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1부
그는 눈 속으로 그렸다. 잠겨진 방, 4단 책꽂이에 빼곡히 꽂혀있던 책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한 평 반 정도 될까 한 그의 방 한 귀퉁이에서 커피포트가 물 끓는 소리를 냈다. 그는 김이 올라오는 물을 따라 봉지 커피를 탔다. 따습고 쌉쌀한 향기가 빈 내장을 훑었다. 라면 골판지상자 몇 개는 이미 열어 놓았지만, 커피잔을 비운 후에도 그는 책꽂이에서 그것들을 뽑아낼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다. 작고 고독한 공간에서 도망자와 같았던 시간들을 함께 버텨준 것들이었다. 손때 묻고 퇴색한, 갖가지 표지의 그것들이 그의 친구였고 여자였다. 세상이란 생각보다 크고 넓으며, 깊고, 또 굉장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그것들로부터 배웠다. 그는 굳건해지고 싶었고 그것들에 파묻혔다. 먼 도시의 길거리들과 교감 없는 대화들에 지쳐버린 몸뚱이로, 그렇게 그 방에 틀어박혀 1년 동안 책만 읽어댔다. 오랫동안 그 책들을 싸매두고 이제 산기슭을, 고독하지만 호젓했던 사상과 예술의 숲을 그만 내려가야 한다. 후, 하고 체념하며 그는 가난한 그것들을 라면 골판지상자에 담고 나서 누런 박스테이프로 봉했다.
“가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그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부친의 뒤편, 큰방 한쪽 벽에 꽉 들어찬 책장은 천여 권의 책들로 빼곡했다. 버섯 농사는 성공적이었고 이젠 면 농협의 VIP 고객이 된 부친은, 다른 건 몰라도 어디 출타했다가 돌아올 때마다 어린 아들에게 신문지에 싸인 책 한 권씩은 건네주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책을 마음 편히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걸 외우고 풀고 나서 검사를 받느라고 바빴기 때문이었다.
“……상관(上官) 말씀 잘 듣고 군 생활 충실해라.”
부친은 그렇게만 말했다. 부친의 책장에서 감사패들이 번들거렸다.
미끄러져 가는 버스에서 그는 휙휙 지나쳐 가는 특색 없는 야산들과 촌락과 들판을 내다보았다. 목적도 의미도 없었던 22년의 세월이었다. 그는 그런 세월을 별다른 미련 없이 지나쳐 보내는 자신의 막연한 기분을 발견했다. 견딜 것이다. 갈 수 있는 한 가장 힘든 부대로 갈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뛰고 구르겠다. 그러면서 이 몸서리쳐지는 젊음을 잊어버린 후에 싱긋이 웃을 테다.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 난 강해질 것이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뚫고 새로 솟아날 삶의 환희를 느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기대했었다. 소낙비 속에 펼쳐진 각개전투 다음 날은 신병교육대에서의 마지막 사격측정이 실시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