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 프라하 한달살기, 두 번을 살아야 알 수 있는 것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기억나지 않는 신생아 시절, 아기 때를 상상해본다. 그때 엄마 아빠가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지, 얼마나 많이 안아줬을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만 해도 칭찬받던 삶이었다. 그 기억나지 않는 한 번은 내 아이들이 태어나고 두 번째 삶을 살며 그 기억과 감정이 뚜렷하게 재현된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으로 믿고 살아왔건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키우면서 처음부터 인생을 통째로 복습한다. 한 번 더 살아야 알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체코 프라하는 우리 가족의 동유럽 여행 및 한달살기 4개월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처음엔 계획에 없던 프라하가 마지막 행선지가 된 사연은, 폴란드 항공 LOT 자그레브 out 티켓을 일정 변경과 동시에 도시도 변경하면서 변경 수수료만 내면 될 도시를 찾다가 프라하가 당첨된 것이다. 이후 아내가 가고 싶었으나 물가, 숙소 문제로 베를린이 제외되며 엉겁결에 바르샤바, 프라하 일정이 길어지고 사실상 한달살기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도시 프라하를 가며, 아내와 다짐한 게 있었다.
프라하 여행은 우리에게 보너스나 다름없다. 너무 큰 욕심 내지 말고 우리답게 잘 다니자
워낙 프라하가 한국인 관광객이 많기로도 유명하고, 날씨가 슬슬 추워지니 아이들 생각해서 무리하지 말자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워낙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누렸기에, 프라하 여행-한달살기는 욕심을 내려놓고 시작했다.
프라하 공항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출구", "수화물 찾는 곳" 등의 한국어 안내 표기였다. 아니 어떻게 영어, 체코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글이지? 아내가 "얼마나 한국사람이 많이 오기에 공항에서부터 한글이야, 중국어, 일본어도 아니고"하자, 나는 공항 수요에 의해 결정된 한글 표기일 수도 있지만, 공항 건설 때 한국기업이 참여해서 생긴 결과일 수도 있으니 너무 겁먹지 말자 했다. 우리 가족은 동유럽 유랑 동안 한국인이 많은 환경을 피해왔다. 한국인이 싫다는 게 아니라, 한국 관광객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인기 명소이고, 사람들도 많아 아이들과 가기에 두렵다는 뜻이었다.
여하튼 미리 예약한 픽업차량 기사는 친절하고 유쾌한 흑인 청년이었다. 아내가 13년 전, 내가 11년 전 지금보다 젊을 시절에 프라하를 여행했고 두 번째 방문이라고 하니 껄껄 웃으며 말한다.
11년? 13년? 모든 게 변했을 거야
운전기사는 사기 치거나 수수료 등쳐먹는 환전소가 대부분이라며 믿을만한 환전소 명함을 주었고, 현금 쓰면 거스름돈 속여서 받으니 웬만해선 신용카드를 쓰는 게 낫다고 조언하고, ATM 기계에서 돈 뽑으려면 은행에 있는 기계를 해야지 별도로 있는 atm은 사설이라 얼마를 등쳐먹을지 모른단 얘기까지, 실전에 들어설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프라하 소매환경을 얘기해주었다. 어라? 11년 전에도 프라하 환전 사기에 대한 얘기는 숱하게 들었는데 변한 게 없구나 싶었다.
여하튼 우리는 그 적나라한 commercial city, 상술이 넘치는 도시 프라하를 직면하게 되었다. 숙소에 다 왔는데 차 세울 곳이 없다. 프라하는 주차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프라하 1,2 구역은 차량 통행량이 많고 쌩쌩 달리니 도로 매연은 기본이었다. 게다가 트램과 차도가 혼용이니 정체도 많고 공사도 많고 사고도 많았다. 그러한 도로는 인도-차도 모두 울퉁불퉁하여 유모차 끌기에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끄러웠다. 아이들과 하는 프라하 여행,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한달살기로 유명한 블로거가 프라하는 아이들에게 친화적인 도시라고 소개해서 내심 안심하고 왔는데, 이런 거짓부렁, 프라하는 애들 데리고 다니기 너무 불편하고 또 위험했다. 특히 유모차 환경은 더하다. 휠체어 타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니라는 건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전철역이 허다하고,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는 탄광 들어가는 마냥 깊다. 메트로 주요 역인 Muzeum 역은 장애인 리프트가 환승역 간에는 없고 외부 리프트는 동떨어져 있는데 밖으로 나가면 공사판이라 쉬이 갈아탈 수도 없었다.
바르샤바에서 쉬이 대중교통 이용하다가 프라하에 오니 난이도가 다른 게임이었다.
숙소 근처 나들이 나왔는데, 틈이 많은 돌길 덕에 둘째 유모차는 계속 달그락거리지, 차 운전자들은 아이는 물론 인도의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신호가 짧으니 어영부영 건너면 끊기는 건 차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가가 비싸다. 누가 동유럽에서 프라하가 물가가 싼 편이란 거짓말을 한 건가? 바르샤바와 비교하니 체감 물가는 거의 두 배 비쌌다. 그리고 상점 직원들, 서빙하는 웨이트리스들이 불친절하거나 영혼이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크로아티아는 유쾌했고, 슬로베니아는 깔끔했고, 폴란드 바르샤바는 투박해도 순수했다면, 프라하는 상업적이다. 공항 미니밴 기사 말대로 베트남 사람이 많고 식당, 식료품점 종사자가 많은데 이들이 제일 불친절했다. 중국식당에선 카드는 안 받는다며 현금받고 영수증을 수기로 써주고 메뉴판과 다르게 돈을 계산해서 푼돈을 떼어먹었다. 구글 지도에 각종 후기를 보니, 한국인들의 노여움이 극해 달해 성토하고 있다.
아내가 프라하 오기 전에 지아자 Ziaja 화장품을 알아보는데, 폴란드 브랜드인데 프라하가 더 싸다며 홍보성 블로그 포스팅엔 할인권이 붙어 있었단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아자 Ziaja 화장품은 물론 장바구니 물가는 폴란드가 훨씬 쌌다. 여기서 나는 답을 찾았다. 체코 프라하에는 한국인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숙박업, 여행업, 유통업자들이 상주하며 한국인들의 최대 유치, 최대 소비를 조장해야 하는 입장이다. 프라하가 싸다면 아래 오스트리아보다 일부 싸단 얘기지 프라하는 상업적이고 비쌌다.
한 밤 자고 오전에 얀 후스 동상이 있는 올드타운 광장을 찾았는데, 역시나 사람이 많고 혼잡하다. 임대료도 비쌀 테니, 레스토랑 메뉴판 가격도 가관이었다. 햇살 좋을 때 아이들이 뛰놀면 좋으련만 여긴 그런 순수한 아이들의 동심을 보장하는 광장이 아니었다. 문득 류블랴나 프로이센 광장, 바르샤바 왕궁 앞 Stare miasto의 여유 있는 광장이 그리웠다. 광장에 갤러리 커피숍은 라테 한잔에 6000원 정도 했다. 바르샤바 Stare miasto광장에선 1/3 값으로 오믈렛을 포함한 아침 세트를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심 11년 만에 다시 온 도시인데, 내가 이곳을 왜 오고 싶어 했고, 또 왜 왔으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째니까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어떤 지점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우리와 어울리는 방법을 찾았다.
비셰흐라드 Vyšehrad, 비셰라드는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꽤나 유명하다. 실제로 성당의 운치, 해 질 녘 프라하 붉은 지붕 전경 등 보여줄 수 있는 낭만은 비셰흐라드 석양에서 꽤나 누리기 좋았다. 허나 이곳의 매력은 비단 해 질 무렵만이 아니었다.
영어는 못해도 친절한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의 이모님들, 아내가 커피 한잔 주문하고 맛없지만 한숨 돌리며 성 안을 본격적으로 돌아보려는데, 초입부터 놀이터가 아이들을 유혹했다. 정말 동유럽 유랑을 하며 놀이터란 놀이터는 국가, 도시, 동네 다 다닌 듯했다. 귀국하면 놀이터 디자이너 시켜줘도 월급 아깝지 않게 성과 낼 자신 있을 정도로 아이들 놀이터에 대한 시아가 넓어졌다. 비셰흐라드도 평일 오후가 되니 동네 아이들과 엄마들의 모임 천국이 되었다.
큰아이는 본인이 류블랴나 시절부터 좋아하던 줄타기가 있어서 신나게 놀았다. 말리지 않으면 이 줄타기만 근 1-2시간은 하며 놀 정도였다. 그 와중에 큰아이와 재밌게 논 클라라 Klára를 만났다. 한국 나이로 10살인 클라라가 영어를 못하는데, 그녀의 엄마 마르케타 Markéta 가 도와주러 나타났는데 상냥하고 여행객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아주머니였다. 클라라 엄마 마르케타가 먼저 "애들 데리고 여행 다니기 힘들겠어요. 빨래도 그렇고..." 하며 운을 띄우자, 잠시 묵혀놓은 수다가 터져 나와 누적된 우리의 긴 여행 사연을 들려주었다. 큰아이도 7살 여자아이들 중 키가 크기론 최상위인데, 클라라 Klára도 그렇단다. 클라라 학교 친구들 중 베트남 친구가 있어 아시안이 낯설지 않다했다. 사실 프라하에선 클라라 엄마 같이 말 그대로 현지인과 대화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고맙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농구선수처럼 큰 클라라를 보며 큰아이가 4-5년 후면 나보다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뭔지 모를 섭섭함도 느꼈다.
성 베드로 성당과 공원묘지, 석양이 드리우니 운치 있고 예뻤다. 클라라 엄마에게 "11년 전에 공원묘지에서 알퐁스 무하 묘비 찾다가 실패했는데, 이번엔 찾아보려고..." 했더니, "찾고 나면 밤이 깊어 문이 잠겨있을 거야. 용기 있네"하며 농담을 받아주었다. 성벽을 따라 곳곳에서 사진을 찍다가 문득 11년 전의 나를 만났다. 11년 전, 그때는 비 내린 다음날 오전, 스산한 늦가을에 안개가 끼고 쓸쓸했다. 혼자였고, 도대체 왜 내가 혼자 여기 서 있지?라고 반문했었다. 그리고 한 번이 아닌 두 번째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 후 11년 지나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오기 위해 설익은 오리엔테이션을 했던 것이다. 그때, “왜?”에 대한 질문을 11년 만에 답을 찾다. 그 해답이 되어줘서 고마운 가족들, 아빠의 두 번째 인생에 대해 축하하듯 아이도 멋진 풍경을 보며 “우와~ 우와~” 했다.
클라라 Klára 엄마 마르케타 Markéta가 이곳 비셰흐라드에서 주말에 아이들을 위한 축제가 있으니 꼭 다시 오라고 말했다. 축제 관련 홈페이지 주소까지 알려주고, 비셰흐라드 및 체코가 이번 2018년이 몇 주년 기념이고 막 길게 설명해줬는데, 익숙지 않은 단어가 많아 끄덕끄덕하기만 했다. 그렇게 찾은 축제 비셰흐라트키! 매년 9월 열리는 아이들 축제였다. 그런데 사실 축제라기엔 좀 빈약했다. 비셰흐라드 인근 아이들 즐길 거리 정도는 수용해도, 4개월째 여행하며 많은 축제를 누려온 우리에겐 그냥 소소한 수준이었다. 50코룬 내고 만들기도 참여하고, 아이들 장난감도 서로 공유하고, 아내 말로는 돈 내고 보기엔 좀 아까운 인형극도 즐겼다.
그렇게 목금토일, 매일 비셰흐라드를 산책했고 매일 다른 풍경을 만났다. 공원묘지의 십자가를 보며, 큰아이가 묻는다
왜 예수님은 저렇게 무덤이 많아?
큰아이는 작은 연을 하나 사서 직접 뛰며 날렸다. 그리고 비셰흐라드 공원 내에 유치원 앞 공터를 찾았다. 5시 정각,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 뛰노는 아이들......
아내에게 말했다. 마지막 눈감는 날에 문득 이 순간이 떠오를 것 같다고 말이다. 이곳을 다시 찾아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다시 태어나서 자라는 인생을 통째로 복습한다. 한 번 더 살아야 알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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