야기를 많이 듣지 못해서 자세하게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했던 말.
“한국은 좀 답답했어. 그냥 아빠도 그랬고 나도 미국으로 가고 싶었어. 자유가 있었고, 자연이 너무 아름답거든. 그래서 기회만 되면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는 기회를 찾아, 누군가는 사랑을 찾아 떠나는 땅. 그러나 그녀는 그저, 숨을 쉬기 위해 그 먼 나라를 택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공항 전광판에 반짝이는 미국행 비행 편.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 나는 그 장면을 자주 상상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굴레에서 탈출하려 한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그녀의 유학시절인 샌프란시스코에 대한 이야기였다. “진짜, 다르긴 다르더라. 누구 하나 나한테 말을 시키지 않는데, 혼자인 게 그냥... 평범한 일처럼 느껴졌어.”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로 느껴졌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한국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틈틈이 패션 전시관련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수업을 듣고 여행을 다니며 그곳에서 마흔 살까지만 살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고 말했다.
빛톨은 나에게 말했다. “여기선 숨이 트여. 아무도 나한테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이렇게 편할 줄 몰랐어. 한국에 있을 땐, 늘 누가 내 하루를 감시하는 것 같았거든. 사람들은 나를 귀찮게 했어. 집 앞에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이 찾아와 기다리기며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그녀가 샌프란시스코의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에서도 활기가 느껴졌다. 특히 그곳의 자연과 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녀의 말 한마디마다 스스로를 되찾은 사람처럼 빛이 났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남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남자는 어렸을 때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녀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자신에게 조심스러우면서도 배려심이 깊어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가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입양되어 열심히 사는 사람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안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정중한 태도, 인자하게 보이는 그 남자의 양부모와 식사 자리, 전통적인 유대인 집안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그녀에게 “이제는 나도 괜찮아도 되겠다”는 안도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빛톨은 그 남자와 결혼했다. 연애는 길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남편을 따라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겼고, 그렇게.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그녀는 패션 관련 일을 다시 시작했고, 이제는 자기 삶의 루트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옷들을 디자인해 아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패션쇼를 열고 싶었다고 했다. 여유가 생기면 그림을 배우고, 주말마다 전시회를 열며 사람들을 도우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꿈도 꿨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삶은 끝내 그녀의 것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롭게 가족이 된 사람들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흐려졌다. 그녀에게 결혼은 그저 그녀가 미국에서 홀로 이방인으로 남게 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일 뿐이었다.
#9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098182
#연재소설 #웹소설 #브런치소설 #감성소설 #추천소설
#힐링소설 #감성글귀 #사랑소설 #이별소설 #9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