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
#9 장편소설 '당신, 아직 거기에 있나요'의 프리퀄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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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연우는 더 이상 메일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어떤 말도, 어떤 위로나 희망도 지금의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그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하루에 한 번뿐이지만, 그녀의 곁에 머물며 소통한 시간이 쌓여 그녀에게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메일에서는 이제 더 이상 극단적 선택을 의미하는 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파편처럼 남은 불안과 자기 파괴의 기운, 어둠의 그림자들은 아직 그녀의 문장 곳곳을 맴돌고 있었다.
여전히 회복의 신호는 보이지 않았다.
죽음만을 유예한 상태는 계속 이어졌고, 그것은 차라리 무언의 포기, 혹은 감정 자체가 마비된 채 시간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낮과 밤이 어긋난 먼 거리에서 서로의 마음이 닿지 않을 때, 그 침묵은 곧 정지된 시간이었고, 그 자리에는 침묵조차 마비된 공허한 절연만이 남아 있었다.
연우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연우에게 자신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들려주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그녀와의 연락이 다시 끊기기 전, 연우는 점점 더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 속에서 숨 쉴 틈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희망이 걸린 책의 편집 작업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백여 편에 달하는 단편 에세이를 하나의 서사로 엮는 일은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이 글들은 애초에 책으로 엮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한 편 한 편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 그 조각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일은, 마치 바위에 촘촘히 글자를 새기는 것처럼 고도의 집중력과 끈질긴 인내를 요구했다.
백여 편의 에세이를 한 권으로 묶고 보니, 이전에는 문제없이 보였던 표현과 단어들이 반복되어 독자에게 피로감을 줄 것만 같았다.
고통을 직시하는 그의 글들은 오히려 독자를 끝없이 침전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무리 고치고 다시 읽어도 글은 점점 미흡하게 느껴졌고, 퇴고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연우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행 중인 재판의 선고기일도 가까워오고 있었다.
재판 날이 다가올수록 연우는 한밤중에도 자주 깼고, 아침마다 가슴 언저리가 무거웠다. 몸은 지쳐갔고 신경계는 하루 종일 날이 서 있었다. 이따금씩 심장 박동과 호흡의 간격이 달라지는 것조차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녀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연우씨.
자꾸 불길한 말만 하는 나 때문에 연우씨까지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연우씨가 나를 위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자꾸 나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
언젠가는 그 말들을 나도 모르게 연우씨에게 쏟아 낼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
연우씨는 나 같은 여자 만나면 안 돼. 나로부터 도망가야 해. 근데... 연우씨마저 떠나가면, 나는 정말 어쩌지?
내가 연우씨를 공격하게 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워. 나는 늘 소중한 사람을 망치고 떠나보냈어.
나란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 같아. 살아 있는 게 죄처럼 느껴져.
정말... 내가 너무 미워.
그래서... 생각해 봤어.
우리...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내가 너무 부정적인 말만 하고 있어서, 안 그래도 할 일 많은 연우씨한테 더 안 좋은 영향을 줄 거 같아.
내가 조금만 나아질 때까지. 그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연락하지 말자.
부탁이야.
그 말 앞에서 연우는 어떤 말도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설득도, 기다림도 허락되지 않는 시간의 침묵만이 그의 앞에 놓였다.
그는 누구보다 그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말도, 어떤 위로도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녀는 희망이 아니라 더 깊은 절망 속으로 추락할 것이 뻔했다.
'힘내'라는 말은, 이미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그녀에게 ‘혼자’ 임을 새삼 느끼게 했고, '잘 버티고 있다'라는 격려조차 그녀에게는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는 자책으로 되돌아왔다.
연우가 둘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무력함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그녀에게는 ‘그만큼 나는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벼랑 끝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는 알았다. 지금 이 사랑에서 말도 노력도 위로도 모두 칼날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이 연우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우와의 접촉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 단절은 포기의 표시가 아니라, 그를 해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멀어지자’는 말속에는, 사실 ‘서로를 지키고 싶다’는 고통스러운 진심이 숨어 있었다. 연우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연락을 계속하는 것 역시 그녀에게 짐이 되고, 그렇다고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병세가 더 악화되더라도 더 이상 개입할 수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았다. 침묵은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것’. 그것은 연우가 택한 사랑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
“내용은 건들지 말아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출판사 대표와 전화를 마친 연우는 끊기로 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우는 더 이상 출판사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 책은 단지 단편 에세이들의 묶음이 아니었다. 한 편, 한 편마다 서로 다른 감정과 고통이 서려 있었고,
어떤 글은 자신의 피였고, 어떤 문장은 그녀의 눈물이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건네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버티는 사람 곁에 함께 앉아 머물러주는 책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손에 편집을 맡길 수는 없었다.
연우는 단호했다. 문맥의 흐름이나 구조 조정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장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기계적으로 편집하려 드는 태도는, 연우와 독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상처를 함부로 헤집는 일이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은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으며 수정하다 보니 정작 감정에 빠져 놓치기 쉬운 글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살펴주길 바랐다. 하지만 출판사는 정작 그런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외면하는 듯 보였다. 책임과 역할이 제대로 나눠지지 않은 채, 협업은 어느새 갈등으로 바뀌고 있었다.
출판사는 결국 편집을 거의 포기했다. 디자인부터 교정, 교열까지, 전부 연우의 손에 맡겨졌다. 기대했던 마케팅도 출간일이 가까워지자 슬그머니 말이 달라졌다. 대형 서점에 납품하는 것이 전부였고, 책의 성공 여부는 이제 오롯이 연우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연우는 출간을 늦추고 싶었지만, LA의 고립된 방안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면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었다. 책의 출간은 빛톨을 살리기 위해 연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도록 붙드는, 하루 한 줄의 생명선이었다. 몇 달째, 그는 그 생명줄을 꼬고 또 꼬고 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휴식도 없이, 자신을 아프게 했던 그 고통의 문장을 다시 꿰매며...
종결 재판이 있던 날, 법정에 연우의 어머니가 증인으로 섰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연우 어머니의 계좌 내역 일부를 근거로, 연우의 진술을 탄핵하려 했다.
그들의 악의적인 의도는 연우의 눈에도 쉽게 들어왔다. 연우가 스스로 급여를 받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어머니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뒤 자신의 계좌에 입금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일과는 관련도 없는 가족의 계좌까지 끌어들여 억지 논리를 펴는 모습이었다.
기억이 흐릿해져가는 팔십을 넘긴 노모. 평생 한 번도 법정에 발을 들여본 적 없는 사람이, 그림자 하나 숨겨지지 않는 법정의 밝은 형광등 아래 떨면서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검사와 변호사의 얼굴도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신의 자식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손과 입술이 떨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연우는 피고인석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간신히 눈물을 참아냈다.
연우의 어머니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잠시 울먹였다. 재판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시간을 허락했다.
본격적인 증인 신문이 시작이 되었다. 피고인 측의 변호인단은 이미 시나리오를 짜온 듯 보였다. 어머니의 기억을 흔들기 위해 교묘한 질문을 반복했다. 사소한 일자와 돈의 흐름을 물었고, 기억이 흐릿하고 날짜를 혼동한 연우의 어머니는 혼란 속에서 답변을 해나갔다.
연우는 입술을 깨물며 증언을 지켜보았다.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상식을 뒤틀며 교묘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냈고, 그 시나리오로 노모의 기억에 혼란을 유도했다.
검찰 조사를 통해 이미 충분히 설명된 내용이었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들이 왜 중요한지, 무엇을 입증하려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주장들을 반복했다.
마치 말장난하듯, 수년 전의 날짜와 돈의 흐름을 질문하며 기억이 흐릿해지는 노모의 실언을 이끌어내려 했고, 연우의 진술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기 위해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연우는 피고인 측의 주장이 모두 반박 가능한 것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분히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사람이 이토록 악의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이 한탄했고, 결국 자신이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를 다시금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재판에 집중했다.
연우의 어머니는 증언을 마치고 천천히 법정을 나섰다. 잠시 후, 법정 밖에서 울음 섞인 비명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곧 연우의 책상 위로 한 장의 쪽지가 전해졌다.
'지금 어머니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119를 호출했습니다.'
과호흡이었다. 그 한 줄의 메모장이 연우의 마음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팔십이 넘은 노모가 감당하기엔, 법정이라는 공간은 지나치게 냉정했고, 그 무게는 노쇠한 몸 위에 서서히 깔리다 결국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연우는 법정 안에 있어야 했다. 가장 지켜주고 싶은 존재를 바로 앞에 두고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일들의 진상이 밝혀지기만을 두 손을 꼭 쥐며 기도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피고인 신문이 시작되었다. 연우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뻔한 거짓말만이 흘러나왔다.
이미 수차례 자료로 증명된 사실조차, 그는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부정했고, 모른다고 일관하며 정제된 표정 뒤에 숨어 한 치의 양심도 비추지 않았다. 연우는 분노를 억누르며 속으로 되뇌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거짓을 반복하는 걸까.’
이미 연우는 자신이 맡았던 모든 업무의 증거를 제출했고, 정치권 내에서 그의 능력과 성실성은 많은 동료들이 인정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왜곡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연우에게 또 한 번의 모욕이자,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이었다.
드디어 검찰의 구형이 내려졌다.
연우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연우에게도 생각보다 중한 처벌이 내려졌지만 기쁨도, 실망도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남은 감정은 단 하나였다.
자신을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해 서로가 교묘히 짜 맞춘 거짓과 조작이 법정을 통해 공적 기록으로 남아버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 죗값에 대한 형벌이 선고되는 순간 그 모든 거짓이 드러나고, 그들이 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 그 증오와 욕망의 기록이 결국은 더 큰 죗값으로 되돌아가리라는 아주 단단한 믿음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믿음이 지금 그를 붙잡고 있는 전부였다.
판사가 물었다.
“최종 진술 있으십니까.”
연우는 잠시 침묵했다. 원고도 없었다. 준비된 말도 없었다. 연우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재판부와 검찰이 반드시 진실을 밝혀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연우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달 후 이 재판이 누군가의 명예가 아닌 진실이 밝혀지는 자리가 되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불법을 거부했고 정당하게 일했다. 1년 가까이 일하며 몇 번 받았던 급여는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그는 그것마저 감사히 받아들이며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 했다.
그 급여를 합법적으로 비용 처리할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모든 사실을 부정했고, 끝내 연우까지 피의자로 몰아넣었다.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 그 억울함보다 더 크고 간절한 것은 이 재판이 진실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 의해서 망가지고 추방된 삶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 쌓아온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고 그들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몇 번의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독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연우는 오직 진실을 밝히는 것 이외에 자신의 삶이 더 망가지는 것조차 관심도 없었다.
이 재판은 누군가를 증오해서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들의 성공만을 위해 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며 괴롭혀온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과 실체, 그리고 그 범죄행위 들이 이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연우가 바라는 결과였다.
재판을 마친 뒤, 연우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법정에서 피의자 측 변호인들이 어머니의 기억을 흔들기 위해 늘어놓은 주장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참고자료를 정리했다. 그 자료는 곧 자신의 변호인에게 메일로 전송되었다.
자료를 정리하던 연우는 문득 깨달았다. 그들이 내세운 주장들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반박할 수 있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하찮은 조각들을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조작하고, 진실을 뒤틀어내려는 그들의 비열한 방식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악의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탐욕의 벽 앞에서 앞에서, 연우는 깊은 분노에 잠겼다.
빛톨과의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연우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녀가 누구와도 닿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홀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고,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그 단절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우는 책의 편집에도 점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연우는 메일함을 열었다. 몇 번이나 열었다가 닫았던 창을 다시 조심스럽게 펼쳤다.
자기야.
나아질 때까지 서로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말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자기 혼자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마치 방치된 채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난 더 이상 숨쉬기조차 힘들어.
걱정돼서 잠도 안 와. 내 메일에 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메일 확인만이라도 해줘. 그리고 자기가 보던 안 보던 자기가 보고 싶을 때는 이렇게 메일을 보낼 거야.
나는 괜찮아. 스트레스에 원래 강해. 그러니 자기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진심을 아니까... 그냥 편안하게 대해주었으면 좋겠어.
연우는 마지막 문장을 쓴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우스 커서를 ‘보내기’ 버튼 위에 올려놓고, 몇 초간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며 보낼까, 삭제할까를 고민하다 결국 전송버튼을 클릭했다.
그 순간, 마음속 어디선가 약하게 떨리고 있던 현이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빛톨의 메일이 도착했다. LA는 지금 아침이었다. 하루 중 그녀가 가장 우울하게 잠기는 시간. 그 시간에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 보내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자기랑 연락 안 하면서... 더 미칠 것 같았어. 너무 무서웠거든.
혹시 자기가, 나를 정말로 떠난 건 아닐까.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을까 봐.
내가 너무 힘들게 했을까 봐...
나 사실은... 나 자기 메일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데 내가 먼저 연락하면, 또 자기를 괴롭힐까 봐,
그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했어.
메일 보내줘서 고마워.
사랑해.
연우는 그녀의 메일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연우의 곁에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그녀는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 아파서 손을 내밀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연우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단단하게 되뇌었다.
'괜찮아. 나는 절대 널 떠나지 않아.'
그녀의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다 문득, 메일 속 반복되는 한 단어에 시선이 멈췄다.
'자기.'
그 단어는, 그동안 그녀의 편지에서 사라졌던 말이었다. ‘자기’라는, 너무도 익숙하고 따뜻한 호칭.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 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한 언어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기’라고 부르는 순간, 연우를 다시 자신의 삶 안으로 깊이 끌어들이는 일임을. 그 말 한마디는,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마주하게 했고, 언젠가 또다시 무너질 자신이, 그 무너짐 속에 연우까지 함께 끌어당길 것 같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불행한 자신에게서 연우를 밀어내려 했다. 연우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그의 삶에서 자신을 지우려 했다.
'자기'라는 말은, 그런 선택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다시 사랑을 믿겠다는 뜻이고, 다시 그 곁에 머물겠다는 의지였다. 그는 자신을 떠나야 마땅한 사람이었고, ‘자기’는 부르면 안 되는 이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그 말을 꺼냈다. 그 말 속엔, 누구보다 연우를 사랑했다는 고백과 스스로를 얼마나 단속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오랜 침묵이 녹아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그 한마디로 다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연우 역시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멀리 밀어내려 했는지, 그리고 그 거리에서 다시 걸어와, 얼마나 조심스레 그 한 단어를 건넸는지를.
그녀는 그 단어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파국으로부터 연우를 밀어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으니까.
하지만 오늘, 그녀는 그 말을 메일에 적었다. 연우를 ‘자기’라고 부르며 그 말속에 자신의 감정을 포개 전송했다. 그건 조심스러운 감정의 귀환이자, 잊지 않겠다는 서약, 그리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잡은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메일의 끝에는 짧지만 단단한 단어 하나가 더 있었다.
'사랑해.'
그 단어 앞에서, 연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흘렀는지조차 몰랐다.
그녀의 마음 안에 여전히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연우는 처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멀어져도, 어떤 말도 건넬 수 없는 침묵이 계속되어도, 그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사랑해.'
그 단 한마디를 다시 듣기까지의 그 지나간 시간들이, 그녀의 그 말 한 줄에 이르러 연우의 기억 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버텨온 모든 고통과 절망, 기다림과 침묵의 날들이 한순간에 덮쳐왔다.
그제야 연우는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닌,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한 없이 무너졌던 마음이 이제야 위로를 받고 흐느끼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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