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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묶인 야생마, 대한민국을 다시 만나다.

코로나가 선물한 가장 완벽한 국내여행

by 불드로

“한국도 좋은데 많아~ 뭐 하러 그 먼 데까지 가나.”

세계여행을 다닌다고 하면 종종 듣던 말이다. 긍정의 의미도 있겠지만, 때로는 ‘너는 네가 사는 땅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멈췄다. 2019년 12월에 시작된 지독한 감기는 전 세계의 하늘길을 닫아버렸다. 세상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던 나에게 그것은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날개가 꺾이고, 발이 묶인 야생마. 끝 모를 무기력감에 잠식되던 그때, 한 줄기 빛처럼 ‘한국관광 100선’이라는 지도를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닫힌 하늘길 대신, 이 땅의 길을 전부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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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놀이 목표가 생기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주말과 휴가를 이용해 전국의 도장을 깨는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KTX와 렌터카를 이용해 체계적으로 전국을 누볐다. 전 세계를 돌아본 여행자의 눈으로 본 대한민국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잘 관리된 관광지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고, 제주의 자연과 울릉도의 비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진짜 보물은 따로 있었다. 나의 여정은 어느 순간부터 단순히 지도 위의 점을 잇는 ‘관광’에서, 지도에 없는 ‘이야기’를 줍는 여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뒤흔든 곳은 웅장한 국립공원이나 화려한 유적지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특히 역사의 비극 속에서 스러져간 여인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구글 지도에 자동 기록되는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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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이 닿은 곳에서 마주한 이야기들


1. 부안 수성당에서 ‘심청’을 만나다

변산반도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성당. 100선 목록에는 없었지만, 그 어떤 곳보다 강렬했다. 만선의 꿈과 무사 귀환의 염원이 담긴 이곳 앞바다가, 우리가 익히 아는 심청이의 ‘임당수’라는 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눈앞의 풍경은 더 이상 평범한 바다가 아니었다. 애틋한 이야기가 덧입혀진 바다는 그 어떤 절경보다 깊은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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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주 의암에서 ‘논개’의 이름을 새기다

진주성. 목록이 아니었다면 아마 먼 길을 달려 찾지 않았을 곳이다. 성곽을 둘러보다 발길이 멎은 곳, 의암(義巖). ‘논개가 적장을 안고 뛰어내렸다는 그 바위구나.’ 교과서 속 흑백의 이름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차가운 강물을 내려다보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한 여인의 뜨거운 의기를 가슴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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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여 낙화암에서 역사의 눈물을 보다

우리는 신라의 수도 경주는 잘 알지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의외로 무심하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낙화암과 백마강의 풍경은 충격에 가까웠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수많은 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는 절벽.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그려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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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해 독일마을에서 한 인생의 무게를 느끼다

남해의 그림 같은 독일마을.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며 걷던 중, 어느 파독 간호사의 무덤 앞에 멈춰 섰다. 묘비에 새겨진 짧은 문구가 오래도록 발길을 붙들었다.

‘독일에서의 삶, 무지개 같던 청춘을 추억하며 남해의 아름다운 강산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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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가난을 이기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을 그녀의 고단했던 삶. 그 모든 시간을 품고 고향의 아름다운 강산에 잠든 그녀의 인생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코로나가 내게서 하늘길을 빼앗아간 대신, 내가 딛고 선 이 땅의 속살을 들여다볼 시간을 선물했다. 전국을 두 발로 누비고, 교과서 밖의 진짜 역사를 가슴으로 만난 지금, 나는 비로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네, 맞아요. 한국, 정말 좋은 곳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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