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막사 앞에서 그에게 3소대의 한 이등병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귓전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한 달 고참이라고 하는 그의 조그맣고 귀염성 있는 얼굴은 이상스레 거무튀튀했다. 원래 까무잡잡한 게 아니라 시커멓게 낯빛이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세면장 들어가면 안 돼. 나 하는 거 잘 보고 있다가 상병 이상 고참들 다 나오면 그때 들어가는 거야. 알았지?”
그 이등병의 조그맣고 쉰 목소리는 긴장에 절어있었지만 친절했고 호의적이었다.
“옛, 이병 나·우·권! 알겠습니다.”
그가 바로 크게 외치자 그 이등병이 덜컥 놀랬다.
“쉿! 조용히 해. 아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할 때는 작게 대답해. 나는 아직 군기 잡을 짬밥도 아니고 네 바로 위라 이것저것 가르쳐야 한단 말야. 나에게 그렇게 크게 관등성명을 대면 고참들이 날 빠졌다고 한단 말야.”
까무잡잡한 이등병의 근심 어리고 조바심 내는 말들은 엄청 빨랐고 그사이 침도 몇 방울 튀었다. 그는 귓구멍이 간지러웠다. 그러고 나서 그 이등병은 곁눈질로 시종 흘낏거리며 누군가의 출현을 경계했다. 그는 손정원이라고 했는데 성은 달랐지만, 그가 예전에 한 친구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그 친구의 여자친구 이름이었다. 시키는 대로 그도 작고 빠르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손정원 이병님.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날 때까지는 세면장이나 화장실 같은 데서 동기들 봐도 절대 아는 체하지 마. 그럼 너희 군번들 때문에 전체집합 당하게 돼.”
그런 일을 당해 본 적 있는 듯한 손정원이 막사 안쪽으로 목을 늘였다.
“이제 다 했나 보다. 지금 들어가자.”
산악구보는 굉장했었다. 신병들이 신병교육대에선 들어보지 못했던 괴상하고 해괴한 군가들을 엄청난 속도 속에서도 박수까지 쳐대면서 무슨 박쥐 떼들같이 악에 받쳐 깩깩댔다. 웃통을 벗은 그들의 목덜미에 툭툭 불거지는 힘줄을 보며 신병들은 정신없이 쫓아갔다. 군가는 전혀 음정이 없었다. 낼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로 그냥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숨을 쉴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모르는 군가라 못 따라 부르지 않았더라면 신병들은 결국 따라붙지 못했을 터였다. 긴장에 옥죄던 그의 숨통도 600 고지 정상의 일조점호 구보 반환점을 향해 뛰어오르면서부터는 금방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괜히 담배를 배웠었다고 그가 절망할 때였다. 후미의 욕설들 속에 여럿이 누군가를 패대는 소리가 들렸다. 오기식이 결국 첫날부터 낙오한 것이었다.
구보대열은 40 여분 만에 돌아왔다. 그의 허연 몸통은 온통 땀으로 도배됐는데 선임병들은 말짱했다. 그냥 이마에서 땀을 좀 훔쳐낼 뿐이었다. 그들은 첫인상과는 달랐다.
상당히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손정원을 따라 그는 내무반 페치카 옆쪽의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세면장엔 두 개의 출입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가 방금 지나온 1 내무반과 통했고, 다른 문은 1, 2소대가 쓰는 2 내무반에서 출입할 수 있었다. 하늘색 타일의 기다란 세면대 벽에는 전부 다섯 개의 수도꼭지가 삐져나와 있었고 그 위에 하나씩 동그란 거울들이 붙어 있었다. 손정원의 눈짓에 따라 그가 막 바지를 내렸을 때였다. 우람한 근육의 병장이 거울 속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거울 속 근육의 눈이 땀으로 짝 달라붙은 그의 하얀 팬티에 고정됐다. 뒤돌아선 근육이 다시금 확인했다.
“어라, 이 쉐―끼 봐라. 싸제(社製) 빤스를 처 입고 왔네. 허―참, 요새 신병 쉐끼들은 ×나게 빠졌어요.”
근육은 신경질을 내며 2 내무반 쪽 문짝을 쾅, 걷어차고 나갔다.
40 여일 전 보충대에서 두 장씩 흰 군용 팬티를 받았었다. 그의 팬티 두 장은 신병교육대의 흙탕물에 누렇게 절여졌고 늘어진 고무줄 때문에 자꾸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걸 그냥 그대로 입었어야 했다. 그가 머리를 굴려 퇴소 전날 외박 때 읍내 군장 점 ‘전우사’에서 한참 신경 써 군용과 똑같은 색, 똑같은 모양으로 사 입은 것이었다. 그는 흙물에 찌든 팬티를 여관방 휴지통에 버리면서 왠지 찜찜하긴 했다. 노란 고무줄이 들어간 허리 밴드 안쪽에 ‘보훈’이라는 탭이 붙은, 필시 어떤 엉터리 보훈단체에서 만든 군용 팬티의 질은 엉망이었다. 그가 구입한 팬티는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브랜드였는데 그 질 좋은 팬티의 찰지고 널찍한 밴드 밑에 쪼그만 탭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근육이 잡아낸 게 바로 그거였다. 그 탭엔 빨간색 알파벳 딱 세자가 자수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우권아. 그 빤스 빨리 벗어서 안 보이게 버려. 아니, 날 줘. 내가 버릴게. 이것 때문에 무슨 일 안 생기면 좋겠는데. 내 따불빽(더플백)에 군용 짱박아 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 입어.”
손정원은 혹시 팬티 한 장으로 인해 자신과 간도 크게 사제팬티를 껴입고 온 후임병에게 닥칠지도 모를 어떤 후과(後果)를 심히 근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