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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대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by 김욱래

오전엔 내무반이 휑했다. 대부분 인원이 부대 담장 주변 제초작업에 나가고 없었다. 내무반 침상 끝, 그 AK 총기대 옆 제 관물대에 혼자 기대앉아있던 3소대 ‘정보 작전병’ 최재필이 손짓만 까닥까닥해서 그를 불렀다. 최재필은 부대의 일병선임이기도 했다. 장신의 쵀재필은 한쪽 무릎을 접어 세운 다리도 기다랬다. 희고 길쭉한 최재필의 얼굴은 몇 군데에 여성스러운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댄 직후 그게 타느라 관자놀이나 볼로 열이 오르는 것처럼, 또 어쩌면 막 수음을 마친 뒤라 얼굴로 올랐던 열을 미처 가라앉히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최재필은 말하면서 눈썹을 짜증스레 자주 찡그렸다. 얄따란 눈썹은 그럴 때마다 잔물결처럼 이지러졌다. 최재필은 가냘프고 신경질적인 눈썹의 요동들 때문에 제 성정을 강해 보이도록 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집살이에 치를 떠는 새댁처럼 모든 것에 짜증이 나 있는 듯했다.

“가족사진 있지? …없어?”

최재필의 얇은 눈썹이 다시 찡그려졌다.

“할 수 없지. 사진은 빼고… 좌우명 뭐야?”

그는 최재필의 작고 빠르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좌우명 말입니까?”

“여기 주기표에 써야 한단 말야. 다른 것들 안 보여?”

최재필이 짜증을 냈다. 이상하게도 일, 이등병들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최재필 역시 어떤 무거운 오랫동안의 가슴앓이에 지쳐있는 듯했다. 그게 뭐든 최재필의 짜증을 자꾸 유발시키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고, 또 그는 간신히 그걸 감추려 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强하게 하기 위하여


그게 쪽지에 써서 그가 최재필에게 건넨 좌우명이었다. 그가 둘러보니 합죽이 병장의 것은 가관이었다.


언제나 영화처럼!!!


그는 최재필의 짜증에 부랴부랴, 앞으로 자신의 28개월 며칠 동안 필요할 몇 마디를 즉흥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그는 ‘강’ 자는 한자로 써 주길 원했는데, 최재필이 또 짜증을 부렸다―최재필은 ‘굳셀 강’ 자를 몰랐다―. 그의 더플 백 주기표 하단에 굵직한 유성 매직펜으로 길쭉하고 여성스러운 필체의 좌우명이 써졌다.


그의 더플 백은 사진 칸만 공백으로 두고, 좌우명 위에 매직펜으로 빨갛게 칠한 한 개짜리 막대기 옆에 이름이 써진 주기표가 전면으로 오게끔 관물대에 밀어 넣어져 각이 잡혔다. 주기표의 빨간 막대기 한 개 위로는 세월로 하나씩 채워가야 할 공백 세 칸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것은 맨 밑에 눌려있는 빨간 막대기를 뭉개버리려는 듯했다.

개인 관물대의 폭은 신병교육대보다 약간 더 좁아 60 센티미터 정도였고 높이도 낮았다. 각자에게 배분되는 침상 폭도 관물대처럼 더도 없이 딱 60 센티미터일 것이었다. 이제 그는 앞으로 28개월 며칠 동안 취침시간이 되면 자신의 관물대 앞 60 센티미터 폭의 침상바닥에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또는 다른 어떤 상태의 몸뚱이를 신세 지게 될 터였다.

최재필은 그에게, 더플 백과 관물대 상판 사이의 틈에다 단단히 갠 군복과 체육복을 끼워 넣은 뒤 각을 잡는 것, 남은 우측공간에 양말이나 속옷 만 것, 고무링 등 자잘한 물건을 정리한 뒤 세면 백으로 막아 세워 안쪽이 바깥에서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시키는 대로 하니 그의 관물대는 빈틈없이 꽉 찼다―, 배낭 정돈 및 방탄헬멧 위에 얹는 군모의 각 잡기 등등, 그런 잡다한 것을 책을 엄청 빠르게 읽어대는 것처럼 가르쳤다.


최재필은 막 들어온 신병이 거쳐야 할 15일간의 ‘신병 대기’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늘어놓으며, 그 하나하나를 명심해야 하며 결코 간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랬다.

일조점호, 식사, 교육, 작업 집합 등 모든 집합 시에는 제일 먼저 사열대 앞으로 뛰어나가 기준을 잡아라. 취사장에서는 고참들이 밥을 타다 줄 것이다. 넌 그냥 먹으면 된다. 밥을 먹은 후엔 ‘짬통’에 ‘짬’을 시키고 식기세척장으로 간다. 식판은 ‘식기 조’가 닦는다. 경례해라. ‘단결! 수고하십니다.’ 상병들이 식기 조다. 식판은 우리 소대 고참에게만 줘라. 나갈 때는 식기세척장 입구에서 다시 경례한다. ‘단결! 수고하십시오.’ 혹, 네가 지나가는데 고참들이 작업을 한다. 앞으로 가 멈춰 서서 경례한다. ‘단결! 수고하십니다.’ 다시 경례하고 지나간다. ‘단결! 수고하십시오.’ 고참들이 내무반에서 근무를 나간다. 빨리 일어나서 경례한다. ‘단결! 수고하십시오.’ 근무를 마친 고참들이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경례한다. ‘단결! 수고하셨습니다.’ 단결. 단결. 단결. 단결. 단결……. 어차피 너에겐 전부다 고참이다. 무조건 경례해라. 관등성명 앞에 ‘옛’ 자는 빼라. 여긴 신교대가 아니다. 관등성명은 딱딱 끊어서, 배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최대한 크게, 목이 쉴 정도로 외쳐야 한다. 목이 쉬는지 내 보겠다. 고참이 ‘얘’ 해도 관등성명, ‘인마’ 해도 관등성명, 툭 쳐도 관등성명, 톡 찔러도 관등성명, 맞을 때도 한 대마다 관등성명,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관등성명, 슬쩍 봐도 관등성명은 자동으로 튀어나와야 한다. 식사, 교육, 작업 때문에 같이 밖으로 나갈 때 외에는 내무반을 벗어나지 마라.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우리 소대 네 바로 위 고참에게 보고해라. 정원이 없으면 바로 그 위, 이런 식으로. 막사 밖에 나갈 땐 반드시 전투화 끈을 매야 하고 뛰어다녀야 한다. 항상 침상 위에선 차렷 자세로 앉아있어야 한다. 넌 ‘침상 조’다. 정원이가 침상정리 할 때는 일계장*1 앞에 서서 걔 한 동작, 한 동작을 새겨야 한다. 군복은 전투복, 모자는 전투모나 작업모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작업모라고 한다. 군화는 전투화, 운동화는 활동화다. 신교대 용어를 쓰지 마라. 담배 피우려면 막사 뒤로 가라. 거기에 쓰레기통이 있다. 거기에서만 피워라. 고참에게 혹시 담배를 한 개비 빌려달라거나 어쩌거나 하면 그날로 넌 꼬인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보고해라. 다시 말하지만, 관등성명이 곧바로 튀어나와야 한다. 모르는 건 손정원에게 물어라. ‘쫄따구’가 있는데도 그 위 고참에게 뭘 묻는다든지 하면 네 군 생활 초장부터 꼬인다. 신병 대기 동안 우리 부대원들―전 부대원들 말이다―의 이름, 계급, 서열, 소속, 직책을 외워야 한다. 하사가 병장보다 높은 게 아니다. 우리는 ‘짬밥 수*2’로 친다. 병장이 짬이 더 많은데 짬 낮은 하사의 말을 들으면 그날부로 넌 죽는다. 병장과 반장들의 ‘짬밥 수’를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너를 담당할 상병이 서열과 군가가 적힌 수첩을 줄 것이다. 수시로 외워라. 단, 고참들이 보는 데서는 하지 마라. 고참들이 없을 때나 화장실에 가서 해라. 그리고 군대에선 축구가 생명이다. 다른 소대 ‘왕고’라도 무조건 부딪혀라. 너 공 잘 차냐? 혹시 잘 못 차더라도 쉬지 말고 뛰어라. 네 군 생활이 처음부터 꼬이느냐 아니냐는 신병 대기 15일에 달렸다. 최재필은 그러면서 가냘픈 눈썹을 자꾸만 찌그러트렸다. 이런 제 레퍼토리가 이젠 지겨워진 듯했다.




*1 휴가나 외출 시에 입는 ‘A급’ 전투복을 보관하는 곳.

*2 군 생활한 기간을 일컫는 군대 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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