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표를 떼고 싶은 날들
네 시 반, 병동은 항상 깨어 있다.
차팅을 마치고 자리를 둘러보면
세 번째 식은 커피가
적막 속에서 조용히 식어가고 있다.
늦은 새벽,
병동의 불빛은 여전히 밝다.
컨넥할 수액, 시린지, 바이탈기.
널브러진 물건들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다 보면
내 자리엔 반쯤 마시다 만
식은 커피 한 잔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 반잔의 쓴맛이
새벽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숨을 고르고 창밖을 바라보면
병동 밖은 여전히 어둡다.
가끔은 뛰어나가고 싶은
묘한 충동이 스칠 때도 있다.
창가에 비친 병동 복도,
그 끝의 불빛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늘 새벽도 길겠다는
아득한 신호처럼 남는다.
이 병동에서 맞은 새벽만, 열세 해째다.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른 건
작년 봄이었다.
망을 쓰는 게 지겨워서였고,
늘 같은 모양으로 묶이는
내 모습이 싫어서였다.
그런데 머리를 자르고 나서도
가벼워진 건 머리카락뿐이었다.
요즘은 내 이름이 불리는 것도 싫다.
그래서 가끔 이름표를 떼고 일한다.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책임감과 감정이
잠시나마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문득 생각한다.
‘오늘은 누군가의 손이 되어도 괜찮다.’
시간은 흐르지만
병동의 공기는 늘 같다.
수액이 떨어지고,
기계가 알람을 울리고,
환자의 소리가 천천히 이어진다.
알람이 울리면 손이 먼저 움직인다.
마음은, 조금 늦게 따라온다.
새벽 네 시 반의 흔들리는 불빛이
내 안에 잠겨 있던 작은 울림을 비춰낸다면,
다섯 시 반의 불빛은
나를 다시 현실로 이끌어 올리는
조용한 손짓 같다.
“선생님, 산모님 배뭉침 있으시대요.”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CST 모니터에는
일정한 곡선 대신
잔잔한 파형이 흐른다.
“아가 잘 놀고 있네. 다행이다.”
새벽 공기.
기계 소리.
작은 웃음 하나.
그리고 식은 커피 한 모금.
새벽은 여전히 차갑지만,
우리 손끝은 늘 따뜻하다.
식은 커피를 삼킨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불빛은 여전히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