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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Apr 29. 2018

너는 오늘만 사니

데일리 다이어리는 못 쓰겠어서 먼슬리 다이어리 쓰는 이야기

예전에는 정말 줄만 그어진 노트를 가지고 말 그대로 일기를 쓰곤 했는데, 몇 달 정도 쓰고 나니까 좀 아쉬운 점들이 생겼다. 굳이 비유법을 쓰자면 초점이 너무 그 날 하루에만 맞추어진 느낌이랄까. 85mm 망원렌즈 하나만 들고서 골목길 여행을 떠나는 꼴이라면 적절할 것 같다. 조금 갑갑했다.


물론 하루하루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일기라는 게 애초에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일 테니까. (아님 말고.) 하지만 일상을 정리하는 방식에 데일리함이 전부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살면서 일기 좀 쓰다 보면 일일 단위의 무한한 동시에 유일한 연속이 답답해지는 때가 온다. 하여튼 나는 그랬다.


물론 골목길에서도 망원을 쓸 수는 있긴 하지만 요거 하나만 들고 다니면 꽤 깝깝할 거다. 그러고 다녀봐서 안다.


그래서 다이어리 두 개를 쓰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데일리 다이어리 하나와 먼슬리 다이어리 하나를 함께 쓴다. 물론 지금 쓰는 데일리 다이어리에도 월간 달력이 앞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내 손에 든 먼슬리 다이어리는(다른 먼슬리 다이어리도 다 이런지는 잘 모르겠어서 한정을 지었다.) 달력 뒤에 일일 구분이 가능한 페이지 대신 그냥 격자무늬 메모란이 몇 장 붙어 있는 게 다라서 두께가 훨씬 얇다. 


때문에 지금 가진 먼슬리 다이어리는 일일단위 결산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디테일이야 어찌되었든 두 개의 용도가 상당히 다르게 설계되었다는 소리다. 사실 이름 딱 보고 모르는 게 웃긴 거지.


지난 겨울부터 그렇게 해 왔으니 두 개의 다이어리를 들고 한 계절을 지낸 셈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게 쉽다고, 데일리 위주로 일기를 쓰게 될 걸로 솔직히 예상을 했다. 갑갑하다고 해도 일기 그 자체의 본질이 변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다고 해야 하나. 성실함이야 논외로 치고 당장 초등학교 일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해왔던 건데. 신기하게도 예상이 맞아떨어지지를 않았다. 난 요즘 데일리 다이어리를 거의 꺼내지 않는다. 대신 무슨 일이 있으면 먼슬리 다이어리를 꺼낸다.


내가 먼슬리 다이어리를 쓰는 방식은 이러하다. 달력에다가 월별로 중요한 일정을 적고, 그 달의 중요한 할 일 따위를 적고. 그리고 뒤편의 메모란에다가는 그냥 아무거나 쓴다. 글감이 떠오르면 글감을 적고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면 가고 싶은 곳을 적는다. 여행 계획을 적기도 하고 약속 잡을 사람을 적어 놓기도 하고. 어떤 물건을 봤더니 좋아 보이더라, 그런 것도 적어 두고. 그냥 날짜 구분 없는 신변잡기적 메모란이랄까. 딱 그 점에 반했다.


날짜에의 종속은 내가 데일리 다이어리를 불편해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다만 사실 그 점이야 말로 데일리 다이어리의 존재의의나 다름없기에 뭐라 하는 건 우습다. 하지만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생각이라는 게 해 지면 딱 끝나는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생각이 날짜별로 딱딱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매일이 딱딱딱 같지도 매일이 딱딱딱딱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일기가 일일의 기록이었던 데에는 그 역사만큼의 의의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기록 문화의 선구자들이 나같은 동네 바보보다야 훨씬 똑똑했겠지. 그냥 내게는 그게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았을 뿐이다. 대신 먼슬리 다이어리를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일상적인 날짜 개념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다. 당장 다이어리의 예를 들었듯이. 수능 준비를 할 때 공부 계획 겸 해서 데일리 플래너를 쓰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학교에서 나누어 주길래 받아서 썼다. (이건 내 공부 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쓰래서 쓰긴 썼는데 이걸 왜 쓰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마다 쓰는 내용이 거의 똑같았으니까. 


확실한 데일리 루틴을 짜서 일정 분량씩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 바리에이션 자체가 생길 여지가 잘 없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 루틴도 다 들어가 있는데 뭐하러 이걸 매일 쓰나 싶기도 했고. 하여튼 쓰라니까 수능 볼 때까지 쓰긴 썼다. 별로 감은 안 왔지만.


사람들이 데일리 단위로 플래너 쓰는 것의 공부법적 중요성을 논하고 있는 동안 나는 말 잘 듣는 척 하면서 딴 길을 팠다. 사실 딴 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빈 노트에다가 진도 계획을 끄적거렸다. 어느 과목은 얼마나 남았고 며칠까지 얼마나 해야 하고 하루에는 어느 정도 해야 하고. 몇 주에 한 번씩 그렇게 써놓고 나면 목표가 확실해졌다. 데일리 플래너에는 매일 똑같은 것만 적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럴 거면 플래너 왜 쓰냐고 했다. 나도 잘 몰랐다. 


애초에 나는 일일결산하고는 맞지가 않는 사람이었던 거다.


이러한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이어져 왔나보다,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자기성찰 회로는 쓸데없는 것 생각할 때 제일 확실하게 돌아간다.) 지금은 당연히 공부 플래너를 적지는 않는다. 대학생도 공부는 한다지만 흥청망청 사느라 공부하는 방법은 다 까먹었다.


하루의 기록이라는 맥락이, 그때의 데일리 플래닝과 크게 다르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하루 혹은 한 달을 바라보고 계획하고 기록하는 방식인 거니까. 위에서 말했듯 생각을 하루에 한정하는 게 아쉬웠던 것 같다. 난 광각이 조금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인가보다. 내 짧은 삶 속에서 적을 것 없는 하루는 많았지만 적을 것 없는 일주일은 흔치 않았다.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나온 일기를 못써먹겠다고 생각한 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먼슬리 다이어리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핑계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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