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벚꽃, 흩날리다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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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야, 우리 며느리. 잘 챙겨야 해.”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부드럽고 명랑했다. 그날의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는 무언가를 걱정하는 듯 들렸다.
통화는 평소처럼 십 분 남짓이었다. 빛톨은 입국한 날부터 연우 어머니와 하루도 빠짐없이 짧은 통화를 이어왔었다.
안부와 날씨, 연우의 어릴 때 이야기, 새로 옮겨 심은 화분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빛톨을 딸처럼 좋아하는 어머니와의 대화는 오히려 위안이 되는 듯, 어떤 때는 어머니와 딸 사이처럼 장시간동안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날 그 통화는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다. 끊을 때 즈음에나 어머니가 연우를 바꿔달라고 했고, 전화를 받은 연우에게 당부했다.
“아들, 우리 며느리가 마음이 여려. 너무 착해. 네가 잘 챙겨야 해.”
연우는 웃으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날 이후 빛톨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정확히 무엇이 그 속에서 건드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분명히 느낌이 달랐다.
통화를 마친 직후, 그녀는 물었다.
“자기... 소송... 그거 선고가 언제야?”
연우는 그제야 짐작했다. 아마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꺼냈겠지.
연우는 '소송 중이다'라는 말 외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그녀의 마음까지 무겁게 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연우는 자신의 안에서 억누르고 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숨이 끊어질 듯 이어졌던 고통의 시간들이 그 밤의 정적을 따라 흘렀다.
그것은 연우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의 피의자로서의 선고가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그가 싸우고 있는 건 어떤 인물 한 사람이 아니라, 연우의 존재와 목소리를 지워버리려는 세상과의 싸움이었다.
연우는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고발하며 유죄를 통과해 진실에 이르려는 길을 택했다.
“참으려고 했지. 몇 달 동안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어.”
연우는 손을 떨며 답답한듯 가방에서 액상 담배를 꺼내 피우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어디에 취업을 해도, 내가 어디에 속해도 그들은 그곳에 전화를 하거나 사람을 통해서 나를 내보내라고 했어. 있지도 않은 말과 위험하고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소문과 함께.”
“정치판이라는 게 늘 그렇잖아. 권력을 쥔 자들의 눈밖에 나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지옥까지 따라와서 기어이 망가지는 꼴을 봐야 만족하는 악마들 같아.”
연우는 그 날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다 참다가, 결국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자수했어. 몇 개월 동안 정말 지치기도 했고. 정말 그만하라고 아무리 참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멈추질 않더라고.”
고개를 숙인 채 연우는 말끝을 삼켰다. 오래된 상처가 다시 덧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 의도한 건 아니었어. 어쩌다 보니... 내가 범죄자가 돼 있더라고.”
쓸쓸하게 웃는 듯한 얼굴. 그러나 그 눈빛에는 웃음이 없었다.
“나는 거의 일 년을 일했는데, 뒤늦게 합류한 그들은 내 자리를 빼앗고, 나를 스스로 나가도록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 내가 몰염치한 사기꾼이고, 자신들은 정상이라는 명분까지 가져가려 했지.”
빛톨은 연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연우는 빛톨의 손을 물리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창 밖으로 담배연기를 뿜으며 답답한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영혼까지 파괴하더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연락을 끊었어. 편들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몇 명만이 내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지.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걱정은 해주었지만 그들 역시 침묵할 수 밖에 없었지. 그게 권력이고 그게 정치판이야.”
"그래서 어차피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수하기로 마음을 먹었어. 나는 어떤 처벌도 두렵지 않아. 더 이상 잃어 버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삭제한 정보들을 하나씩 복구하기 시작했어. 대부분은 삭제되고 일부만 복구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명백한 증거들이었으니까."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조용히 흔들리고, 연우의 어깨도 조금씩 굽어졌다.
“나는 내가 그들과 인연을 정리하면 다 끝났을 줄 알았어. 하지만 더러워서 내가 포기하는 순간, 그들은 더 나를 짖밟더라고. 동네에도 나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돌았지. 내가 사라지면 사건도 사라질 거라는 불안 때문인지,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들, 사람들의 그림자들까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연우는 눈을 감았다.
“외출도 힘들었지. 그래서 결국... 다시 이사까지 한 거야.”
연우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침묵으로 채워졌다. 빛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연우의 고백은 그녀의 마음속으로, 밤의 적막 속으로 차오르는 분노와 좌절로 깊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배신자라 불러. 그런데 나는... 정말, 그 사람들을 믿었거든. 누구보다 오래, 누구보다 깊이 함께했던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내가 입을 다물지 않자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지. 나 하나, 바보를 만들기 위해서...
진실을 알고 있던 막내조차, 바리바리 챙겨주는 척 하며 결국 입을 닫았어. 사람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에는 친한 척 했지만 결국 다 한통속이더라. 정치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나를 아프게 하지. 오래전부터 서로를 묶고 있던 이익의 사슬, 말하지 않는 자들만 살아남는 침묵의 카르텔.
내 삶은 철저히 무너졌고, 배신당한 건 나였는데도 그 세계에서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자를 배신자로 만들어. 나는 그들이 만든 질서를 흔든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도관, 기회와 승인, 생존의 흐름이 오가는 그 폐쇄된 통로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되었지.
그 세계에선, 목소리를 내는 순간 존재가 말소돼.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도, 그 안에서 진실은 늘 사적인 감정, 개인의 분풀이쯤으로만 받아들여져. 그게 그들의 방식이고, 그게 권력이 진실을 다루는 방식이야.”
연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빛톨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은 입술 앞에서 흩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두 손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아니, 떨고 있는 건 손만이 아니었다. 가슴 아래 어디쯤, 오래도록 눌려 있던 불안이 서서히 갈라지며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몸을 세우고 앉아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혼미해졌다.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연우의 고통이,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탓이었다. 그녀는 그 고통을 거절할 수도, 껴안을 수도 없었다.
“진실은 분명히 밝혀질 거야. 이 진실을 덮으려면 너무도 많은 거짓말들이 필요할 테니. 이것을 덮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나는 어느 곳에서도 설 자리를 잃게 될 거야. 그래도 나는 반드시 진실을 밝히고 싶어. 이젠 멈출 수 있다고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연우의 그 말은 두려움의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굳은 결심처럼 들렸다.
“헤어진 그 사람도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못 견뎌했어. 그들의 세상에서 쫓겨나고 바닥까지 추락한 개인이 권력과 싸우는 일이 쉽지는 않지. 사실... 나도 자살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렸었지만,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연우의 눈가에 잠시 눈물이 맺혔다 지워졌다.
"이제는 살아 보려고. 내가 가장 힘들 때 자기가 내 옆에 와주었었지. 모든 걸 다 잊고 그냥 자기와 조용하게 살고 싶어."
빛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싸주기만 하는 연우가 얼마나 깊이 고립되는지를 실감했다.
사람들은 ‘대의’라는 말로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는 장면을,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소비했다. 진실은 권력 뒤에 사라지고, 정의는 관계 속에 무너졌다. 그 안에서 연우는 쫓겨난 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 비난의 돌을 맞으며 그 어두운 회랑을 지나, 스스로 그 세상을 떠난 자였는지도 모른다.
연우는 그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속하지 않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 선택은 패배가 아니라, 한 인간이 남겨둔 마지막 존엄의 흔적이었다.
“도대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빛톨의 목소리는 연우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연우에게 천천히 걸어가, 창가에 선 연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연우의 껴안은 팔은 바닥으로 축 처진 채 떨어졌고, 그 사이로 그녀의 흐느낌이 연우에게 번져갔다.
연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멀리 어두워지는 도시의 윤곽선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빛톨은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자기하고 나하고,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반복했다. 말로는 위로해줄 수 없는 진심이, 눈물과 체온 사이에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 밤의 끝에, 세상으로부터 쫓겨난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닿고 있었다.
그날은 연우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 베이커리에서 사둔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간단히 넘기고, 두 사람은 각자 준비에 들어갔다.
빛톨은 며칠 전 옷가게에서 산 흰 리넨 치마를 꺼내 입고 거울 앞을 몇 번이나 오갔다. 입술을 다물고, 자세를 고쳐 세우며, 시선을 몇 차례 끌어올렸다. 무언가를 정돈하는 듯했지만, 연우는 그녀가 어머니와의 만남을 앞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우가 치마의 속이 다 비친다고 말하자 빛톨은 속치마를 따로 준비하지 못했다며 얇은 원피스를 속에 껴 입고 다시 흰색 치마를 입었다. 거울을 보며 허리를 만지고, 가슴이 답답한지 너무 조이는데 라는 말과 함께 옷매무새를 잡았다. 그리고 숙소를 나서기 전에는 연우의 얼굴에 선크림을 직접 발라주며 연우를 꼼꼼하게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숙소 앞에는 예약한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의 가죽 시트는 몸에 닿자마자 눅눅한 느낌부터 밀려들었다.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한 지 삼 분쯤 지났을까. 빛톨이 갑자기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속 옷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나... 속이 너무 갑갑해.”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속옷이 잘 안 벗겨지는지 빛톨은 겉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연우는 놀랄 새도 없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앞을 가렸다. 택시 기사는 아무 말 없이 라디오 볼륨을 살짝 높였고,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앞창을 올려주었다.
빛톨은 속옷을 벗어 손에 꼭 쥔 채,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미안... 숨이 안 쉬어졌어. 갑자기 너무... 꽉 조여와서.”
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다. 택시 안은 더운물 속 같았고...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진짜 미안해... 그냥, 가슴이 막 조여 오는 것 같았어.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연우는 택시 기사에서 에어컨을 더 세게 틀어달라고 요청한 뒤,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차가웠던 그녀의 체온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왔어?”
연우의 어머니는 테라스에서 흙을 털고 있던 손을 털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 뒤편엔 분홍색과 노란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은 테라스의 꽃들을 감쌌고, 화분들 사이로 햇살이 꽃잎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느라 힘들었지?”
“아니에요. 어머니 여기... 너무 좋아요.”
빛톨은 어머니 곁에 다가가 한참 동안 테라스에 서 있었다. 연우는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몇 장 찍으며 자세를 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고,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포즈를 취했다. 그 장면은 연우의 마음속에서 정지화면처럼 흐르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장면이 되었다. 방금 찍은 휴대폰 속 사진을 바라보며 연우는 시골에서 같이 농사를 지으며 함께 나이 먹어가도 좋은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흙냄새와 햇살, 잎사귀와 바람, 그리고 연우 어머니의 다정한 대회 사이에서 빛톨도 긴장을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준비하는 식탁 위엔 더덕구이, 잡채, 떡들로 가득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 연우가 어머니의 더덕구이와 잡채를 사진으로 보내준 적이 있었고, 그녀는 “꼭 먹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잊지 않고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식사 후, 빛톨은 설거지를 하겠다며 손을 걷었다. 물소리가 부엌에서 흐르자, 연우는 어머니 연우 곁에 앉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니 색시, 키도 크고 이쁘네. 그리고 착하다. 마음에 들어.”
설거지를 마친 빛톨은 손수 챙겨 온 화장품과 스킨케어 기기를 꺼냈다.
“오늘은 어머니 피부 제가 젊게 만들어드릴게요.”
빛톨은 어머니를 소파에 앉히고, 이마와 볼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가져온 화장품을 정성껏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은 정성스러웠고, 움직임은 뭔가 오래전부터 준비된 사람처럼 숙련되어 있었다.
화장품을 다 바르자 피부관리 기기를 꺼내 얼굴 마사지를 시작하며 눈을 감고 있는 연우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연우씨는 어릴 때 어땠어요?”
"말도 마. 병원에 데리고 가면 주사 안 맞겠다고 엉덩이에 힘을 주는데, 주사 바늘이 안 들어갈 정도였어. 그리고 울기 시작하는데, 병원이 난리가 났었어"
"연우씨 미국에 보내고 많이 보고 싶으셨겠어요."
"그랬지. 내가 연우 뒷바라지 하느라고... 안 해본 일이 없었어"
연우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그런 이야기까지 해...”
하지만 둘은 연우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거실 안엔 꽃 냄새와 마사지 크림의 향기가 섞여 있었고, 봄날 오후의 햇살은 소파 너머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미국 가기 전에 좋은 거 많이 먹고 여행도 좀 다녀.”
연우의 어머니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작별 인사를 하는 빛톨의 손에 오만 원권 몇 장을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연우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연우야 우리 며느리, 잘 챙겨야 해.”
연우의 집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동안, 빛톨은 매일같이 스마트폰과 씨름했다. 며칠 전부터 빛톨의 카드가 결제되지 않아서 스마트폰 인증으로 무엇인가를 끙끙 앓으며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매장에서 결제를 하려고 했지만 '도난 카드로 신고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 중이었다. 그녀는 문득 전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것도 그 사람이...”
의심은 되었지만, 한국에 와 있는 상황에서 확인하거나 따지기엔 빛톨의 정신이 턱없이 고갈되어 있었다.
빛톨은 휴대폰을 들어 수십 번이고 앱을 확인했다.
다음날 미국의 카드사와의 통화는 끝이 없었고, 화면엔 ‘보안 재인증’, ‘페이스 확인 실패’, ‘암호 초기화 필요’ 같은 말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술 용어들에 그녀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
“나, 이런 거 못 해. 자기가 좀 도와줘.”
그녀의 말은 작고 쪼그라든 사람의 목소리였다.
도움받고 싶은 마음과, 도움받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뒤섞인 목소리.
며칠 뒤, 화장품 대금을 현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미국에서 홍보를 위해 사용했던 화장품은 빛톨이 자신의 자금으로 구입해서 돌렸던 것이었다. 그 자금을 한국에서 현금으로 결제해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연우와 함께 현금지급이 가능한 은행 ATM기 여러 곳을 함께 돌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괜찮아. 그냥 내가 내면 되잖아. 그래서 미국에 있는 한국은행에 계좌를 만들고 거기로 돈은 옮긴 다음에 사용하는 게 편한데...”
빛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거 생각을 못했어. 그리고 이건 내 일이고. 그리고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나 스스로 뭘 못 하고 있다는 게, 너무...”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쥔 휴대폰을 꼭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그렇게 빛톨의 흐느낌이 시작됐다.
밤이 되자,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휴대폰은 꺼놓았고, 눈을 감은 얼굴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다시 당겨 올렸다. 잠을 자는 것도, 숨는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을 덮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며 연우는, 빛톨이 얼마나 오랫동안 누군가의 허락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살아왔는지를 다시 깨달았다.
그녀는 이제 처음으로, 스스로를 살아가려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불을 껐다. 그 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침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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