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1등급보다 즐거운 스페인어 5등급 이야기
“영어도 못하는데 무슨 다른 언어야?”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우리에게 언어란 오랫동안 ‘공부’이자 ‘스펙’이었다. 넘어야 할 산이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를 중산층의 척도로 삼는다는데, 그들에게 언어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에게 언어란, 더 넓은 세상을 즐기기 위한 ‘문화적 자산’일 것이다. 나는 그 여유로운 흐름에 탑승해보고 싶었다. ‘일’이 아닌 ‘놀이’를 위해, 더 짜릿한 여행을 위해 언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명문대 교수가 50대에 4개 국어를 마스터하고 책까지 냈다는 소식을 들으면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순두부’ 같은 뇌의 해마 용량을 알기에, 나는 처음부터 목표를 달리 잡았다. 완벽한 구사 능력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친구를 사귀고, 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농담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즐거운 소통’을 목표로 삼았다.
단어 100개면 충분했다. 문법은 틀려도 괜찮았다. ‘욕심은 고통의 근원’이라지 않은가. 기대를 낮추니, 언어는 정복해야 할 산이 아니라, 신나게 타고 놀 ‘놀이기구’가 되었다.
이것은 평범한 40대 아저씨가 지난 10년간 5개의 놀이기구에 올라타 본 유쾌한 기록이다.
[책장의 다양한 언어 책들]
나의 첫 놀이기구는 ‘맛있는 중국어’였다. 하지만 잘못된 탑승 방법 때문에 소화불량에 제대로 걸렸다.
사업하는 친구를 보러 몇 번 놀러 간 중국의 소도시. 그곳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다. 택시 기사는 목적지를 몰라 헤맸고, 시장에선 손짓 발짓으로도 흥정이 불가능했다. 답답한 마음에 시작한 중국어였지만, ‘이왕 하는 거 흔적을 남겨보자’는 어리석은 객기가 발동했다. HSK 5급. 자격증이라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 즐거운 ‘놀이’는 괴로운 ‘공부’로 변질됐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 했던가.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은 시험이라는 압박감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순두부 같던 나의 뇌는 딱딱하게 굳어갔고,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이건 내 인생의 모토인 ‘놀이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다.
깊은 반성 끝에 나는 ‘다시는 언어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년간 공들인 중국어는 친구가 사업에 망해 귀국하면서 쓸모가 없어졌다. 이제는 기억조차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비록 비계만 남은 고기처럼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자격증’이라는 족쇄를 풀고 순수하게 배움의 즐거움을 느꼈던 그 시간 자체는 분명 행복했으니까. 이것이 나의 첫 번째 교훈이었다. 놀이를 일로 만들지 말 것.
중국어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나는 2014년 쿠바 여행을 앞두고 스페인어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No.1이 되었다.
종로의 한 어학원. 첫 수업 날, 강사님은 말했다. “여러분은 2시간 뒤, 모든 스페인어를 읽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겁니다.” 설마 했던 그 말은 진짜였다! 알파벳은 영어와 비슷했고, 무엇보다 소리 나는 대로 읽힌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복잡한 동사 변화가 있긴 했지만, 나는 과감히 외쳤다.
“그까짓 거 무시하고 대충 하면 되지!”
나는 시험 볼 사람도, 비즈니스 할 사람도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완벽한 문법이 아니라, 쿠바의 바에서 “모히토 한 잔!”을 외칠 수 있는 용기였다. 복잡한 문법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 마음이 날아갈 듯 편해졌고, 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9개월의 즐거운 학습 끝에 떠난 쿠바 여행은 상상 이상이었다. 현지인들과 웃고 떠들며 친구가 되었고,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중남미 전역을 누볐고, 살인율 1위라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도 현지인들과 어울려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최애국, 콜롬비아를 발견했다. 스페인어는 내게 지구 반대편이라는 새로운 놀이터를 통째로 선물해주었다.
중남미를 정복하고 나니, 드넓은 러시아와 동유럽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나는 즐거운 여행을 위해 러시아어 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 놀이기구는 너무나도 난이도가 높았다.
영어, 스페인어와는 뿌리부터 다른 단어들. 가족(Family)이 ‘씸뱌(Cемья)’가 되는 생경함. 주어, 동사, 목적어에 따라 끝없이 형태를 바꾸는 변덕스러운 문법. 단순함을 사랑하는 나의 순두부 뇌는 매시간 과부하에 걸렸다.
“이건 언어가 아니라 과학이야! 안 해, 안 한다고!”
결국 6개월 만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즐겁지 않은 놀이를 계속할 필요는 없으니까. **‘즐겁게 포기하는 법’**을 배운 것 또한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동유럽의 젊은 친구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했다.
러시아어에 된통 당한 나의 연약한 순두부는 한동안 새로운 언어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강적이 나타났다. 바로 베트남어였다. 무려 6개의 성조를 가진, 배우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언어.
베트남의 역동적인 모습에 반해 덜컥 수억 원짜리 아파트를 계약한 것이 화근이었다. 계약서는 베트남어로 가득했고, ‘모든 해석은 베트남어 원본을 우선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생존을 위해, 나는 다시 학원으로 향했다.
2년간 꾸준히 다닌 결과, 성능 나쁜 해마에도 불구하고 기본 대화가 가능해졌다. 물론 그사이 배웠던 다른 언어들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아파트 계약서 조항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베트남 현지에서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해졌으니. 무엇보다 배울 당시의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달콤한 추억들은 영원히 내 마음에 남을 테니까.
프랑스에서는 ‘외국어를 하나쯤 구사하며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춘 사람’을 중산층의 조건으로 꼽는다던가.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엉터리지만 5개 국어에 도전하고 100개가 넘는 나라를 누빈 나는, 아마도 그들의 기준으로는 상위 1% 부자가 아닐까? 나는 통장 잔고 대신, 마음의 자산으로 가슴 충만한 40대를 보냈다.
불드로의 유쾌한 언어 학습법
시작은 무조건 학원에서: 첫 단추가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발음은 한번 잘못 배우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온라인 강의보다는 직접 강사와 소통하는 오프라인 수업을 추천합니다.
시험 보지 마세요: 자격증이 목표가 되는 순간, 즐거움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놀기 위해 배우는 것뿐입니다.
문법, 과감히 무시하세요: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버리세요. 의사소통이 목표라면,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즐겁지 않으면 그만두세요: 포기는 실패가 아닙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놀이기구에서 빨리 내리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