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벚꽃, 흩날리다
#9 장편소설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의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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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이제 고작 일주일이 남아 있었다.
그날 아침, 연우는 빛톨을 깨우지 않으려 커튼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 창문 너머로 강남역의 소란스러운 아침이 보였다.
빛톨은 침대 위에 누워 눈 위로 수건을 덮고 있었다. 덮고 있는 이불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가늘고 고르게 이어졌다.
연우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 곁에 앉아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나 먼 곳을 향해 있었다. LA로 돌아가 혼자 잠들어 있는 그녀의 시간이 자꾸만 연우의 가슴속에 떠올랐다.
연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순간, 빛톨의 손이 힘없이 연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수건 때문에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맞잡은 손으로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시간은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기 직전 멈춘 사진처럼 느껴졌다. 그 잠시의 영원과 같은 시간 속에서 그녀의 손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 같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수건 가장자리로 투명하고 아주 작은 물빛이 흘러나왔다. 연우는 조심스레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빛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천천히 그녀의 눈물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연우는 그녀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빛톨은 몸을 틀어 연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마치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짓 같았다.
연우는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이 아침이 계속됐으면..."
연우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도 허리에 감긴 손을 풀어, 연우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연우는 빛톨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굳어진 연인의 동상처럼 멈춰 있었다.
언젠가 이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날 아침,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이별을 시작하고 있었다.
빛톨의 출국까지는 이제 엿새가 남았다.
그날, 두 사람은 양재 시민의 숲을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 잎이 가지를 놓으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이 자꾸만 두 사람을 닮은 것 같았다.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도시의 소음은 작은 새소리로 바뀌었다. 둘은 마치 세상에서 잊힌 둘만 존재하는 듯한 공원에서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연우였지만 빛톨이 렌즈를 들 때면 입모양으로 "사랑해"를 말했다. 빛톨은 연우 곁에 기대며 함께 있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포즈를 취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둘은 그곳을 벗어나기 아쉬운지 공원을 한 바퀴를 더 돌았다. 빛톨은 단 한순간도 연우의 팔을 놓지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그늘진 벤치 하나를 발견했고, 그녀는 연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앉아 연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숲을 바라봤다.
“아직 벚꽃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자기랑 한번 더 볼 수 있어서”
“벚꽃이 필 때마다 여기 오자. 마당 있는 집을 구하면 벚꽃나무를 심고, 그 아래 식탁 놓고 매일 이렇게 함께 있지.”
빛톨은 고개를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엔 어딘가 기대가 아닌 쓸쓸함이 어려 있는 듯 느껴졌다. 그것은 며칠 후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둔 이의 희망과 현실 사이에 놓인 사람의 눈동자였다.
이제 정말 닷새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이었다. 빛톨은 하루 종일 침대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연우는 곁에 앉아 책을 펼쳤지만, 한 줄도 읽지 못했다.
결국 그는 책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온 후 써 내려간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가 웃었던 날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릴까 봐.
그녀가 아파한 날들을 글로 남겨놓지 않으면, 그녀만 기억하고, 그녀만 아파하게 될까 봐.
연우는 다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빛톨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거의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무엇을 잘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연우가 자기 때문에 식사를 못 할까 봐 힘들게 일어나서 저녁을 함께 하거나, 베이커리에서 사놓은 빵과 음료수로 허기만 달랠 뿐이었다. 연우 역시 입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 무렵, 빛톨은 침대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자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잊지 못할 것 같아. 자기 그 눈빛만 보면...
돌아가서도... 거기에 혼자 있어도... 그러니까... 자긴, 내 마지막 남자가 되어줘.”
그녀는 숨을 고르듯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연우의 마음속에 어떤 확신을 줄 수 있는 말이기에 충분했다. 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럴게. 누구도 자기를 대신할 수 없어. 지금은... 자기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 다시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빛톨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아 있는 연우에게 다가와 무릎을 베고 누웠다.
“자기 글 읽어줘. 자기 목소리 들으며 잠들고 싶어.”
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이 써 내려간 글을 읽어주었다. 빛톨은 연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떠나고 나면... 우리의 이야기를 끝내지 말아 줘. 그 안에서라도... 나, 계속 살아 있을 수 있게.”
잠시 후 그녀의 나지막한 잠에 빠진듯한 낮은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연우를 잡은 손은 놓지도, 그녀가 잠든 것을 알면서도 읽고 있는 글을 멈추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나흘 후에는 서로를 가까이서 볼 수도, 그리고 서로의 체온을 더 이상 느낄 수도 없다.
그날은 아침부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이른 더위를 쫓아내는 소나기처럼 하루 종일 살갗에 닿으면 시원해 보이는, 어린 시절 소나기의 추억이 떠오르는 그런 날씨였다.
연우는 창가에 서서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벚꽃과 함께 나를 찾아온 그녀는, 벚꽃이 지면 이 비를 타고 돌아가야 하겠지.'
그날 빛톨은 미팅 직전에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여느 때와 다른 짧은 준비를 마치고 숙소 바로 앞 카페로 들어갔다.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가인이 숙소 앞 카페에 도착하기 전까지, 연우와 빛톨은 카페 창가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가인이 오기 전까지 따뜻한 머그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가인과의 마지막 미팅이었다. 오랜 지인사이인 그녀들은 비즈니스 이야기보다는 떨어지기가 아쉬운지 가인의 가족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헤어지기 직전에야 북미 화장품 론칭과 새롭게 출시되는 신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미팅이 끝나고 가인은 딸이 학교에서 올 시간이 되었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를 걱정하는 가인과 빛톨의 아쉬움이 묻어나는 긴 포옹이 이어졌고, 가인은 연우에게 우리 언니 잘 부탁한다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가인이 떠난 후에도 두 사람은 카페에 남아 오래도록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LA에서 비 올 때, 자기한테 영상 보냈던 거 기억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그날 자기가 옆에 있는 것 같았어. 나는 자기가 상상 속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빗소리가 자기가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지. 오늘처럼..."
빛톨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 배고프지? 나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우리 지난번에 갔던 곳 가자. 오늘 다시 가보고 싶어"
그녀가 제안한 곳은 지난번 우연히 들린 숙소 인근의 홍콩식 주점이었다. 처음 그곳을 방문한 날, 빛톨은 그곳이 마음에 든다며, 다음에 한국에 다시 오면 꼭 들려보자고 말한 바로 그 주점이었다.
연우는 우산을 들었고, 빛톨은 그의 팔을 꼭 끌어안고 이동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젖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건 마치,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느껴졌다.
식당 안은 익숙한 조명과 약간 눅눅한 바닥, 그리고 오래된 식초 냄새로 가득했다.
연우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다. 음식점에 들어오자마자 빛톨이 자신이 선택을 하려는지 메뉴판을 보며 연우가 좋아할 것 같은 음식들을 골랐다. 연우가 좋아하는 해산물 찜과 볶음요리 하나. 그리고 맥주 두 잔.
컵에 물을 따르고, 수저와 젓가락을 꺼내 연우 앞에 가지런하게 놓았다. 오늘은 자신이 사겠다며 직접 선결제를 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연우를 세심하게 챙겼다.
“오늘은 자기한테 더 이쁘게 보이고 싶은가 봐.”
빛톨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통유리로 된 출입문 밖으론 빗소리가 점점 깊어졌고, 우산을 쓴 사람들은 마치 흐릿한 기억처럼 창 너머를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았다. 맥주잔과 음식은 반 이상이나 남겨졌다.
그들은 알았다. 잔을 비우고, 그릇을 치우는 순간 이 자리도 끝나버릴 거라는 걸....
식사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빛톨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사진 찍자. 여기서 우리 둘이서.”
파란 우산 아래, 그녀가 연우 앞에 섰다.
“그날 LA에서 비가 올 때... 나는 그 비가 자긴 줄 알았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날 것 같았어. 그래서 자기가 기다리고 있는 밖으로 나가서 영상을 찍었지."
그녀는 연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어갔다.
“비가... 그치면... 나, 가야겠지.”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예고된 작별이었다. 연우는 힘없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의 다짐이었다.
빛톨은 연우 쪽으로 더 바싹 붙었다.
“이 비가... 조금만 더 오래 내렸으면 좋겠어.”
연우는 대답 대신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날 밤,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그녀도, 연우도, 비가 그칠까 봐 밤새 잠들지 못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