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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Jun 21. 2024

7. 남을 수 있는 것들Ⅰ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7. 남을 수 있는 것들



  카페를 만들면서 가장 기다렸던 일이었다. 나는 동갑내기인 처형에게 그전에 몇 차례 금전 면의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이참에 처형이 그것을 갚는 셈 친다며 카페에 필요한 것을 해주겠다며 아내를 통해 전해왔다. 인터넷으로 보아는 두었었지만 내게는 무리한 금액이었다. 나는 체면을 불고하고 유리를 끼운 알루미늄 진열장 두 개폭 90cm짜리로 세 개를 놓아야 양쪽 기둥 사이에 붙여 놓기 딱 맞았는데 너무 큰 부담은 지울 수 없었다. 90cm나 120cm나 가격은 거의 같았다가 있었으면 한다고 했더니 입금해왔다.

  내 서재의 한쪽 캐비닛 속에서 잠들어 있던 내 문학적 유물들(내 유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스물여섯 살 때, 내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던 모터사이클의 공구함에 넣어 다니던 메모장 두 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병장 때 썼던 습작 노트 두 권―벌써 오래전에 사장되지 않고 이렇게 빛 보게 될 줄 몰랐다―과 제대하면 곧 써 갈 소설을 구상했던 쑥색 표지의 훈련용 수첩도 있었다. 그랬다. 결국, 나는 해내었다. 늦게나마 나는 작가가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책 두 권을 쓰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들을 적었던 착상 수첩들. 그 수첩 중 어느 것은 길에서 눈을 맞아 글씨가 번진 페이지도 있다. 내 참다운 삶의 흔적이었다. 작품을 쓸 때, 집에 심각한 일이 벌어져 머릿속까지 온전히 고통스러운 날도 나는 그 수첩들에 문구를 써넣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을 물론 진열해야 했고 그것을 쓸 때까지의 오브제들도 골판지 상자에다 넣었다.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으로 작업이 잘 안 될 때 썼다가 옮기는 스프링 노트들, 책으로 나오기 전에 돈 주고 제본해 본 원고들, 문학상 공모전에서 받은 상장도 담았다. 이제는 눈에 맞지 않는 돋보기안경과 책상 옆 책꽂이에 올려두었던 조그만 약사여래 상도 이제는 전시하기로 했다. 어느 때까지는 잉크가 다 닳으면 생각 없이 버렸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하나씩 모아두었던 중성 펜 십여 개도 챙겼다. 보통 1000원대에서 3000 원대였는데 책에 밑줄을 긋거나 여백에 무엇을 쓰거나 착상 수첩과 스프링 노트에 적을 때 썼던 내 손때 묻은 것들로서 거의 서로 다른 제품들이었다. 중성 펜이 내 손목과 손가락에 부드럽고 저항이 없었으며 글씨를 쓸 때 생각의 속도와 맞았다. 값쌌지만 그 펜들을 하나씩 살 때 각기의 생김새가 좋았는데 작가로서의 작은 기쁨들이었다. 

  독일의 그 유명한 명품 펜볼펜조차도 가장 저렴하다는 것이 28만 원부터다같은 것이 좋은 글쓰기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경우로 내 손때 묻었던 시간의 이력들을 보여주어도 한 의미는 있을 것이었다. 




  나는 매장으로 싸 가지고 온 것들을 진열장에 넣으면서 내 인생에 남은 것이 고작 이것들밖에 없구나, 하는 마음에 지나온 생이 한참 동안 허탈했다. 내가 쓰던 펜싱이며 승마 장비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다시 내 삶을 돌아보니 두 권이라도 내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털썩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억은 남을 수 있겠지. 어깨가 저릿해지는 추억들. 함께였던 추억들. 젊은 날 최선으로 사랑했고 방랑한 추억들을 가진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추억이 없는 인생이란 그 얼마나 무목적일 것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진열장 두 개를 붙이고 남는 공간에 꼭 맞도록 시내에서 철제 조립식 앵글 선반 장을 맞추어 와야 했다. 카페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본가에 가서 광을 한참 뒤졌었다. 내가 군대 가기 전에 쓰던 빨간색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잡동사니 밑에서 내 방에 있던 빨갛고 작은 흑백텔레비전 수상기도 찾았다. 양친 방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컬러텔레비전을 놓았지만, 나는 가난했었다.


  그 이전과, 그때와, 지금, 그는 늘 가난한 놈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망이 아주 컸다. 그의 가난은 마치 다른 사람들이 등을 구부리고 앉거나 손톱을 깎는 것과 같은 하나의 나쁜 습관이었다.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astner, 《파비안Fabian


  언제나 나는 가난했기에 흑백텔레비전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일주일에 딱 세 개의 프로그램만 시청했다. 하나는 무슨 수목 드라마였고 토요일 밤에는 〈토요명화〉 아니면 〈주말의 명화〉―더 재미있을 것으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일요일 심야의 〈명화극장〉이었다. 카세트 플레이어는 심야에 영화음악 라디오 프로그램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들으면서 공테이프들을 사다가 녹음해 두고는 했던 것이었다. 또, 싸지 않은 어떤 월간 영화잡지를 나올 때마다 사서는 배우와 감독 등 여타 사진들이며 내용을 읽고 꿈꾸는데 많은 시간을 썼었다. 그랬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외화들을 보고 영화음악을 모으고 잡지로 공부하면서 무심코 영화배우 내지는 영화감독을 꿈꾼 적이 있었다. 내 영화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강렬한 작품이 될 것이었다. 처음부터 헤비메탈 같은 음산하고 강력한 음악이 깔린다. 진부한 것은 너무나 싫었다. 그때는 군 입대도 앞두었고 충무로에서 세월을 버릴 생각은 못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의 늙은 나는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다―나는 스물네 살 때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감독이면서 나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들을 쓰고 있으니.

  잡동사니 속에서 아연 합금으로 된 조그만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내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단체로 우주 과학 박람회(이 행사명이 맞을 것이다.)에 갔을 때 막냇동생을 주려고 샀다―와 약간 더 작은 비슷한 우주왕복선―나중에 알아보니 디스커버리호였고 막냇동생 역시 비슷한 학교행사를 다녀온 것이 아닌가 싶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우주왕복선은 더는 발사되지 않는다. 결국, 한 번 타고 우주를 날아보지도 못하고 역시 옛것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 그것까지 있었다. 지금의 전기 주전자는 물이 끓으면 전원이 꺼지지만, 그 옛날 몸통이 긴, 학 상표의 알루미늄 전기 주전자는 물을 계속 데워 놓을 수 있었고 물이 끓으면 플러그를 뽑아야 하는 것이었다.


  19○○년 ○월 ○○일(월) 새벽 1시 40분 1 독.

  포트에 물이 끓는다. 

  뜨거운 밀크커피를 이제 한잔해야겠다.  


   《노인과 바다》 맨 뒤 페이지에 내가 적어놓은 것이다. 입대 전의 ‘허공에 매달린’ 시간에 나는 헛간에 붙은 조그만 방에서 거의 책을 읽다가 이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면 밀크커피는 아니고 믹스커피를 즐겼었다. 기억나는데, 왜 밀크커피라고 했느냐 하면 노인이 먼바다에서 사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소년이 그에게 주려고 뜨겁고 우유와 설탕을 많이 넣은 커피를 주문하러 갔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얀 철제 앵글 선반 장에 빨간 텔레비전이며 카세트 플레이어, 상단에는 그 옛날 전기 주전자와 조그만 우주왕복선들을 배열했다. 그 한쪽에 두면 좋을 듯해서 옛날 황동 석유 버너를 추가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수련회나 캠핑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으로,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그 버너로 물을 끓여서 ‘커피를 타 먹는’ 정경도 연상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서른 중반 즈음 한창 등산에 빠졌을 때 처형한테 받았는데, 그녀가 학창 시절에 몇 번 썼던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옛 시절 낚시 가게에서 그 버너며 텐트를 돈을 주고 빌려야 했었는데 처가는 부유했던 모양이었다. 

  옛 추억을 실감해 보려고 옛날처럼 그 버너를 알코올로 예열하고 펌프질을 해서 라면을 한 번 끓여 보았지만 역시 옛날처럼 새까맣게 그을음이 올라 이제는 사용 못 할 물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때 이미 나는 휘발유를 쓰는 고성능 버너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이제는 한쪽 창 밑이 영 허전했다. 명절에 처가에서 하룻밤씩 묵던 방에 있는 콘솔이 떠올랐다. 쓰지 않는 것 같았고 말만 하면 그냥 받아올 수 있을 듯했다. 전화하고 실으러 갔더니 창고 겸의 마당 비닐하우스 안 구석에 있었다. 처제의 혼수였는데 몇 개월 만에 바꾸면서 그리 가게 된 것이었다. 서랍 전면에 동양풍으로 매화가 그려진, 처제처럼 외모가 화사한 콘솔로 한옥에 어울릴 것 같았다. 가져와서 보니 몇 군데 칠이 까졌기에 같은 색 페인트로 메꾸면서 나는 한숨이 나왔다. 처제는 명품 옷이며 가방, 화장품들이 많다. 얼마 안 가서 그런 것들을 주는 덕에 아내는 언감생심의 물건을 써 보는 것이다. ……더 말해 무엇하랴.




  남자 쪽은 나보다 네댓 살 많은 듯했고 여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았는데 미소를 머금고 있는 눈 때문인지 더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돈 되는 거는 통 안 하고 살았죠?”

  순간 여자가 얼굴을 굳혔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타인에게 무례한가. 나는 치밀어 올랐지만, 여자 쪽이 꽤 화사했으며, 남자 쪽의 행태가 본디부터 그런 식인 지라 못 말리는 듯해서 달리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그에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오랫동안 했던 사업과 그간의 주요 밥벌이들을 말해 주었다. 

  “돈 안 되는 것만 하셨네.”

  그날 누구나 익히 아는 독일 고급 브랜드의 덩치 큰 스포츠 유틸리티 흰색 차 한 대가 매장 마당으로 올라와 느티나무 옆에 대더니, 키가 크고 눈이 모인 남자와 그의 처가 들어서서 구경 삼아 들렸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유리 진열장 안의 물건들을 훑어보다가 던진 소리들이었다. 자동차며 태도며 행색으로 미루어 돈푼깨나 만지는 사람들 같았다. 


  당신의 눈에는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과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것은 당신보다 강하다. 또 나는 내 삶과 나를 가까이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대해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전부다. 이 진리는 나를 꼭 붙들고 있으며, 나는 오직 그 진리를 꼭 붙들고 있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옳았다. 지금도 옳고 앞으로도 옳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서 그 다른 방식의 일은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다만 내가 옳다는 것이 인정될 눈앞의 새벽을 기다리며 살아온 것이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이방인 L'Étranger


  그렇다. 나도 사업을 했지만, 돈이 아니라 긍지와 명성을 원했고 결국은 망했으며, 말을 오래 탔고, 지금은 작가다. 비록 돈 때문으로 고생하지만, 나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참 동안 어이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러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갈 수 있는가? 아무리 비싼 차라도 그것을 가지고 떠날 수 있는가? 사람이 죽으며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돈을 남길 수 있는가?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가고 없어져 버린다. 건물을 남길 수 있는가? 남의 것이 되는 것이다. 타던 차를 남길 수 있는가? 역시 남이 타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무례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결국,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이름조차도 남기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난 것은 아니었고 그러한 사람의 일생이 의미 없을 뿐이었다. 




〈남을 수 있는 것들Ⅱ〉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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