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4장 3화)

4장.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by 구정훈


북커버_당신아직거기에있나요.png


#9 장편소설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의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이제 전국 서점에서 만나보세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098182



4장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3화 <추방된 자들의 프렐류드>


아침 일곱 시, 연우는 눈을 떴다.
새벽까지 책의 편집을 하다 잠들어서 피곤이 채 가시지는 않았지만, 몸이 먼저 현실의 무게를 감지한 듯 더 이상 잠들지 못했다.


연우는 피곤이 채 사라지지 않은 졸린 눈을 비비며 노트북 전원을 켜자마자 메일함부터 열었다. 받은 편지함의 숫자는 아직 그대로였다.


빛톨에게서 오는 메일은 대개 한국 시간으로 오전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였다. 그 시간은 태평양을 건너 두 사람의 숨이 잠시 이어지는 하루 중 가장 짧고 귀한 순간이었다.


연우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거센 압박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전 남편은 소송에 유리하게 쓰일 병원비만 남겨두고 모든 재정 지원을 끊었다. 자존심 강한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카드 회사로부터 독촉전화를 받고 있을 것이 뻔했다.


LA에 도착하자마자 깊어진 그녀의 병세는 그녀를 방 안에만 가두었다. 영어강사로의 취업은 번번이 좌절됐고, 그녀의 몸은 우버 기사 일을 버텨주지 않았다. 기본적인 여건이 준비되지 않은 아마존 론칭 사업은 건강이 회복되기 전까지 기약 없이 미뤄졌고, 그녀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환기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방 안의 공기는 언제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커튼 틈새로 스며든 빛마저 바닥에 길게 드리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물속 깊이 잠긴 사람처럼, 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외부와의 연락은 모두 끊은 채, 하루 대부분을 버티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그나마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 오후가 되어서야 연우의 메일을 열어 '잘 버티고 있다'는 짧은 생존 신호를 보내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빛톨은 알고 있었다.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 놓인 자신이 언제든 연우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오랜 시간 경계성 인격장애와 함께 살아온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조차 예고 없이 칼날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칼날로 친정과 친구들까지 베어낸 기억은, 지금의 고립된 상황에서 그녀를 더욱 자책하는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흉터는 아직 덮이지 않았다. 다시 불이 붙는 순간, 그 칼날은 유일하게 곁에 남은 연우를 향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조증이 찾아오면 상대를 끝없이 찬미한다. 하는 말마다 황홀과 확신이 묻고, 상대의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긴다. 사소한 장점도 과장된 빛으로 감싸고,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절정 속에서도 불안이 함께 자라난다. 이 절대적인 감정을 오래 지킬 수 없다는 예감이,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스스로를 부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울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면 그 사랑은 단숨에 얼굴을 바꾼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었던 존재가, 이제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실망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쏟아낸다.


과거의 모든 호의와 따뜻함까지도 의심하며, 왜곡된 기억 속에서 결함을 부풀린다. 마치 ‘사랑했던 만큼 반드시 실망해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 그 우울의 언어는 칼날로 변해 자신의 주변사람을 가차 없이 베어낸다.


중증의 경우, 이 주기는 며칠, 심지어 하루 안에도 몇 번이나 반복된다. 아침엔 찬미로 시작해 저녁엔 실망으로 끝나고, 다음 날이면 또다시 애착과 집착이 섞인 사랑을 고백한다. 그 속도와 강도는 함께 있는 사람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안전하던 생각하고 여겼던 모든 곳을 스스로 침식시킨다.


결국 사랑했던 사람을 가장 많이 다치게 만드는 것도, 그 사랑의 극단성과 불안정성이다. 연우는 그 주기를 이미 여러 번 목격했다. 그가 빛톨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녀가 침묵할 때는 함께 침묵해야 했고, 거칠게 일렁일 때는 파도에 맞서지 않고 함께 흔들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그녀가 버텨낼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그녀에게 희망으로 닿아야 했다.


빛톨 역시, 자신의 불안정성이 유일한 안식처인 연우에게 닿을까 항상 두려워했다. 그래서 스스로 모든 대화를 끊고, 하루 중 가장 안정적인 순간에만 연우의 메일을 열어 짧은 답장을 보냈다.


연우와 빛톨은 서로의 메일 한 줄을 받아 들고, 마치 심해에서 전해진 구조 신호처럼 그 무엇도 놓지 못했지만, 서로를 향해 다가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서로를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걸.




아직 도착하지 않은 메일함을 닫고, 전날 새벽까지 붙잡았던 원고 파일을 열었다. 책은 연우가 붙들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건너뛰면서도 편집을 멈추지 않았다. 문장 하나를 살리고, 불필요한 단어를 덜어내는 일은 글을 멋지게 보이기 위한 편집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투였다.


책상 위에는 지난주 도착한 재판 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공직선거법 위반.’


연우는 1년 동안 믿고 따른 정치인의 선거를 도왔다. 거진 1년을 일하며 몇 번 받지도 못했던 급여라 믿었던 돈이, 사실은 정치자금법 위반이었다.


연우가 몸담았던 캠프는 승승장구했고, 그 어디서도 돋보였다. 당선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우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사람이 자신이 지켜왔던 신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민 끝에 1년간 쌓아온 노력과 미래를, 그는 스스로 내려놓듯 캠프를 떠났다.

하지만 그날 이후, 떠난 이유를 왜곡하는 소문이 당과 지역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진실보다 편한 거짓을 선택했고, 그 거짓은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도 사람을 없애는 가장 세련된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왜 당선이 유력한 캠프에서 총괄로 일하던 연우가 캠프를 관두었는지를 물어보자 모든 잘못이 연우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의 방향은 능숙하게 조작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남아있는 자들의 집단적인 모욕과 괴롭힘이 몇 개월동안 끝없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급여’라 믿었던 돈이 선거법 위반임을 알게 되었고, 연우는 결국 참아왔던 인내심이 폭발하며 명예를 회복하고 그들의 거짓을 바로잡고자 스스로를 법 앞에 세웠다. 하지만 정치판에서 ‘진실’은 언제나 힘의 논리로 도착한다. 권력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개인의 진실은 그들의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대의명분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패자는 감옥에 가는 곳, 내부고발자는 추방되는 곳. 승리와 패배 사이에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 곳. 국민 행복을 말하면서도 그 속에서는 서로의 삶쯤은 발로 밟아도 아무 문제없는 곳. 그것이 연우가 마지막까지 몸담았던 정치판의 두 얼굴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거가 끝나면 모든 정보를 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을 목숨처럼 지켜왔지만, 배신자로 낙인을 찍기 위해서 그는 언제나 내부의 일을 고발하고 다니는 위험인물로 분류가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당에서 매장되어야 해.’


누군가 던진 그 말은, 곧 ‘우리 세계에 발붙이지 마라’는 최종 선고였다. 연우가 어디에서 일한다는 소문만 돌면 “왜 그런 사람을 쓰느냐, 위험한 사람이다”라는 전화가 빗발치며 따라붙었다. 어쩌다 연우의 능력을 아까워 한 사람의 추천으로 새 일을 시작해도, 그와 일하지 말하는 전화는 끝까지 따라와 연우를 괴롭혔다.


밤을 새워 전략을 짜던 시간들, 피곤에 젖은 눈을 비비며 명함을 돌리던 새벽, 하루에도 수십 번 홍보 문안을 고치던 날들이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은 ‘배신자’라는 낙인 하나로 무너졌다.


그렇게 재와 먼지만 남은 희망 위에 법원의 출석 통보서가 놓였다. 종이 위의 검은 글자가 마치 구치소의 어두운 창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연우는 그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빛톨을 보러 갈 시간도,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연우의 꿈은 끝났지만, 정치판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그의 삶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사람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일. 그 일이 바로 글쓰기였다.


연우는 빛톨을 안심시키기 위해 정치 쪽 일은 하지 않겠다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빛톨과 이미 약속했었다. 지금 연우가 붙든 원고는 취미로 쓰는 책이 아니었다. 그는 이 책이 빛톨을 살리고, 자신의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 믿었다. 희박하지만 성공할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 외에는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은 모든 시간을 원고를 다듬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다.



시장기가 느껴졌다. 입맛은 없었다. 그렇지만 책을 쓰려면, 어떻게든 뱃속에 무언가를 넣어야 했다. 냄비에 물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을 풀어 넣었다.


그 순간, 빛톨의 친구인 가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니와 아직 연락 안 돼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사이로 묻어나는 불안이 연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연우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답장을 입력했다.


'메일은 주고받고 있어요. 하루에 한 통씩요. 위급한 순간은 넘긴 것 같지만... 아직 혼자 고립돼 있고, 위험한 생각이 오가는 것 같아요.'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도, 그 문장은 연우 자신을 향한 위안인지, 가인을 위한 설명인지 알 수 없었다.

가인의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언니 상태가 너무 걱정돼요... 연우씨가 정말 잘 챙겨주세요 지금 연락이 닿는 사람은 연우씨 뿐이예요. 제 카톡에서도 언니 프로필이 사라졌어요.'


연우의 머릿속에는, 가인이 화면 밖에서 걱정하며 한숨을 쉬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연우는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괜찮아질 거예요.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하루에 한 번이지만 계속 연락은 주고받고 있으니. 당장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아요 '


연우는 가인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이 정말 현실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믿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 믿음이 끊어지는 순간, 이 희미한 연결마저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가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문자창을 닫는 순간, 메일함 옆에 붉은 숫자 ‘1’이 보였다.


빛톨이었다.


그녀의 메일을 열자, 첫 줄부터 ‘미안해’라는 단어가 눈에 박혔다. 그리고 그 단어는 거의 모든 문장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한 문장씩 읽을 때마다, 연우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연우씨 미안해
어젯밤에도 잠을 거의 못 잤어.

그냥... 이제는 다 끝냈으면 좋겠어.
나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야.

자기는 왜 나를 떠나지 않지?
모두가 날 떠나갈 텐데..

그런데 자기라도 없으면 난 너무 무서워
오늘도 해가 뜨는 게 무섭고, 사람 목소리가 무서워.
제발 좀 자고 싶어. 잠만 잘 수 있으면..

그게 전부야.
미안해 부정적인 말만 해서.



연우는 편집 중이던 에세이 파일을 닫고, 답장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멈춘 채, 한참이나 화면만 바라보았다. 뭐라도 써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삶에 의욕을 가질지,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무언가라도 말을 해야 했다.


자기야.
자기에게 ‘힘내’라는 말을 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 말이 지금 자기한테는 버거운 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대신, 그냥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
오늘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메일함을 열었어.
아직 아무 소식이 없을 때는,
혹시... 하는 마음에 숨이 조금 멎는 것 같았어.

자기가 잠들지 못한 그 시간에 나는 이 원고를 다듬고 있었어.
한 문장을 고치면서도, 이 글이 언젠가 자기를 웃게 만들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하고 있었어.

자기야.
혹시 오늘도 태양이 보기 싫고
사람들 목소리도 싫다면
그냥 이 메일만 기억해.
어디서든, 나는 지금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건 내일도, 모레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오늘은 그냥, 그거면 돼.



연우는 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고,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처음엔 창밖에서 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코끝을 찌르는 탄 냄새가 방 안 가득 번져왔다.

순간적으로 부엌 뛰어갔다. 냄비 안의 물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라면은 까맣게 말라붙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우는 재빨리 가스불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이치자, 현실이 무겁게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빛톨에게 닿기 위해 쓰던 문장과, 연기로 짙게 물든 부엌의 풍경이 숨 막히는 현재와 겹쳐지며, 가슴 깊은 곳까지 먹먹하게 번져왔다.


연우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흐려지는 눈을 손등으로 훔치고, 씰룩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편집 중이던 책의 파일을 열었다.


#9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18화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4장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