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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4장 1화)

4장.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by 구정훈
북커버_당신아직거기에있나요.png


#9 장편소설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의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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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1화. 일몰 앞에서



공항에서 빛톨을 배웅한 연우는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엔 이제 연우의 캐리어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커튼으로 스며든 환한 햇살도, 이제는 텅 비어버린 방의 적막을 거둘 수 없었다.


연우는 침대에 누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얼굴을 베개 깊숙이 파묻고 눈을 감았다. 피로와 무력감에 휩싸여,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만 싶었다.


오후 늦게서야 연우는 눈을 떴다. 붉게 물든 저녁 햇살이 침대 끝에 내려앉아 있었다. 연우는 아쉬운 듯 방안의 모습을 천천히 오래도록 둘러본 뒤 숙소를 나와 캐리어를 끌며 남양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항공 추적 앱을 켜고 그녀의 비행기가 지금 어디를 나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리고 짧게 문자를 보냈다.


'도착하면 문자 해줘.'


전철 창밖을 스치는 도시의 빛들이 어쩐지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가 곁에 없다는 현실이 마음 한구석에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라는 작은 위안만이 홀로 남겨진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씻을 기운도 없이 소파에 기대 잠들었다. 자정 무렵, 빛톨에게서 문자가 왔다.


'도착했어.'


딱 한 줄,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로 짧은 문자였지만, 그제야 연우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응... 고생했어. 짐이 많을 텐데 오늘은 답장은 안 해도 괜찮아. 조심히 집에 들어가.’


연우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 역시 홀로 남겨진 허전함과 아쉬움이 클 테니, 그 감정을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 연우의 휴대폰에 그녀의 문자가 도착했다.


'집에 잘 도착했어. 자기야 걱정하지 마. 잘 해낼 자신 있어. 한국은 지금 12시 넘었겠네. 자기 피곤하겠다. 얼른 자. 벌써부터 보고 싶어. 사랑해.'


다음 날 아침, 연우는 천마산을 올랐다. 빛톨과 함께 약속했던 일... 서로 몸을 잘 챙기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침부터 밀려오는 텅 빈 허전함을 견디기에는, 뭔가를 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었다.


산 중턱에서 그는 천마산의 풍경과 메시지를 영상에 담아 LA의 빛톨에게 전송했다.


“오늘은 아침 일찍 등산을 시작했어. 여기는 천마산 중턱쯤인데,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꽤 힘드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체력이 더 회복되면 다음 주엔 정상까지 가볼게. 자기 없는 아침은 아직 조금 어색해. 오늘부터 책 편집도 시작하려고 해. 건강이 중요하니까 운동도 계속할 거야. 사랑해. 우린 곧 다시 만날 거야.”


산을 다 내려올 즈음, 빛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 끝엔 피로가 묻어났다.


"잘하고 있네. 경치 너무 아름답더라. 자긴 밥은 먹었어?"


“아니, 등산 마치고 먹으려고 일부러 안 먹었어. 간헐적 단식이 좋다길래 점심 겸 아침, 하루 두 끼만 챙기려고 해.”


"생각 잘했네. 대신 골고루 영양은 꼭 챙겨. 나는 짐은 풀었는데 뭘 해야 할지 막막해서 그냥 꺼내만 놓았어."


"천천히 해.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말고 좀 쉬어."


잠깐의 침묵 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기... 혹시 내 레주메 좀 봐줄 수 있을까? 워드로 만들긴 했는데, 정리가 잘 안 돼서...”


“이력서? 당연하지. 그런 건 내가 잘하잖아. 카톡으로 보내봐.”


"고마워."


"근데, 갑자기 이력서는 왜?"


“펀드가 다 전남편 명의더라고. 내가 하나도 못 건드려. 미국 판매법인 세우려면 돈도 필요하고... 전남편이 돈을 안 주니까, 다시 아이들 가르치는 일 해보려고 해. 취업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우버라도 하려고.”


"자기가 우버 택시를?"


“응, 나 운전 잘하잖아. 아는 사람도 하는데 수입이 꽤 괜찮대.”


연우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체력과 정신적 상태도 걱정이었고,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마주할지도 모르는 위험 또한 우려되었다.


"그래도 무리하진 마. 내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레주메는 바로 봐줄게."


"고마워, 자기. 역시 믿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 사랑해."


전화를 끊고 연우는 다운로드한 그녀의 이력서를 열어보았다. 서류 위엔 그녀가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미국 한인 커뮤니티 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려는 그녀의 새로운 계획. 연우는 한 단어, 한 문장씩 천천히 다듬었다. 그녀가 세상과 다시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얼마 뒤,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와... 내 소개글도 다 바꿔줬네. 정말 너무 깔끔해. 자기 정말 멋지다.'


'기본이지.'


짧은 답장 뒤로 하트 이모티콘들이 차례로 쏟아졌다. 연우는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창밖으론 오후의 따스한 볕이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산의 맑은 공기가 여전히 몸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투명했다. 지금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이제 그녀와의 새로운 시작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평온한 하루의 끝에 내려앉았다.




며칠 뒤, 빛톨이 다시 연락을 해왔다. 이력서를 보낸 이후로 그녀의 소식은 뜸해졌다. 아마 시차에 적응하느라 피곤하거나, 우버를 시작했으리라 생각한 연우는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먼저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빛톨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배어 있었다.


“자기야... 나 자꾸 자신감이 떨어져. 메일도 여러 군데 보냈는데 아무 데서도 연락이 없어. 혹시 내가 너무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건 아닐까?


요즘은 정말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질 않아. 내 돈도 전 남편이 펀드로 들어 놓았었는데... 그게 내 명의가 아니래. 은행에서도 돈을 찾을 수가 없어. 나 이제 어떡하지?


나... 홈리스 되는 게 너무 무서워. 집에서 쫓겨나면 정말 갈 곳이 없는데... 사실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나 경계성 인격장애야. 케타민 치료받고 나은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 예전에 치료 중에 자살 시도한 적이 있어서 상담도 잘 안 해주려는 것 같아.”


연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 병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멀리 있지만, 어떻게든 도울 수 있을 거야. 나도 책 출판 계약 했어. 빠르면 다음 달엔 책도 나와. 아마존 론칭도 법인만 세우면 나머지는 내가 준비할 수 있고. 힘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나 그날 이후, 빛톨은 ‘새로운 직장에 지원했다’ 거나 ‘우버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항상 먼저 오던 연락도 끊겼다. 연우의 안부 메시지도, 카카오톡의 ‘읽음’ 표시가 며칠째 바뀌지 않았다.


간간이, 정해진 시간에 한두 번 ‘괜찮아’, ‘좀 자야 할 것 같아’, ‘내일 얘기하자. 아무것도 못하고 계속 자고만 있어’ 같은 짧은 답장이 왔을 뿐이었다.


어느 날, 빛톨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지금 숨이 안 쉬어져. 죽고 싶어. 내가 너무 못난 것 같아. 자기 만나기 전부터 너무 많은 실수를 했어. 조증일 때 자신만만해져서 일을 너무 많이 벌였던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감당이 안 돼.'


‘무슨 말이야, 죽고 싶다니. 우리 서로 혼자 두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나 SNS도 다 닫아버리고 싶어. 너무 창피해.’


‘그건 자기 편한 대로 해도 돼. 하지만 방법은 계속 찾아보자. 자기 곁에 언제나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마.’


몇 분이 몇 시간 같은 텅 빈 시간이 흐르고,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그럼... 자기... 나랑 같이 죽을래?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자기랑 나랑 다시 태어나지 않고 영원히 둘이 우주를 떠다니고 싶어’


빛톨의 그 문자는 마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흑백텔레비전의 잡음처럼 연우의 모든 생각을 쓸어갔다.


‘지금? 나는 죽더라도 자기 옆에서 죽고 싶어. 그리고 곧 책도 출판되고, 내가 준비하는 일도 있잖아. 한 번은 끝까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죽더라도 우리 두 달만 더 버텨보자. 그때도 안 되면, 그때 같이 죽자. 지금은 아니야.’


‘미안해. 이런 말 하는 내가 너무 못나서... 나 너무 창피해’


대화가 끝나고, 연우는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선 영상도 보고, 사람들의 경험담과 대처법도 찾아봤다.


‘경계성 인격장애.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처음엔 이름이 너무 정중해 오히려 덜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정보를 알아갈수록 연우는 점점 숨이 막혔다.

이 병은 단순한 심리적 기복 정도가 아니었다. 사랑도, 희망도, 곧 절망과 불안으로 뒤덮이고, 살고 싶은 마음조차 죽음의 충동과 늘 부딪치는 병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을 안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까지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끝없는 불안 속에서 자신과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병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빛톨은 어느 날부터인가 연우와 대화를 할 때에도 조급하거나, 늘 자신을 학대하는 듯한 말을 자주 했다. 어느 정도의 우울증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 비교족 밝은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병증이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 사랑해?”

“왜 바로 답장 안 해?”

“나는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지?”

"나 같은 건 죽어야 해. 다 내 잘못이야"


연우는 빛톨이 건넸던 말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말끝마다 반복되던 질문들, 끝없는 확인, 답장이 늦을 때마다 연이어 오는 수십 통의 메시지 알림. 그녀의 말들은 조급함이나 의심이 아니라, 절박하게 외치는 구조 신호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병은 미국에서의 고립과 외로움, 친정과의 단절, 전 남편의 가족에게 헌신하다 배신당한 충격,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운 나날 속에, 결국 그 병은 그녀를 서서히 침몰시킨 세월의 흔적이었다.


전 남편의 가족을 위해 모든 걸 내주고도, 끝내 버림받았던 세월.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언제 길바닥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의 절반 이상이 자살 시도를 한다는 현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미국에 떠나기 전, 그녀가 깊은 잠에 빠졌던 이유도, 미국에서 마주할 한꺼번에 밀려들 현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하게 잠에 빠진 것이란 걸...


그녀는 지금 삶의 끝자락에서 아슬아슬한 줄 위를 걷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이 그 줄 반대편에서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손을 뻗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멀리 떨어진 그 줄을 그녀가 언제 스스로 끊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결국, 빛톨과 모든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 사이 그녀의 모든 SNS가 닫혔고, 카카오톡은 프로필조차 사라졌다. 전화를 해도 자동응답으로 넘어갈 뿐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연우는 LA에 있는 그녀의 친구, 지인들에게 안부 확인을 요청했지만 어디서도 연락이 닿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혹시 이미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연우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마지막으로 LAPD에 생사 확인을 요청하는 신고를 하기로 결심했지만, 섣부른 신고가 그녀를 더 자극할까 두려웠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준 명함을 떠올렸다. 그 안의 이메일 주소.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끈이었다.


그날부터 연우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한 번,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만약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의 답장이 없으면 미국 관련 단체에 생사확인을 요청할 생각으로 그녀의 무사함만을 바라며 메일을 써 내려갔다.



제목: 그냥, 오늘 내 하루를 전하고 싶어

자기야.
오늘 서울은 유난히 더운 하루였어.
점심엔 어머니와 냉메밀을 먹었고, 저녁은 입맛이 없어서...

자기와 서울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자꾸 생각나.
어머니가 요즘 왜 연락 자주 안 하냐고 궁금해하셔서, 시간 안 맞아서 문자만 한다고 둘러댔어.

자기야. 나는 여기 있어. 언제든 괜찮으니까
그냥 메일을 확인하면 ‘응’ 이 한마디라도 해줘.


제목: 오늘은 자기 생각만 나네

이메일 보낸다고 해서
자기가 바로 볼 거란 기대는 안 해.
그래도 혹시, 언젠가 이 메일을 열어본다면
나는 여전히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아.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오늘도 자기 곁에 남아 있어.


제목: 자기야. 지금 거기에 있는 거지?

자기야.
자기가 지금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될 걸 잘 알아.
하지만 세상을 다 잃는 것 같아도
지금 버티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인지 나는 알아.

제발 포기하지 말고 버텨줘.
나는 자기가 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


제목: 자기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동안 말 못 한 게 있어.
자기가 내 옆에 있어줬던 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따뜻한 시간들이었어.
지금도 그날들을 기억하며 버티고 있어
자기까지 나를 떠나면 나도 사라질 것만 같아.
부탁이야. 어디든 괜찮으니
한 번만, 정말 한 줄만
'거기에 있다'고만 말해줘.


제목: 꽃이 피었어

이 꽃, 자기가 좋아할 것 같아서 찍었어.
어머니가 키우는 꽃이야. 별건 아니지만
자기랑 함께 걷던 날의 벚꽃이 생각나서
사진 찍어서 보내.
나 여기 있어. 나 항상 기다리고 있어.


연우는 조심스럽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루에 단 한통의 메일을 보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이 우편이 그녀에게 닿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며...


일주일이 되던 날, 연우도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 순간

빛톨에게서 한통이 이메일이 도착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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