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는 의자에 앉은 채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어딘지 모르지만 주변이 어두웠다. 의식이 돌아오기 전까지 기억들이 조각난 듯 그녀의 머릿속을 표류했다. 민희는 자신의 머리를 표류하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붙잡아 이어보려고 했다. 기억의 추적은 자신이 지하실로 내려온 것부터 시작했다. 책상 서랍에서 물건을 챙기고 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불이라도 켜진 듯 주변이 환해졌다. 기억의 끈은 거기에서 끊겼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지하실로 내려오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마주했던 습하고 역한 냄새가 그녀를 덮치고 있는 어둠 속에서 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그녀가 내려왔던 지하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기억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지하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의자에 몸이 묶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무의미했다. 오히려 과도한 움직임 때문에 그녀는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치는 충격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자신이 강한 충격과 함께 기절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쓰러지기 직전 자신이 희미하게 본 사물이 기억이 났다. 악취가 심하게 나던 크고 긴 검은색 물체였다. 눈이 희미했지만 그녀는 단번에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건 사람의 몸이었다. 그 장면이 머릿속으로 연출되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애써 구역질을 참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빛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한발 한발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였다. 누구일까? 민혁일까? 아님 문성식?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누구? 민희의 뇌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의문의 발소리는 그녀 뒤에 멈췄다. 이윽고 민희는 발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넘어져있는 민희를 의자 채 일으켰다.
「마음이 아프네요」
목소리의 주인은 민혁이었다. 왠지 목소리가 슬펐다.
「이렇게까지 하려고 한건 아닌데 너무 했네요. 그녀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할게요. 」
그는 묶어있던 끈을 풀었다. 민희는 자유로운 몸이 됐지만 몸이 굳어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민희 씨라도 여기는 내려오면 안 되는 곳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내려왔을까?」
그는 민희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면 내가 더 슬프잖아.」
민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쓰다듬는 손에 힘이 느껴졌다.
「아파요」
힘이 담긴 그의 손에 민희는 고통을 느꼈다.
「나도 아파. 너 때문에. 왜 이랬어. 날 못 믿은 거야? 널 위해 내가 한 일들이 마음에 안 든 거야? 내가 널 고통에서 구원해준 걸 잊은 거야? 너에겐 나밖에 없다는 거 몰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격양된 그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민희는 겁이 났다. 일단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미안해요. 근데 왜 내가 당신을 못 믿겠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 알잖아요. 시력이 안 돌아오는 게 조금은 조급했나 봐요.」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나에게 기대감을 주고선 결국에는 날 배신하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변한 게 없다뇨? 내가 언제 민혁 씨를 배신했다고요. 병원에서부터 난 당신을 언제나 믿었다고요」
「병원에서부터? 그래 역시나 난 너에게 하찮은 존재였던 거였어. 혹시나 했던 내가 바보지」
「화내지 말아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요. 시력을 찾아 당신의 얼굴을 보고,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그럼 보게 해 줄게 내 얼굴을 과연 네가 기억할 수 있을까? 나를?」
민혁의 말과 함께 목에 무언가를 찌르는 걸 민희는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