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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루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by 김욱래

대장면담이 끝난 신병들이 1 내무반으로 들어왔을 때, 거기엔 3개 정찰소대 전원이 양쪽 침상으로 줄지어 앉아 무슨 그림 알아맞히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장들과 비교적 고참 급의 병장들은 서정원이 섬세하게 각을 잡아놓았던 모포들을 주저 없이 뭉개버리곤 반쯤 드러누워 있었고, ‘짬’이 좀 낮은 병장 하나가 짝다리를 짚고 서서 뭐라고 떠드는데 제 말의 장단에 맞춰 한쪽 다리를 떨어대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어떤 호소임 직했다. 저보다 ‘짬밥’ 많은 고참이 시켰기 때문에 이러곤 있지만, 저도 분명히 병장이니까 결코 녹록히 보면 안 되고, 이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짬밥’이라는 것을 저나 다른 병사들에게 증명하기 위한 제스처 같았다. 병장은 한 손에 수십 장의 플라스틱 카드를 잡고 그중에 한 장씩을 슬슬 장난치듯 건성건성 좌중에 빼 들어 보였다.

그가 보기에 그 병장의 태도는 무슨 교육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교육을 하는 척만 하며 시간을 때우려는 것이었다. 병장이 빼든 적 장비식별 카드에는 북한전투기나 수송기, AN-2기 같은 저공 침투용 글라이더, 각종 헬기, 전차, 야포, 방사포, 장사포 등의 흑백사진이나 북한군의 군복과 계급장 등의 컬러 그림들이 인쇄돼 있었고, 뒷면에는 그 각각의 제원과 탑승 인원, 탑재 무기, 발사속도와 도달거리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병장은 그걸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저 늘어지게 읽어댔고 그건 졸음만 유도하고 있었다. 뭉개진 모포에 기대 누운 몇을 제외하곤 모두 차려 자세를 곧게 유지해내고 있었지만, 그중에 다수는 이미 눈동자가 풀린 채 어떤 명상에 깊이 잠겨있었다. 뒤쪽에서 반쯤 누워있던 이들이 고요히 삼매경에 든 이들의 등짝을 가끔씩 밀어 찼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아침과 마찬가지로 집합됐다. 복싱선수 상병 주임이 이번에는, 오전 교육 중에 감히 ‘아주― 조는 새끼’가 있었다고 서열을 준수하며 차근차근 차례차례 패 댔다. 또 신병들만 때리지 않았다.

“너네들은 말이에요. 신병 대기 끝나면 아주― × 나게 때려줄게요.”

조병주는 그렇게 말하며 침을 흘렸다.

오후 1시부터는 연병장 평탄작업이었다. 그에겐 다행이었다. 연병장 상태는 축구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상병들은 삽이나 곡괭이를 잡았고 일, 이등병들은 돌이나 자갈을 담은 담가를 2인 1조로 들고뛰었다. 오후는 대차게 뜨거웠다. 온통 땀으로 범벅된 그는 뛰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게 뜨거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잘 느낄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 후의 취사장 집합에서는, 며칠 사이 일석점호정리 상태를 확인하던 병장 하나가 침상 밑에 정렬된 전투화 뒤쪽에서 물에 풀려 터진 담배꽁초를 하나 발견했다는 사유로 다시 샌드백 치는 소리가 울렸다. 특히 바닥 조 일병들은 더욱 신나게 처맞았다. 여전히 신병들은 그 짓거리를 관람만 할 수 있었다. 차라리 같이 맞는 게 더 나을 성싶었다.


신병들은 각자 잠시 후 모처에서 따로 맞을 수 있었다. 서정락이 즐겨 애용하는 곳에서 그는 돌대가리라는 핀잔과 함께 따귀 10여 대에다가 목에 서너 방을 맞았다. 서정락은 그를 개처럼 길들일 심산이었다. 서정락은 제 눈빛 한 번이면 그가 오줌을 찔끔거리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 새끼! 멀쩡하게 생겨 처먹었으면 다니? 내가 고참새끼들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지? 내가 오늘 같은 날이 올 때까지 얼마나 죽을 만큼 참아내며 버텨왔는지 네놈은 모를 거다. 그래, 세상은 공평한 거야. 태권도 3단에다가 번듯하게 생겨 먹은, 거기다 대도 꽤 세 보이는 이런 놈을 패 조져서 길을 들이는 것, 아! 이 얼마나 뿌듯한 일이냐. 그런데 이 개새끼 때문에 전번 족구장에선 × 나게 쪽팔렸잖아. 건방진 새끼!

어쩌면 서정락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들과 같이 신병들이 비참하게 길이 들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야 모두 공평한 것이었다.


일석점호 직후였다. 이번엔 열외 없이 그도 다른 이들을 따라 관물대 위에 발을 건 다음 침상 끝 선에 맞춰 머리를 박고 열중쉬어를 했다. 그런데 군대가 많이 좋아지기는 한 것인지 그가 풍설로만 들었던 치약 뚜껑이나 군번줄에다 머리를 박게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심하게 목이 뻐근해졌고, 의도하지 않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잠깐씩 쉴 수가 있었다. 병장 하나가 욕을 뱉으면서 맨 끝의 옆구리를 걷어차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밀리며 연달아 우당탕거리며 쓰러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짓거리는 10시 반쯤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욱신대는 몸뚱이를 눕히고 침낭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그래도 더운지를 몰랐다. 팬티만 입은 다리에 땀에 젖은 침낭 내피가 척 달라붙었다. 그는 눈을 꾹 감고 속으로 말했다. 이제 지옥 같은 하루가 또 갔다. 제대는 하루 치만큼 가까워졌다. 잠이 들 때까지는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나는 자유다. 아……! 제발 이 밤이 길고 길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걱정하지 말자. 죽이기야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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