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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3장 8화)

3장. 벚꽃, 흩날리다

by 구정훈
북커버_당신아직거기에있나요.png



#9 장편소설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의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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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벚꽃, 흩날리다


8화. 시간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시간을 남기는 소녀


출국까지 단 삼일. 그녀는 시간을 감싸서 연우에게 건넸다.


캐리어의 지퍼가 천천히 열렸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열 듯, 가방 안의 옷가지 너머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미 반쯤 차오른 캐리어 안에는 지난 한 달 그녀가 머물렀던 흔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함께 고르고 읽었던 책 몇 권, 세탁되어 곱게 접힌 옷가지들, 그리고 그녀의 향기를 품은 화장품들...


“요즘 기억이 자꾸 멀어져.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나 봐.”


빛톨은 쓸쓸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자기랑 보낸 시간들이 벌써 십 년은 흐른 것 같아. 나중에 정말 기억이 흐려져도, 이 순간만큼은 그대로 남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향수를 꺼냈다. 연우와의 외출마다 그녀를 감싸던 향기. 향기에 민감한 연우에게 그것은 단지 향기가 아니라. 그녀가 이곳에 머물던 시간의 흔적이었다.


빛톨이 손목에 향수를 뿌리며 말했다.


“나... 자기가 전에 쓴 그 향수 글 봤어. 자기는 향기로 시간을 기억한다고... 그렇게 썼잖아.
그러니까 이거,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해. 알겠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연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덧붙였다.


“자기야... 자긴 나 잊어버리면 안 돼. 정말로.”


연우는 그녀가 건네주는 향수병을 받아 들었다. 손안에 담긴 그것은 작고 가벼웠지만, 가슴 어딘가를 깊이 짓눌러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녀의 익숙한 향이 진하게 풍겨왔고, 무엇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빛톨은 옷장에 걸려있던 녹색 머플러를 꺼냈다. 그것은 외출할 때마다 빛톨이 연우의 목에 늘 둘러주던 것이었다.


노란색 머플러는 케리어로 접어 넣었다.


“자기, 이거 가져. 이건 이렇게 목에 두르면 돼.”


그녀의 손길은 연우의 목을 따라 사랑을 감아 두르듯 섬세했다. 머플러의 부드러운 천이 살갗에 닿는 순간, 연우는 숨을 멈췄다. 그 머플러가 목을 감싸는 따스함 하나로 서로의 온기를 느끼게 해 주었던 그들만의 증표였다. 이제 그 증표마저 서로에게 멀어지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녀가 LA에 머물던 시절, 연우에게 보내온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도 가장 눈에 남았던 건 언제나 노란 옷을 입은 그녀였다. 햇살 아래 선 그녀는, 마치 그 색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노란빛처럼 느껴졌다.


연우는 언제나 노란색을 보면 그녀가 떠올랐고, 그 노란빛을 따라 걸어왔다. 이제 녹색은 남고, 노란색은 떠난다. 두 색은 더 이상 함께 계절을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여전히 서로를 묶는, 끊어낼 수 없는 끈처럼 서로에게 남겨지고 있었다.


머플러를 둘러주는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빛톨도 그 머플러를 오랫동안 천천히 매만지며, 사랑이 한 겹, 한 겹 접혀 있던 그 시간의 징표를 연우의 목 언저리에 매듭지었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빛톨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말끝을 맴돌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자기 등 안고 잠들던 그 시간이 제일 좋았어. 그 모습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옷... 벗어봐 줄래? 상체만 찍을게.”


연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늘 등을 안고 잠드는 것을 원했고, 연우는 한 달 내내 그녀에게 등을 내어주었다.


"그래... 알았어"


연우가 천천히 상의를 벗고 등을 돌렸다. 빛톨은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잔근육이 선명한 그의 어깨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몇 번의 셔터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잘라냈다. 그리고 그 셔터음 사이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 자기와 함께 한 시간을 기억으로 남겨줘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연우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자신의 옷을 벗고 다가가 연우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녀의 향기


빛톨의 출국까지는 이제 이틀. 연우와 그녀는 석촌호수를 다시 찾았다.


햇살은 이미 봄을 지나 여름으로 기울고 있었고, 벚꽃 축제가 끝난 호숫가는 일상처럼 한적했다. 멀리 아이들이 불어대는 비눗방울이 바람을 타고 수면 위를 가볍게 미끄러졌고,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흩날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비에 젖은 벚나무에는 이제 연둣빛 잎만 남아 있었다. 벚꽃 잎은 오래된 추억이었던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연우의 코끝에는 여전히 그날의 향기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벚꽃의 향기가 아니라, 그들의 시간에 머물다 간 기억의 잔향이었다. 함께 걷던 계절의 흔적, 오래된 기억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의 입자들이 공기 속에 엷게 흩어져 있었다.


“그땐 꽃이 참 많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네.”


빛톨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묻어났다. 연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지금은 이렇게 자기가 있잖아. 꽃이 없으니까 자기 향기만 느껴지는데?”


그의 말에 빛톨이 짧게 미소 지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미소였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았다. 빛톨은 두 손으로 연우의 팔을 잡아끌며 팔짱을 끼고 어깨를 기댔다.


연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한 달 전 처음 식사를 하며 찍었던 사진도, 서점과 카페에서의 풍경도, 모두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든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눌렀던 셔터들. 그 모든 ‘기억의 시선’이 이제 화면 속에 멈춘 채 머물고 있었고, 연우는 그날의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자기야. 우리 사진 같이 찍자.”


빛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말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거나, 팔짱을 끼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자기하고 나하고... 저기 보이는 아파트에 살 때 말이야.”


빛톨이 연우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서 자기하고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

지금 이 순간들... 우리에게 추억이 될까?”


연우는 한참을 호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될 거야.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될 거야. 우리가 한국에서 살게 되면, 저 아파트에서 살자.”


그날의 햇살과 바람, 서로의 눈빛이 그렇게 기억에 각인되었다.


벚꽃이 진 계절에도 사랑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꿈을 꾸지 않는 밤


결국,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침대 위, 연우는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고, 빛톨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골랐다. 방 안은 숨조차 머뭇거리는 정적 속에 잠겨 있었고, 창문 너머 서울의 불빛만이 그녀의 기억에 남길 바라는 듯, 그들의 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빛톨이 말했다.


“내일이면... 이 방엔 아무도 없겠지.”


연우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그 말에는 ‘나’도, ‘너’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없다’는 것만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아무도 없는 시간, 그리고 아무도 없는 기억.


연우는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어깨를 돌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빛톨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이미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의 손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연우의 눈빛을 바라봤다.


"지금 자기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처음이야.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은..."


빛톨은 무언가 마음먹은 듯 말을 이어갔다.


“혹시 나... 자기한테 짐이었을까? 미안해. 혼자 있으려는 자기였는데... 내가 밤마다 자기가 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그 질문은 오랫동안 참았다가 한 말 같았다. 연우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것은 '아니'라는 뜻이었고, '그런 말 하지 마'라는 뜻이었고, 무엇보다 '그냥 있어 줘서 고마워'라는 뜻이었다.


“아니. 자기가 나를 찾아내고, 나를 바라봐주고,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빛이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빛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분명히 있었어. 자기를 알기 전부터... 그래서 그 희망을 글로 썼었는데, 그게 자기였어. 기도는 어쩌면 내가 먼저 했는지 몰라”


빛톨이 연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물었다.


“나... 잠시라도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줬을까?”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의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난 여기 와서, 처음으로 편히 잤어. 처음으로... 누군가 옆에 있는 게 무섭지 않았어.”


그녀의 연우의 품을 더 파고들며 말했다. 그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백이었는지 연우는 알고 있었다. 함께 잠든다는 것, 그건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시작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두려움의 끝이기도 하니까.


“자기야, 내일 아침엔... 그냥 일어나지 마. 나 혼자 가고 싶어.”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야.”


“그러지 마. 그럼 나 너무 힘들어져.”


“그래도, 데려다줄 거야. 내가 말했지? 마지막까지 자기와 함께 있을 거라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둘 다 내일 아침의 일들을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보내야 했고, 한 사람은 남아야 했다. 그것이 이 사랑의 구조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들지도 못했다.


그들은 마주 보고 누워, 서로의 숨결을 들으며 시간을 건넜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시간을 건너가는 소리였다.


그건 함께 견뎌낸 ‘하루’의 목소리와 같았고, 서울에서의 꿈같았던 한 달이 서로의 기억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서로의 체온, 그리고 절대 지워지지 않을, 두 사람의 마지막 밤이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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