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얼마 전부터 아침에 눈이 떠지면 손과 발이 아주 멀리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그렇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나는 손과 발을 불러들이기 위해 손끝이나 발끝을 움직이려고 노력하다가 그만둔다. 내 성은 고요하기만 하다. 나는 누운 채 그 고요를 즐긴다. 나는 혹시 그날 걱정거리가 있는지 짚어본다. 당면한 걱정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다행이다. 당장 내일이 근심되지 않는 삶을 나는 얼마 만에야 사는 것인가. 휴대전화에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대체로 입금되는 소리다.
오전 8시가 된다. 승마장에서라면 일을 시작할 시간이다. 나는 누워서 즐긴다. 늙은 나는 몸이 안 결리는 데가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럼 결림도 즐긴다. 승마장 일 다닐 때나 아르바이트 나갈 때는 아침이 불행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잠에서 깬 아침에 행복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것 같지 않았다. 모두 다 일을 나간 다음에 느지막이 준비하고 나가는 이 같은 삶이 나는 좋다. 사업을 해서 남들을 거느리고 신경을 쓰며 남에게 보여야 하는 머리 꾸밈이며 복장에 차종 말고 나를 위한, 내가 편한 차림새로 내게 좋은 차를 누릴 수가 있다. 예전에는 돈은 벌었었지만, 도로 투자하느라 돈이 남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은 것이다. 투자하지 않으니 돈이 쌓이고 필요할 때 바로 쓸 수가 있다. 예전에는 돈이 모일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야 쓸 수 있었다. 돌아보면 돈 되는 것도 없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힘이 들었던가.
나는 나갈 준비 와중에 내가 만들어 놓은 카페를 생각해 보았다. 내 집은 성처럼 생겼지만, 나는 그런 집을 성답게 꾸몄던 재주가 있었다. 나는 그런 재주로 아무리 카페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와보고 싶어 와서 커피 한 잔쯤 마시고 싶어지는 정체성 있는 카페를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을 나서면서 다짐했다. 이 평화를 지키리라. 그러려면 또 돈을 벌어야만 한다. 카페 앞마당에 올라오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중년 남성으로 딱딱한 말투였다.
“백승영 씨죠?”
이제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통장입니다.”
무슨 세대원 수를 파악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나는 매장에 들어오면 맨 먼저 화목난로의 재를 긁어내는데,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등 뒤에서 차가 올라오지 않을까 하고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차가 올라와 이용객이 어쩌다 들어왔는데 후회되지 않는 카페를 만들어 놓았다는 자신이 내게 있었다. 이 산속에서 카페를 안 했으면 어떻게 감염병 시국을 지내올 수 있었을까, 하고 나는 돌이켜보았다. (차후 알게 된 바지만, 소상공인 상당수는 감염병 사태 내내 대출로 생계를 유지했다.) 세상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예전 삶에 비추어볼 때 이 같은 것이 삶의 진실이었다. 나이 50이 넘어도 배울 것은 있는 것이다. 사업에 열중했던 30대에서 40대까지보다 카페를 시작하고 이제까지 나는 특히 돈의 문제를 비롯해 인생에 있어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았다.
길을 지나갈 때면 장사 안 되는 집처럼 슬퍼 보이는 것도 없었다. 얼마 뒤면 자그만 상가 임대 현수막이 붙을 것이었다. 그러면 돈 들어간 것들은 다 어떡하나. 그간에 전의 그 후배 처는 반대편 시내 끝으로 더 작게 카페를 줄여 옮겼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었다. 안주까지 만들면서 밤에 술을 팔아도 장사가 안될뿐더러 임차료까지 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사하면서 무심의 경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여태껏 끝없이 확신해 왔지만, 카페 운영이란 힘들고 힘들었다. 나는 고양이 로고가 박힌 테이블들을 닦고 그 테이블들에 딸린, 맨 처음에 중고로 샀던 값싼 의자들을 정렬하다가 창밖으로 자연스럽게 고양이들의 무덤 쪽을 보게 되고는 했다. 나는 내열 유리 티포트―애초에 아내가 두 개 사 주었었는데 이용객이 다 깨버려서 단단한 제품으로 새로 장만한 것이었다―며 인터넷으로 한 조에 3000원 주고 샀던 카페라테 잔 등을 씻어놓으면서 카페를 시작하고 이제까지 야무지게 산 나 자신이 흐뭇했다.
어쩔 수 없어서 내가 술을 한 번 받아줘야 했기에 뼈아픈 후회를 하고 나서도 그다음 날 바로 채워지고도 남았고, 1000원 숍에서 비스킷을 살 때 눈에 들어서 1000원짜리 디저트 스푼을 네 개 샀다고 해도 내가 점심을 먹기 전에 벌써 그 소소한 지출의 20배는 넘게 들어왔다. 나는 왠지 그러고 싶어서 탄산수를 많이 사 온 날은 에이드가 많이 나갔고, 우유를 많이 사 온 흐린 날은 라테가 계속 나가는 경지까지 되었다.
쉬는 날 나는 어느 대형마트에 갔고 겨울을 날 털 슬리퍼 한 켤레를 장만해 보려고 했다. 역시 돈이 있어야 자유가 있었다. 나는 그날 내 차의 먹통이었던 후방카메라를 수리했고, 통장에는 여유가 있었으며, 대중목욕탕의 더운물 속에 앉아있자니 처음으로 내가 카페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나가만 있으면 돈이 들어왔다. 돈은 몹시 중요한 것이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은 돈만 있으면 거의 해결되었다. 나는 땀방울을 떨구면서 이제야 비로소 한 번에 머리까지 냉탕 물속에 완전히 넣었다. 나는 잠영하다가 머리를 물밖으로 빼고 혼잣말을 했다.
“아! 시원해. 보람이 있다. 보람이 있어.”
장사가 잘된 날은 힘이 나서 돌아갔고, 장사가 별로였던 날은 자기 전까지 몸이 축 처졌다. 돈 벌기란 참 어려운 것이었다. 혼자서 다 해야 하니 50명 넘게 온 날이면 진이 다 빠졌다. 지난 가을로 예를 들면 그렇게 바빴건만 순수익이 승마장 월 급여의 두 배가 채 못 되었다. 나는 차에서 〈눈물의 술〉을 안 튼 지가 오래되었다.
“커피가 맛있어요. 직접 로스팅하시나요?”
또는
“빵이 없네……? 청은 직접 담그시는 거죠?”
이렇게 묻는 이용객들, 특히 여자들이 있었다.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 분야의 일류 전문가들이 각고의 연구와 최고의 기술로 만드는 공산품이라고 나는 덧붙였다. 소설가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 소설가는 어떻게든 자기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다른 경우로는, 진열장을 둘러보다가 카운터 테이블 앞에 서서 이렇게 묻는 여자도 있었다. 그녀는 눈빛이 맑았으며 하얗고 몸에 들러붙는 칼라 티셔츠에 미끈한 다리를 다 드러내는 짧은 골프 치마 차림이었다.
“작가님이시죠?”
나는 소설가라고 대답했다.
“멋있으세요!”
어쩌라는 말인가……. 같이 온 남자가 뜨락에 있었다. 그녀를 굳이 미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몸가짐이 우아했다. 멋있는 것이 아니라 힘든 일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카운터 테이블 너머로 경청하는 태도였다. 예술을 하는 것은 하나의 저주며, 일반인들은 돈만 벌면 되지만, 예술가들은 오직 그것을 하지 않으면 돈을 많이 벌었어도 만족이 안 된다. 물론 재능을 타고나야 하지만, 재능만 있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못하고 살면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고, 술이나 마약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것을 하게 되면 그 이상 영혼의 충만감은 없다. 나는 에스프레소 추출 작업을 하면서 대강 이런 내용으로 말해주었다. 여자는 생각하면서 듣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는 마무리했다.
“고흐도 생전에 그림 단 한 점 팔렸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인류가 고흐의 그림들에서 영감을 얻고 있지요. 돈은 자신을 위해 벌지만, 예술 작품은 인류에게 남기려는 거지요.”
“부러워요.” 여자가 말했다. 나라고 좋은 여자를 보면 왜 감흥이 없겠는가. 밖에는 그 남녀의 하얀 독일제 고급 스포츠 유틸리티 차가 서 있었다. 나는 진열장 안의 내가 다 쓴 펜들에 빗대어 명품 펜이 좋은 글쓰기를 담보할 수 없듯 고급 차를 몬다고 훌륭한 인생은 아닌 것 같은 경우를 여러 번 겪어왔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교양미를 풍겼다. 물론 내가 평소 그런 긍정적인 이용객들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나는 왜 이 땅에 있는가. 그리워하고 싶은 것을 그리워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소설가이기나 한 것인가. 소설을 써야 소설가 아닌가.
나는 왜 카페로 가는 것인가. 돈 때문에 가는 것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은 생활의 원천이다. 돈만 있으면 차도 고칠 수 있고 밀린 세금도, 빚도 다 청산할 수 있다. 고맙게도 내게는 생산수단이 있었다. 나는 카운터 테이블 너머로 이용객들이 자리들을 꽉 채운 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만들어 놓았구나, 생각했다.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이었다. ‘문학적인 숲’ 역시 내가 써낸 작품이었다. 장사라는 것은 재미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여태까지 해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주 바쁜 날은 앉을 시간이 없어 예전에 돌아갔었던 왼 발목의 예리한 통증이 치고 올라왔다. 내 카페는 명소가 되었는가? 30대 중반쯤 여자의 말이었다.
“저이가 여길 그렇게 와보고 싶다고…….”
어떤 남자가 주문하면서 말했다.
“여기 그렇게 좋다고 그래서 왔어요.”
이용객들은 가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잘 쉬었다 갑니다.”
다른 카페에서 이용객이 이렇게 말하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식당이 많고 많지만, 막상 맛있는 집을 찾기가 어렵듯이 갈만한 카페가 드문 것이다. 그렇다. 어느 정도 명소가 되었다. 아니라면 이처럼 이용객 수가 계속 늘 수가 없다. 평일에는 골퍼들로 내 카페 이용객들이 더 많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나날의 그 승리감이라니! 나는 위편 카페 쪽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거기서 삶을 낭비하고 있는가. 주말은 시내에서 젊은 층이나 가족 단위가 움직이는데도 위쪽 카페와 반반쯤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인가. 아니었다.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 시간은 내 편이었다. 이용객들이 다 빠지는 시간이 되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든 커피를 마시든가 하면서 조금 쉬어야 했다. 무엇이든 급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책장의 단어와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서 문맥이 이어지며, 이용객이 더 오지 않아도 안정감 속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편안히 등을 파묻고 있을 수 있게끔 되었다. 그 같은 휴식과 평안과 즐거움을 나는 돌고 돌아서 다시 찾은 터였다. 책을 떨치고 일어나 인생을 살았었고, 이제는 중늙은이가 되어 다시 책으로 돌아와 앉은 것이었다. 이전에 이 의자에 앉아 몇 권의 책을 읽었던가. 승마장에서는 편안히 앉아 책이라도 읽을 수 있었던가. 나는 《월든》처럼 자족하며 화목난로 옆에 앉아 자립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용객들은 고맙게도 들러 음료값을 지불했다. 그즈음 나는 1914년에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배가 난파되어 유빙 위에서 생존 투쟁을 이어가다 634일째 만에야 전 대원이 구조된 이야기의, 사진이 많이 들어간 커다란 책을 읽고 읽었다. 지금껏 나는 잘 항해해 온 것 같았다. 하루는 정말 짧았다. 그리고 인생도 짧은 것이다. 느른해진 나는 결제 단말기를 끄며 속으로 말했다.
‘오늘도 내가 이겼구나!’
이제 된 것이었다. 카페 하나만 이렇게 만들기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살 때, 다른 마음을 먹고 있어야지 짐짓 정신적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아까웠나. 내가 겨우 그 한 가지만 해야 할 만큼 능력 없는 존재였던가.
내가 커피 일하는 것을 이용객들이 보면, 커피를 맛있게 내리거나 라테아트를 잘 치면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 감흥이야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카페? 의미 없다. 커피 내리는 따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돈도 좋으나 혼자 바빠서 힘들 때는, 이제는 위쪽 카페가 문을 닫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의 3분의 1쯤이라도 벌면서 버티면 어떻겠나. 이 산골짜기에서 그래도 나 혼자면 적적하지 않나. 하루 쉰 다음 날 카페를 가려는데 다시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사도 돈은 벌 지언정 시간을 죽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역시 인생에 남는 길이 아닌데,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카페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김없이 그 실존주의의 시간이 되었다. 내 실존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일모레면 나이 60인데, 소설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행복은 정리해서 적는 데 있다. 고치고 다시 고치는 작업의 연속일 테지만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벅찬 그 충일감. 돈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참 일을 해야지!’
나는 이상하게 휴식이 좋았다. 사람들은 커피 등을 마시면서 쉬려고 카페로 간다. 나도 커피를 마시면서 쉬려고 내 카페로 간다. 그리고 이제 날마다의 그 실존주의의 시간에 화목 난롯가에서―그 소설을 잇기에 앞서서―자신감을 가지고 당장 길어 올릴 수 있는 이야기부터 쓰기로 했다. 승마장에서라면 불가능할 것이었다. 소설가가 직접 겪고 그 체험을 남길 수 있어야지 허구만 쓰다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얼마나 허무한가. 나는, 읽다가 가슴에 올려놓고 자고 싶은, 밑줄을 많이 그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결국, 카페가 남지 않고 카페를 쓴 내 작품이 남을 것이었다.
젊었을 때까지는 나는 내가 신(神)이거나 적어도 신과 같다고 여겼다. 언젠가는 늙고 약해져 죽으리라고는 일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은 계속 들끓었고 온몸에 기운이 뻗쳐 어떨 때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종일 중노동을 해야 하는 날에도 나는 신처럼 몸을 움직였고, 그렇게 몸을 혹사한 날도 새벽녘까지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조금 눈을 붙였다가 뜨면 다시 몸에 기력이 충만해졌다.
소설가가 소설로서 돈을 벌기는 어렵다. 따라서 카페를 이만큼 만들어 놓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이제 카페에 더 좋게 해 놓을 것이 없었다. 카페 시설물 중에 앞으로 무엇이 고장 나거나 파손되더라도 혼자서 만들어 보았으니 걱정되지 않았고, 큰돈 나갈 염려를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비수기라 장사는 덜 될 터였다. 관계없었다. 그만큼 글을 많이 생산하면 되는 것이다. 모르기는 몰라도 소설을 써 가다 보면 그날 얼마만큼의 글을 생산한 뒤에는 예전에 한 잔이라도 팔고 나서 안도하며 점심을 먹었듯이 이용객이 없으면 인생을 버릴까 봐, 돈이 있으면 돈을 빼앗기면서 아무것도 못 할까 봐 또한 무섭지 않을 것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나이 스물여섯에 어쩌다가 다친 다음 허리 왼쪽으로 통증이 오기 시작했는데 그 다리에 힘이 가지를 않았다. 사십 살이 되었나 싶더니 마흔다섯 살도 넘어 버렸다. 내일모레면 오십인데 무슨 일로 급박한 동작 중에 왼 발목이 돌아갔고―그것도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통증이 끔찍했다. 반깁스하고 난 다음부터는 오래 걷거나 계속 서 있기 힘들게끔 되었다. 발목은 아직 부은 채로 승마장에 일하러 다닐 때였다. 아침 7시 30분, 늦어도 4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내 집은 유럽의 성을 닮은 4층 건물인데도 그 시절은 그 성을 누려볼 수가 없었다.
전날 장사가 어이없게 안 되었었거나 아침부터 굵은 비가 내리는데 종일 비가 예보된 날처럼 카페에 가기 싫을 때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나는 카페로 가게 될 것이다.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오롯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희망이 아니다. 그렇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쓴 다음에는, 내 사업은 소설을 쓰는 것이었으니 카페야 망해도 그만이다.
승마장 가는 길에 나는 때때로 불행했다. 그쪽에서 ‘말 일’이라고 하는 승마장 노역은 과도하게 피로했다. 나는 승마 교관―다른 호칭으로는 코치―이었으나 마필관리사를 두지 않아 내가 마방(馬房)도 매일같이 열두 개에서 열여섯 개까지 치워야 했다.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고역 중 다섯 번째 난사가 30년간 3000 마리의 가축이 싸놓은 아우게아스 왕의 마구간을 치우는 일이었다.
제 월급을 받는 노동력의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짜 내겠다는 심보의 승마장 대표가 패악질을 벌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 북부 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스 군단의 군단장이었으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