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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Aug 23. 2024

24. 카페 전쟁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24. 카페 전쟁



   내 차에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것이다. 그날 기름값을 벌어서 다음날 넣으면 된다. 예전의 삶을 돌아보면, 그날 생각한 것을 그날 바로 했기에 얼마나 손해가 막심했던가. 내 카페 쪽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수차례, 나라면 그 시골 동네의 어느 카페로 가고 싶은가를 고심했다. 내가 카페를 시작한 뒤에 다녀보았던 카페들 중 여러 군데가 그 사이에 망했다. 사람들은 왜 카페에 가는 것일까? 나는 왜 내 카페로 가고 있는 것인가. 사실, 안 가도 그만이다. 나에게는 자유가 있다. 얼마든지 운전대를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하기에 나는 그날의 내 전장으로 나간다. 나는 돈을 벌면서 책을 읽으며 소설을 써보려고, 쉬려고, 그리고 돈을 안 들이고도 그런 것들이 가능함을 증명하려고 카페로 간다.

  나는 내 카페의 아랫길에 당도한다. 다 내가 구상해서 내가 만든 내 병사들, 아니 수문장들이 내 외성의 진입로 입구에 서 있다. 나는 매장 앞마당 끝 쪽에 차를 받치고, 예전에 야외 대마장에서 훈련할 때 쓰던 뿔테의 미러 선글라스를 벗어두고 내린다. 하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지만 여전히 승마장에서 회원들 교습할 때의 모자를 쓴다. 일 자체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땀 냄새가 안 나면 이틀씩 같은 옷으로 나온다. 전날 왔던 이용객이 다음날도 올 확률은 극히 낮고, 와도 무슨 상관이랴. 나는 간편하게 사는 것이 좋다. 

  나는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카페를 하기에 카페 여러 군데를 탐방하면서 사람들이 단지 그 가격의 커피 등 음료를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가격 이상의 무엇인가를 즐기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 공간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기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남의 집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그 집에 가서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집의 주택 양식, 실내장식과 장식품이며 소품들, 생활 집기 같은 것들을 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감염병 시국 가운데서도 아랫길의 그 실험은 적중했다. 이용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을 비웃고자 주워다 놓은 것들과 못 쓰는 물건을 고쳐서 카페를 꾸며놓았건만, 다행히 오묘한 격조를 풍겼고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내 창조물이 인정받고 있다는 심정이었다. 

  매장에 들어와서 뭐가 못마땅한지 떨떠름한 눈초리로 불퉁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여자들도 간혹 있었다. 마치 자기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듯이. 그 여자들은 돈 없이 나처럼 못 할 것이었고, 손가락 하나 날릴 자신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다른 이용객들이 들어차면 그들의 안색이 변했다. 또 가끔 다른 여자 유형도 있었는데, 차를 세우고 들어와서 매장을 둘러보고 이러는 것이었다.

  “여기가 다예요?" 

  카페의 크기가 내가 혼자 관리하기에 알맞았다. 더 크면 관리가 안 되어 다른 사람을 써야 하는데 인건비가 비싸서 남는 것이 없을 터였다. 차를 보아하니 별로 좋지 않고 집도 작을 것이면서 얼마나 더 넓은 데를 원하는가? 그러고는 그런 여자는 그냥 갔다. 그래. 어디 한참 멀리 대형카페나 가라지. 그런데 설거지를 할라치면 다시 차가 올라와 빈자리를 채웠다. 나무 약사여래불! 

  가게에 사람 많은 광경이 최고의 인테리어이자 권위가 되었는데, 아무도 없을 때 카페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인 양 큰소리를 치다가도 이내 다른 자리들도 차면 주눅이 드는지 조신해지는 것이었다. 내 옛 사업은 내가 모든 것을 중심에서 이끌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환경이 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메뉴만 만들어 팔기만 하면 되었고, 이용객들은 내가 하나하나 만들어 놓은 환경 속에서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욕실에서 카페로 갈 준비를 할 때 두려운 마음은 여전했으나 일단 집을 나서면 그래! 오늘을 또 싸워나가자, 하는 결의가 생기는 것이었다.

  ‘오늘도 나는 간다. 나의 승마장. 나의 전장으로.’

  나는 카페로 오는 길에 일말의 정감을 품었다. 사람의 일생에 많은 것을 못하는가 보다. 나는 그동안 소설도 같이 써 왔을 수 있었으련만 통 그러지 못했다. 핑곗거리를 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무엇을 해 놓았던가. 

  “여기 꼭 와보고 싶었어요.”

  와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그래도 나는 숲속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이루어 놓기라도 한 것이다. 다른 데 보다 특별히 좋은 가게를 만들기가 어디 쉬운가. 그것도 산속에서 사람들이 올 만한 카페로 만든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테이크 아웃 컵 용 홀더에 내가 직접 글씨를 썼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읽던 책의 문장을 일일이 쓰다가 점차 감당이 안 되어 


  #숲속의 사색

  #숲속으로의 여행

  #여름 샹그릴라 

  #한 번쯤 뒤돌아볼 시간 

  #세상을 비켜서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간단한 글귀를 적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어려워져 시내 인장 집에서 아예 자동 스탬프를 맞추어 왔다. 나는 그 스탬프로 찍으면서 나중에 편리해진 즐거움을 누리는 반면 군대에 있는 내 아들을 생각했다. 내가 미리 써 놓은 홀더가 떨어져서 아들의 미숙한 필체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식 고생 안 시키고 진작에 만들었을걸, 하고 나는 후회되었다.

  월요일은 위쪽 카페가 쉬니 원체 바쁜 날이었고 화요일부터가 진정한 승부였다. 아무리 산속이라도 희한하게 사람들은 몰릴 때 몰렸다. 사람들은 커피나 음료를 마시고 싶은 생체 리듬의 주기가 대개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달릴 때는 시간의 흐름이 아주 더디게 느껴졌고, 그러는 와중에 내 자식과 함께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내 매장에 이용객이 많은 날은 어떤 카페들은 그 수만큼 사람들이 없을 터였다. 그 사람들이 그곳들로 갈 것을 이리로 온 것이기에. 세상은 원래 그렇다. 고양이들의 볕 잘 드는 두 무덤이 내 카페를 축원하는 듯했다. 어느 순간은 웃기는 주문도 받았다.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하고요.” 

  “……따듯한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넣어 드릴까요?”

  또는 이랬다.

  “복숭아 아이스티 뜨겁게 되나요?”

  “아이스틴데요?”

  “아! 그렇지.”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아무도 모르는 산속에 조용히 숨어서 돈을 벌었다. 예전에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많이 신경 쓰며 살았으나, 이제는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었고 돈만 벌면 되었다. 




  주문이 밀릴 때는 그냥 내가 카운터 테이블에서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주문해 놓고 바로 바깥 자리로 나가 앉는 치들 때문에 곤란했다. 메뉴를 만들어서 자리까지 가져다주면 열에 아홉은 그 자리에 쟁반째 고스란히 놓아두고 몸만 빠져나갔는데, 바빠서 불러 직접 가져가게 하면 십중팔구는 빈 용기를 반납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책을 강구 해야 했는데, 포털사이트의 큰 중고거래 커뮤니티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훑어서 신품으로는 30만 원 후반대의 진동벨 세트를 2만 원 깎아서 10만 원에 구했다. 먼저 다 갖출 일이 아니라 하나씩 경험해 보고 모색하는 것이 역시 옳았다. 

  꿈이라도 이상하게 꾸고 나면 큰일 나는 날이었다. 예를 들면 카페 마당으로 차가 줄줄이 올라오거나, 바깥은 밤 같은데 이용객들이 주문하려고 줄을 섰는데 전기가 나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하지 않거나 하는 꿈이었다. 그런 날은 한 번에 진동벨이 네 개씩 나갔다. 전날도 바빴기에 몸이 고될 때는 예전의 승마장 일을 생각했다. 승마장에서는 그날 아침에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하루 몸을 사리면서 슬슬 움직였었다. 나는 이제 오히려 연일 바빠도 흥이 났다. 몸이야 고될망정 그만큼 돈이 들어오고 카페는 살아나는 것이었다. 이용객들이 밀려 단시간에 신경을 팍 당겨쓰는 바람에 몸이 안 좋아질 때가 있었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어느 문장을 생각했다. 승마장 하루 쉬는 날 어디로 갔을 때 보고 적어왔던 글귀였다.


  누렇게 뜬 마누라의 얼굴, 배고프다 보채는 어린 자식들의 울음. 막장 사람들은 여기서 이를 악문다.


  나는 다른 일을 하다가 작업복 차림 그대로, 이를테면 헌 여름 승마바지를 입은 채로 주문을 받을 수도 있었고, 오전에 집에서 간편하게 입고 나올 수 있어서 좋았다. 매장에 이용객들이 들어차고 메뉴를 만들어 순서대로 호출하랴티오프 시간이 다 되었다며 바쁘다는 한두 명은 눈치껏 슬쩍 중간에 끼워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면서 좋은 자리가 나면 권하랴, 화장실 가르쳐주랴, 앞마당에 차들이 엉키면 뜰로 나가서 손짓으로 뒤쪽 주차장으로 유도하랴, 내가 무슨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옛 사업과는 달리 나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내 카페는 오롯이 내가 통제할 수가 있었다.




  아들과 같이 쉬는 날 없이 했을 때보다 월 매출이 훨씬 많았다. 앉아 볼 틈이 없어서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 적도 있었다. 나는 그라인더의 레버를 연신 당겨 포터필터에 커피가루를 받으면서 그래! 자동차세 1기분이라도 만들어서 내자, 하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지친 나는 옆구리에 팔꿈치를 앞뒤로 슬슬 스치면서 손의 힘을 풀고 말고삐를 조작하듯 장비와 도구들을 다루고는 했다. 

  나는 예전의 사업들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참다운 돈벌이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용객들이 빠지는 시간에 창가에 앉아 카페 마당의 나무 그늘과 듬성듬성한 뙤약볕을 내려다보며 3년 전 그맘때 타는 듯한 더위에 카페를 만들고 있던 나를 떠올려보았다. 승마장에서처럼 시간을 죽이고 있지 않고, 이제껏 카페의 하루하루는 내 삶의, 혹은 내 경제적 삶의 토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우리 카페 참 없이 시작했었어.”

  명소가 되면 한 번도 찾지 않은 과거의 사람들에게 다 보복이 되는 것이었다. 장사 잘 된다는 소문은 나게끔 되어 있다. 실제로 내 카페가 주말에는 앉을 자리도 없다는 소문이 났다고 몇 사람이 일러주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던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팔아주는 돈은 제값이 안 되는 것 같았으며 그다지 탐탁지도 않았다. 내 카페에 거의 오지 않았던 아는 사람들이 나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 카페가 좋아서 와보고 싶게끔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점심때가 다 지날 무렵까지 이용객이 한 사람도 없는 날도 물론 있었다. 그런 날은 아침에 물건을 발굴해서 ‘당장 마켓’에 올려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나는 때때로 그 플랫폼에 물건을 올렸다. 장사가 안되는 날이더라도 뭔가는 팔 수 있었고,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은 듯한 마음이 그날의 끝까지 지속되었다. 

  ‘오늘은 뭐 팔아넘길 게 없나?’

  그것은 금단 증상과 비슷했다. 가게가 하나 더 있는 셈이어서 무엇을 하나 올려놓으면 카페가 바쁜 날에도 괜스레 설렐 것이었다. 


  내 카페의 안팎을 둘러보면 아직도 미비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완벽한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완벽함을 바라고 원래의 기물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내다 버리고 무리해서라도 다시 새것으로 들여놓고는 했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용인하지 못했기에 아예 옛 사업 자체를 망쳐버렸던 것 같았다.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 박인희 시, 〈얼굴〉


  이제는 그저 그럴싸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카페가 내가 아니듯 내가 내 카페는 아니었다. 아침나절의 카페 가는 길에 몸은 뻐근한데 그날도 역시 바쁠까 봐 두려움이 들고 부담이 되어 어디 다른 데로 가고 싶거나, 아니면 쉬거나 집에 돌아가 누워있고 싶을 때는 승마장에서처럼 카페를 남의 일로 생각해 보고는 했다.

 



  내 카페가 바로 길가에 면한 것처럼 이용객들이 드는 것으로 미루어 위쪽 카페는 이전만큼 장사가 잘될 턱이 없었다. 그러기에 물은 아래쪽으로 흐르기 마련이었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짬을 내어 차로 정찰가 보았다. 그 여자의 차 말고 두 대 더 있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공정하게 서로 출발선에 선 것과 같았다. 

  ‘선생 하다가 카페를 하고 앉아있으니 좋으냐?’

  궁벽한 시골 동네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보자고 나는 그렇게 여러 번 갔건만, 그 젊은 여자는 딱 한 번 오고 여태 발길을 끊은 것이다. 

  ‘너는 이제 나의 적일 뿐이다. 용서하지 않겠다.’

  전쟁이 있어야 평화가 값지다. 역시 위 카페는 내용이 없었다. 비교 우위에 있을 때 행복할 수 있었다. 

  “많이 바빴어요? 아까 전화를 안 받길래.”

  아내의 전화였다.

  “엄청.”

  내가 대답했다.

  “돈 많이 벌어서 좋겠네.”

  “난 아직도 배가 고파.”

  휴대전화 저편에서 아내가 웃었다.

  쉬는 날, 어디서 혼자 점심밥을 사 먹을 때도 나는 선택의 실수를 할까 봐 적이 긴장되고 불안했다. 돼지갈비를 먹고 싶으면 혼자라도 무조건 2인분 이상만 주문받기에, 그렇다면 2인분을 시키면 되었다. 돈이 있어야 자유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깃점들을 양껏 씹으면서 과거에 내가 수도 없이 밥과 고기를 사 먹였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이제 목욕탕에서 땀을 흘린 다음 단박에 목 바로 밑까지 냉탕에 담갔다. 목 바로 밑에 수면이 걸치니 목이 말랐다. 내 카페는 순항 중이었다. 이 나라에서 카페의 3년 생존율은 47%라는 통계가 있다. 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산속에서 일단 살아남은 것이었다.

  카페를 걸고 무인모텔들 앞을 지날 무렵 나는 이제 재즈를 내보내는 라디오 채널로 맞췄다. 마스크를 벗게 될 날은 요원했지만, 철로 상공의 구름다리를 넘을 때 시내에 불빛들이 아름답게 깔려있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거의 망했던 자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 나는 점점이 빛나는 불빛들을 내려다보니 정든 가난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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