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는 번역가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고등학교 수업이 끝난 뒤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을 쫓아갔던 적이 있어요.
저는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기에 마음 조리며 말을 꺼냈죠.
그러자 선생님은 저를 한번 쳐다보고는
작게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얘야, 번역가는 공부를 잘해야 할 수 있는 거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교실로 돌아갔어요.
잠시나마 <반지의 제왕>의 자막을 단
이미도 씨 같은 번역가가 되는 상상을 했었는데,
주제를 모르고 용기를 낸 저를 원망했지요.
그리고는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긴 내가 뭐라고. 나는 공부도 잘 못하는데, 뭘’
그날 이후 번역가라는 꿈은 남이 보지 못하게
마음속 어딘가로 밀어 넣었어요.
이후로도 비슷한 일들을 겪으며 튀어나온 부분을 잘라내고,
삐져나온 구석을 두드리는 법을 배우게 됐죠.
그렇게 좋아하는 것보다는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걸 우선 시 하게 됐습니다.
‘좋아하는 걸 하는 건 사치’라는 말에 동조하며,
규격화된 자본주의 전사의 길을 따르게 된 거죠.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알 수 없게 된 것은
그렇게 가치관을 죽여온 결과였어요.
자신을 이해하는 개념을 ‘자기 해상도’라 부른다면,
저는 해상도가 현격히 낮은 사람이 되어 있었죠.
회사 일에 적응하며 일상에서
조금씩 생각할 여유가 늘어나면서는 더욱 두려워졌어요.
평생을 텅 빈 인형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면서요.
그러던 중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게 됐어요.
‘행복이란 시간을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확신이 됐고,
저는 삶이 불행으로 치달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어요.
저 글귀대로라면 좋아하는 걸 모르는 저는
영영 행복할 수 없는 거니까요.
절망감에 한참을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산 결과가 이거라니.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죠.
관점을 조금 다르게 해 봤어요.
'사회에 맞추기 위해 저 자신을 바꿔왔다면,
반대로 그렇게 바꿔 낸 자신은 남아있는 게 아닐까?'
분명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는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우선 일을 열심히 해보기로 했어요.
혹시 알아요? 일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