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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3장 6화)

3장. 벚꽃, 흩날리다

by 구정훈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많관부!!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098182



3장
벚꽃, 흩날리다


6화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



빛톨은 요즘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잠이 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릿속이 뿌옇고 무거웠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면 어느새 한나절이 사라져 있었다.


“자기, 나 요즘 좀 이상해. 계속 잠만 오고...”


빛톨은 며칠째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행이나 외출 계획도 흐지부지되곤 했다. 잠을 자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 오후에 일어나서 짧은 외출도 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단순한 피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났는데도, 침대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자 그녀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빛톨이 열심히 AI와 대화를 하더니 대화한 결과를 연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찾아봤는데... 비타민 부족일 수도 있대. 비타민을 아침저녁으로 두 알씩 챙길 거야.”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알약을 꺼내어, 물과 함께 삼켰다. 하지만 그 뒤로도, 잠은 전혀 줄지 않았다. 휴대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도, 전화벨이 울려도, 그녀는 긴 시간 동안 반응하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알람을 미루는 날들이 이어졌고, 아침과 저녁이 뒤엉킨 채 하루는 마치 한 시간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잠에서 깨 눈을 떠도 빚톨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미안해... 나 조금만 더 자고 나갈게. 딱, 삼십 분만...”


빛톨은 고개를 베개 깊숙이 파묻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삼십 분은 한 시간이 되었고, 한 시간은 어느새 오후 전체를 삼켜버렸다. 눈을 뜨면, 창밖에는 벌써 노을빛이 어둑하게 번지고 있었다. 하루는 그렇게, 야속하게 줄어드는 속도를 점점 높여가고 있었다.


빛톨이 잠에 빠져 있을 때, 연우는 그녀 곁에서 조심스럽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방 안에는 규칙적인 타건 소리와 빛톨의 고른 숨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연우는 소파와 탁자를 침대 가까이로 옮겼다.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글을 쓰는 동안에도 빛톨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서였다.


늦은 오후, 빛톨이 침대에 누운 채 연우를 불렀다.


“자기야... 나, 요즘 잠이 문제야. 눈을 감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나는 지금... 이 시간을 붙잡고 싶은데, 자꾸 놓쳐버려. 너무 속상해. 그리고... 자기에게 미안해. 나 때문에 계속 집에만 있어서 심심하지? 미안해.”


빛톨은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연우는 잠시 노트북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하나도 안 심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기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아. 자기랑 어딜 가도 좋지만,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제일 행복해. 정말이야.”


연우의 그 말은 어떤 설명도 덧붙일 수 없는 진심이었다. 그는 책을 쓰며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다시 잠든 그녀에게 다가가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시간을 보냈다. 연우에게는,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가 온전히 행복으로 채워지는 순간들이었다. 그건 사랑이었다.


빛톨은 잠에서 깨 화장대 앞으로 갔다. 거울 속 얼굴은 부어 있었고, 눈가는 마치 어젯밤 울음을 참고 넘긴 사람처럼 붉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마치 낯선 사람을 만나듯 눈을 피했다.


“미안해... 한국 오기 전엔 두 시간만 자도 멀쩡했는데, 여긴 왜 이렇게 피곤한지... 자기랑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돼... 미안해.”


빛톨은 거울 속, 부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탓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연우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늘은 가까운 곳으로 나가볼까?”


빚톨은 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말했다.


“성수동 카페골목 갈래? 자기도 가보고 싶어 했잖아. 오늘은 멀리 말고, 가까운 데부터 천천히 산책하면서 사진도 찍고, 카페에서 좀 쉬었다 올까?”


“응 그래 좋아. 그럼 나 먼저 씻을게!”


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빛톨의 가느다란 콧노래는 물소리 너머로 따라 불려졌고, 그 멜로디는 연우의 가슴 안으로 내려앉았다. 지금 그녀가 부르고 있는 노래는 Billie Eilish의 'Birds of a Feather'였다.


"I want you to stay... Even when the world starts to cave... I want you to stay... Even when we're ghosts..."


연우는 들려오는 빛톨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래, 나는 자기를 그곳에 홀로 남겨두지 않을 거야. 우리들의 마지막 장면엔 내가 꼭 함께할게. 그리고... 세상이 멈추는 그 끝에서 자기가 혼자 서 있지 않도록, 나도 곧 따라갈게'


연우는 빚톨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햇살이 좀 더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일 오후의 성수동 카페 골목은 예상보다 한산했다. 젊은 연인들,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 반려견을 안고 걷는 사람들 사이로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연우는 틈만 나면 빛톨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담았다. 마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붙들어 두려는 사람처럼 모든 순간을 붙잡고 싶어 했다. 빛톨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연우가 휴대폰을 들면 포즈를 취하거나 팔을 끌어당겨 함께 찍자고 말했다.


“자기야, 우리 저기 들어가자.”


빛톨이 손등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숨이 약간 가빠 있었지만 미소는 여전했다.


“여기, 정말 좋다. 잊지 못할 것 같아. 우리, 내년에도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연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그렇게 될 거야.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어.”


2층 창가 자리. 빛톨은 점심은 먹기 싫다며 대신 푸짐한 딸기 빙수를 골랐다. 강한 햇살이 두 사람을 지치게 해서인지 그녀는 주문을 기다리며 자리에 앉자마자 작은 부채를 꺼내 자신과 연우의 뺨에 번진 열기를 식혀주었다. 에어컨 바람보다도 더 시원하고 다정한 손짓이었다.


빙수가 나왔지만, 빛톨은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입맛이 없어?"


그러자 빚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렸다.


"아~"


연우는 빙수 한 숟가락을 떠 그녀의 입에 넣었다. 딸기와 얼음이 녹는 소리보다 그 순간의 웃음이 더 달콤하게 흐르는 순간이었다.






어둑해진 저녁에야 두 사람은 숙소로 돌아왔다.

빛톨이 먼저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며 말했다.


"자기도 얼른 씻고 와 내가 좋은 거 해줄게"


연우는 노트북을 덮고,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뭐 해줄 건데? 피곤하다며.”


연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빛톨은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연우를 침대로 이끌었다.


"눈 감고 누워 있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빛톨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눈가를 지나 턱선으로 흘러갔다. 그 순간, 연우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손길 끝에는 입맞춤이나 조용한 포옹 같은 무언가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잠시 후, 이마에 닿은 건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마사지 크림의 차가운 감촉이었다. 그의 심장은 미묘하게 당황했고, 그러다 이내 체념하듯 현실을 받아들였다.


"오늘 햇빛이 강해서 자기 얼굴이 많이 탔어. 오늘은 자기 얼굴 관리 해줄게"


얼굴에 마사지 크림을 다 바르자 빛톨은 LED 기기를 꺼내 들었다. 빛톨이 한국에 오기 전 피부관리를 받다가 효과가 좋아서 아예 피부관리기를 구입해서 들고 온 것이다. LA나 보스턴의 부촌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LED 마사지 기기였다. 효과가 좋아 한국 론칭을 고려하며 테스트 차 들고 온 것이었다.


푸른빛이 기기의 빛과 함께 그녀의 숨결이 연우의 얼굴 위를 스쳐갔다. 빛톨은 연우의 얼굴을 마사지를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 돌아가면 해야 할 일 많지. 자기가 말한 대로 창고 딸린 집을 얻어서 거기서 시작해야겠어. 나 혼자서는 못해냈을 거야. 그런데 자기가 있어서 덜 무서워."


연우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기랑 있으면, 내가 괜찮은데. 근데 돌아가면...”


연우는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기기는 멈췄고, 연우와 빛톨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잘 안되면 바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빛톨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끝내 입을 닫았다. 그 말을 다 해버리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결국 그녀는 고이기 시작하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피부 관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TV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틀어져 있었지만, 빛톨은 TV를 보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일주일 남짓. 잠에 들면 또 오후에야 깨어날 테고, 그러면 또 하루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이 아쉬워 잠드는 것조차 두려웠다. 빛톨은 천천히 몸을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날 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을 붙잡고 있는

어쩌면 가장 긴

잠들기 전의 영원이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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