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면 얻는다

Chapter 2 - 5

by 비지대디





타슈켄트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유치원이 중간 방학을 했다. 국제학교는 학기 중에 중간 방학(Term Break)을 몇 번하는데, 대략 7-8주마다 일주일 정도 쉬어갔다. 중간에 방학이 낯설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윤슬이에게는 반가웠다.

방학 첫날. 윤슬이는 늦잠을 자고 있었고, 난 그 틈에 집 앞 카페에 빵과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우연히 채연엄마와 마주쳤다. 지난 한인모임에서 만난 주재원 가족 중 한 분이었다. 특히 채연이네는 우리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채연이가 윤슬이보다 한 살 많은 또래라고 해서 인상이 남았었다. 서로 집옷차림으로 나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뻘쭘한 분위기에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데, 채연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슬이도 방학이죠? 오늘 아이들끼리 키즈카페에 모여 놀기로 했는데 윤슬이 데리고 오실래요? 거기 피자도 맛있어서 점심식사도 하려고요."


방학이라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참에 키즈카페라니 솔깃했다. 게다가 점심까지 먹을 수 있다니 끼니에 부담이 컸던 나에겐 희소식이었다. 윤슬이 역시 그토록 원하던 한국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채연엄마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키즈카페 장소와 모임시간을 메시지로 받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그것도 엄마들만 모인 모임에서 몇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영 부담스러웠다. 더군다나 키즈카페가 있는 지역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윤슬이와 가려니 괜히 불안했다. 그냥 집에서 윤슬이랑 지지고 볶는 것이 낫겠다 싶어, 불참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방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는 윤슬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윤슬아. 너 우즈베크에 있는 한국 언니오빠들 만나볼래?”

“진짜? 여기 한국말하는 언니오빠들이 있어? 나 만나보고 싶어!”


방방 뛰며 좋아하는 윤슬이.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나 불편한 거만 생각했구나 싶었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결국 내가 안 움직이면 윤슬이는 친구도 안 생긴다.'


마음을 다잡고 짐을 챙겨 아이의 손을 잡고 키즈카페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려 키즈카페에 도착했다. 자리에 들어서는데, 저 멀리 10명 정도의 엄마들이 보였다. 용기를 내어 왔지만 실제 엄마들 무리를 마주하니 급 긴장이 되어 얼굴이 굳고 몸이 뻣뻣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채연엄마가 윤슬이와 나를 소개해주어 소소한 환영을 받으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윤슬이는 몇 살인지, 어디 유치원에 다니는지, 엄마는 어디서 일하는지, 타슈켄트에선 어디에 사는지 등 호구조사와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나 기본적인 공통사가 없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난 엄마들의 수다 사이에 떨궈진 보리짝 같았다. 간간히 내가 신경 쓰이거나, 아빠가 육아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한 엄마들이 질문을 던지면, 한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가도 곧바로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다가 오히려 나 때문에 엄마들이 불편해하고 신경 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자, 더욱 마음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괜히 왔나 싶은 마음에 1시간이 1년처럼 더뎠다. 그나마 아이들이 떠드는 소음 덕분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난 마땅히 눈을 둘 곳이 없어 하염없이 윤슬이 노는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초반에 윤슬이는 살짝 긴장하는가 싶더니, 바로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트럼플린 속에서 계속 구르고 넘어지면서도 지치지 않고 그들을 따라다녔고, 그런 거침없는 모습에 처음엔 당황하던 아이들도 결국 재미있다며 윤슬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는 오히려 윤슬이가 언니오빠들을 주도하며 키즈카페 곳곳을 뛰어다녔다.


“언니. 나 따라와 봐! 이거 같이 타보자.”

“오빠. 나 봐봐. 나 엄청 높게 뛰지?. 나 엄청 빠르지?."


윤슬이의 말도 안 되는 친화력과 믿기지 않는 에너지에 엄마들도 놀라는 분위기였다. 윤슬이가 외향적이라며 해외생활에 딱이라며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나 역시 윤슬이가 처음 보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고 든든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득 윤슬이가 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4살짜리 윤슬이도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나는 쪼다처럼 뭐하고 앉아있는 거지?'

'남자와 여자, 아빠와 엄마가 뭐가 다르겠어. 모두 아이를 위해 모인 부모일 뿐인데.'


아이를 통해 깨우친 순간이었다. 생각이 바뀌니 행동에 작은 용기가 생겼다. 아이들이 한바탕 피자를 먹고 다시 놀이터로 복귀했을 즈음, 난 조심스레 엄마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 학교는 자주 방학을 하던데 그때마다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막막하네요. 이런 키즈카페처럼 아이와 갈 만한 곳이 또 있을까요?”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엄마들은 반색하며 너 나 할 것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엔 키즈카페, 놀이공원 등 맞춤 답변들이 나오더니, 분위기가 무르익자 발레나 피아노 등 개인교습부터, 아이들 먹거리를 살 수 있는 마켓까지, 육아에 관한 정보들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엄마들의 우즈베크 생활정보 배틀이 시작되었다.


"ㅇㅇ시장에 가면 한국딸기가 있는데 좀 비싸지만 맛있어요."

"아니 언니. 딸기는 거기보다 ㅁㅁ시장에 가면 싸고 괜찮아."

"여기는 돼지고기 안 먹는 거 아시죠? 돼지고기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ㅇㅇ축산 가면 살 수 있어요."

"거기도 괜찮은데 ㅇㅇ시장에 가면 생삼겹살도 있고 현지인 사장이 한국말도 좀 하고..."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이 엄마들의 배틀 사이에서 쏟아졌다. 정보가 많아 난 핸드폰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들은 못내 안쓰러웠는지, 결국 나를 그들의 단톡방에 초대하며 정보를 올려줄 테니 참고하라 했다. 나 혼자 ‘맨땅에 헤딩’을 하며 살았다면 족히 1년은 걸렸을 경험과 정보가 하루아침에 들어왔고 계속 들어올 예정이었다.


방학 첫날부터 운도 따르고 용기도 한 꼬집 내어 엄마들의 모임에 참여한 덕에, 윤슬이는 종종 한국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아빠는 해외생활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슬이는 택시에서 만족의 웃음을 지으며 잠들었고, 아빠는 핸드폰에 기록된 보물 같은 메모를 보며 든든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난 동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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