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네 학교 2학년 3개 반이 다 같이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만두 학교에선 소풍이라고 해 봤자 도시락이나 간식을 챙길 필요 없이 평소처럼 물통 하나에 모자, 그리고 물놀이용 신발만 가져가면 되었다. 덕분에 부담이 없는 엄마가 해야 할 일이라곤 아이에게 즐겁게 안전하게 놀고 오라고 인사를 해주는 것뿐이었다. 2학년 아이들이 이번에 방문하게 된 곳은 주로 교육 시설로 활용되는 하노이 근교의 아주 큰 농장이었다. 물놀이를 할 냇가도 있고, 오리나 닭, 염소 등의 동물들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곳이었다. 하노이에서는 보기 어려운 파란 하늘 아래서 아이들은 오랜만에 풀과 흙을 밟으며 마음껏 뛰어다녔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폐 드럼통으로 업사이클링한 어린이 기차도 타고, 돌멩이를 주어다 예쁜 그림도 그리고, 색색의 쌀 반죽으로 베트남 전통 장난감인 '떠해(Tò he)'를 만들기도 했다. 농장에서 얻은 식재료들로 만든 시골 밥상차림을 점심으로 먹고 나서는 어김없이 낮잠 및 휴식 시간을 가졌다. 반에서 유일하게 낮잠을 안 자는 걸로 부모와 선생님께 공식적인 동의를 얻은 만두도 오늘만큼은 농장에 마련된 건물 안 2층 침대의 친구들 옆에 쪼르르 몸을 뉘었다. 뜨거운 공기가 머금는 시간이 지나자 오후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함께 인솔 중이던 부담임 선생님이 베트남 메신저인 잘로(Zalo)의 보호자 그룹 방에 오늘의 활동 사진들을 올려주셨다. 여러 장의 사진 속에서 만두가 있는 사진 한 장이 번뜩 눈에 띄었다. 베트남 인민군 군복을 입고, 챙이 넓은 군용 녹색 모자를 쓴 만두가 나무를 깎아 만든 모형 총을 들고 그 누구보다 앞장서 달려가 담임 선생님을 향해 신나게 총질을 해대고 있는 사진.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웃고 있었지만 사진을 보는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참혹했던 전쟁이 끝난 지 50년도 채 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왜 굳이 아이들에게 총을 쥐어주는 걸까 싶어 심란했고, 베트남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는 한국인 아들의 모습에 놀랬다.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는데 바로 다음 활동사진이 올라왔다. 이번엔 소방관복을 입은 아이들이 화재 모형에 대고 호수로 물을 쏘고 있었다. 일렬로 서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만두의 모습을 찾은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영 체험이 아니라 직업체험의 의미겠구나’ 싶어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만 싶었다.
처음 아이의 사진을 받아보고 밀려오는 이 과한 불편함의 근원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는 베트남에 살고 있는 ‘응어이 한꾸옥(Người Hàn Quốc, 한국 사람)’이었다. 불과 십몇 년 후를 상상해 봤다. 한국이 지금과 같은 병영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면 한국 국적을 가진 만두는 한국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주적(主敵)'이라 부르는 북한에 대적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군대식 사상교육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북한과 베트남의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며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베트남 친구들과 함께 자라온 만두는 그런 한국에서의 군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래에 한국 군복을 입고 적군이 그려진 과녁을 향해 총을 쏘고 있을지도 모를 아이가 지금은 베트남 인민군 군복을 입고 베트남 친구들과 함께 병정 놀이를 하고 있었다. 50여 년 전 베트남 땅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두 개의 다른 군복이다. 어떤 군복을 입는지에 따라 총구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옷이 바뀌는 순간 함께 어울려 놀던 내 옆의 친구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만두의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한베평화재단을 방문했다. 늘 만두와 나를 반겨주는 활동가들이 있어 한국에 올 때마다 찾았던 곳이었다. 이번에는 만두가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지내던 사무국장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재단의 사무실을 찾아간 날, 아쉽게도 삼촌은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돌보느라 결국 출근하지 못했다. 대신 재단에 계시던 새로운 활동가 두 분과 인사를 나눈 뒤, 마침 사무실에서 진행하고 있던 전시를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마을 중 하나이자, 오래전 나도 방문했었던 베트남 중부 ‘하미(Hà My) 마을’에 대한 아카이브전이었다.
먼저 하미 마을에 한국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의 영상을 봤다. 일렬로 서 있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한국에서 온 평화기행 참가자들이 인사와 함께 작은 선물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흐르는 어색한 공기가 화면 밖까지 전해졌다. 대열 한쪽에서 연신 훌쩍이던 한 아주머니가 이내 큰소리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나란히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은 찾아온 한국사람들이 민망해할까 봐 주저앉은 아주머니를 일으키며 달래주려 했지만 아주머니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 한국 참가자 중 아주머니와 비슷한 또래의 한 여성이 앞으로 나와 아주머니를 꼭 안아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함께 울었다. 영상을 다 본 뒤 이어진 전시에서 나는 마을의 또 다른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만났다. 그리고 2013년 6월에 돌아가시기 얼마 전, 댁으로 찾아가 뵈었던 학살 생존자 ‘故 팜티호아(Phạm Thị Hoa) 할머니’의 반가운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뵈었던 그 기력 없는 모습이 아니었다. 여러 매체에서 자주 봤던 두 발목 잘린 무섭고 고통스러운 모습도 아니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당신을 찾아온 한국 친구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아주 밝고 크게 웃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엄청난 긍정의 에너지를 느꼈다.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미안함 따위가 아닌, 고난을 살아내고 있는 한 여성에 대한 존경이 일었다. 사진 아래엔 평생 할머니의 발이 되어 주었던 낡은 목발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시공간을 넘어온 목발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강한 생명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전시 가운데에 마련된 향에 불을 붙이고 옆에 놓인 135 명의 희생자 카드 중 하나를 뽑았다. ‘응우옌 티 쏘안(Nguyễn Thị Soan)’, 카드의 뒷면에는 학살 당시 27살이었던 팜티호아 할머니의 친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향불을 향해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러 드렸다.
힘 있는 모습의 팜 티 호아 할머니 사진 @한베평화재단
2000년에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에서 하미 마을의 위령비 건립 지원을 하기로 했다가 비문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글이 적힌 것을 알고는 지우라고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있었던 진실을 지우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며 대신 연꽃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그 비문의 글을 덮어버렸다. 재단에서는 연꽃 비문을 배경으로 하고 그 위에 비문을 맞추는 퍼즐을 만들었다. 퍼즐을 다 맞추고 나면 여전히 하미 마을 위령비의 연꽃 대리석 아래 가려져 있던 진실이 드러났다. 내가 전시를 둘러보는 사이 만두는 사무실 가운데 마련된 비문 퍼즐 맞추기를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맞추나’ 시간까지 재가며 만두는 비문에 적힌 베트남어 글자를 열심히 맞췄다.
퍼즐 맞추기를 끝낸 만두가 한쪽 벽에 있는 하미 마을 사진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활동가 선생님 한 분이 따라다니며 궁금해하는 눈빛의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민간인 학살’, ‘한국군’.... 반대편에서 전시를 보고 있던 내 귀에 익숙한 단어들이 또렷이 들려왔다. 선생님에 만두에게 해주시는 설명들은 가감 없이 어른들에게 하는 설명 그대로였다. '베트남에서 아주 큰 전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만두가 아직 모르는 내용들이었다. 엄마가 아직 설명해 주지 않은 낯선 단어들을 듣게 된 아이에게 바로 달려갔다. 그런 나를 보고 설명을 해주시던 선생님이 말을 멈췄다.
“만두야, 그게 뭐냐면……"
곁으로 간 내가 급하게 부연 설명을 해주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놀란 얼굴의 만두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엄마, 여기 한국 군인이 왜 있어?”
“아니, 그게…… 예전에 베트남 북쪽이랑 싸우던 미국이 여러 나라한테 와서 같이 싸우자고 했었어. 그때 한국에서 가난하고 어린 청년들이 돈을 벌기 위해 군인이 되어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었거든. 그래서……”
“베트남에서 있던 전쟁에 한국 군인들도 있었다고?”
“응, 맞아…… 그 한국 군인들 중에 일부는 베트남의 보통 사람들한테 나쁜 짓을 하기도 했어. 우리 지난번에 푸이옌 성에 갔을 때 위령비 참배했지? 전쟁 때 힘없는 아이들이나 노약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던 데. 그곳도 한국 군인들이 와서 그랬던 마을이야……”
“엄마, 근데 왜 나한테 안 말해줬어?”
만두가 원망스러운 눈빛을 쏘아댔다. 아이에게서 처음 보는 무서운 눈빛이었다. 지난겨울, 친구네와 함께 여행을 갔던 베트남 중남부의 푸이옌 성에서 우리가 묵던 숙소 근처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위령비’를 찾아가 참배를 했었다. 그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이 편안해 지기를, 그리고 다시는 이 마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아이들과 함께 빌었었다. 만두의 물음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만두야, 엄마가 그 전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더 설명해 줄까?”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 했지만, 만두는 갑자기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선생님, 근데 저 퍼즐 제일 빨리 맞춘 사람이 몇 초예요?”
만두는 상황을 외면했다. 평소의 대화 태도와는 너무도 다른 행동이었다. 아마 솔직하지 못했던 엄마에게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콩닥콩닥 요동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아이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만두가 조금 더 크면 알려주려 했다'라고, '이젠 언제든 궁금하면 물어봐 달라'라고, '엄마가 다시 잘 설명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나는 아이의 언어로 다시 해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베트남 중남부 푸이옌(Phú Yên)성 호아히엡남(Hoà Hiệp Nam)사 위령비 참배
그 후 서울 할머니네서의 며칠, 평소와 다르게 나는 만두와 자꾸 부딪혔다. 매일같이 잘해오던 양치질 하나에, 10분이면 끝날 방학 숙제 하나에도 아이는 크게 휘청대며 불편한 심기들을 표현했다. 아침부터 난리를 피운 아이를 마주 앉혀놓고 차분히 그 마음을 물었다. 뱅뱅 돌던 이야기는 결국 엄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엄마가 택시에서 ‘우리 외국에서 와서 길을 잘 몰라요’라고 말하는 게 너무 싫어!”
서울에 와서 택시라고는 딱 두 번 탔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만두를 보며 ‘엄마가 길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창피한 건지’, 아니면 ‘외국에 사는 게 싫은 건지’를 세세하게 물었다. 그러나 만두는 명확한 이유를 대답하지 못한 채 짜증을 냈다. '혹시 '베트남'에 산다고 말하는 게 싫은 건지'를 물어보다가 문득 며칠 전 아이와 풀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만두야, 혹시 지난번에 한베평화재단에서 하던 전쟁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불편했어?”
잠시 생각을 하던 만두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이내 뿌아앙 하고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엉엉 우는 아이를 품에 앉고 복잡한 마음을 추슬렀다. 서울 할머니 댁에서 잘 먹은 탓에 그새 2kg나 두터워진 몸이었다. 그러나 부쩍 자라난 몸과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사실들을 갑작스레 알게 된 아이가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며칠을 보냈던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우리 만두가 그때 듣다 만 이야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었구나… 엄마가 지금 다시 설명해 줘도 될까?”
“…… 짧게!”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아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여전히 외면하고 싶으나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며칠간 아껴두었던 말들을 천천히 꺼냈다.
"먼저 한국 사람들이 네가 베트남에서 왔다고 싫어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하노이에서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좋아하고 귀하게 여겨주지? 많은 한국 사람들도 베트남을 좋아하고 있어. 오히려 엄마 주변의 친구들은 베트남에 사는 우리를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나는 만두에게 차마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을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대신 두 나라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설명하면서 수많은 한국 지인들이 베트남에 놀러 오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베트남 사람들도 좋아하는 하노이의 한국 식당들도 나열했다. 만두의 베트남인 부담임 선생님이 하노이에 맛있는 한국식당을 추천해 달라며 물었던 기억도 꺼냈다. 그러자 만두는 거꾸로 서울 곳곳에서 만난 베트남 식당들을 기억해 냈다. 할머니 집 바로 앞에도 쌀국수 식당이 하나 있었다. 하노이 쌀국수의 네 배쯤 되는 가격을 보곤 차마 가보지 못했던 식당이었다. 베트남은 한국보다 쌀국수도 엄청 싸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망고랑 다른 과일들도 엄청 싸다면서 아이가 눈물콧물 범벅 된 채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우린 함께 베트남에 사는 좋은 점들을 더 많이 찾아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베트남에선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서 전쟁을 하게 되었어. 그때 미국 군인들이 남쪽 편에 서서 북쪽이랑 싸웠지. 그때 한국은 한국에서 있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엄청 가난한 나라였거든. 근데 여기 미국 편에 써서 같이 싸우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니까 돈 없고 어린 청년들이 돈을 벌기 위해 군인이 되어 베트남에 온 거야. 그중 어떤 한국 군인들은 베트남 마을에서 어린이나 노약자도 죽이거나 다치게 했어. 전쟁에선 누군가 죽고 다치게 되고, 그 안에 있는 어린 한국 군인들도 너무 힘든 상황이었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건 분명 잘못된 거잖아. 그래서 그때 피해를 입었던 베트남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미안해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야. 근데 지금 그 한국 군인들은 모두 할아버지가 되었어. 사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사과를 더 잘 못하거든. 어른이 되면 용기가 더 없어지기도 해. 그래서 어떤 군인 할아버지들은 그때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해. 그때 다친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이 살아서 다 기억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그리고 그 어린 군인들을 무서운 전쟁터로 보내자고 결정한 한국 정부도 사과를 해야 하거든. 근데 한국 정부도 옛날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있어.”
“왜?”
“음… 글쎄… 사과를 하면 힘이 없어 보이는 게 싫은 건가?”
“사과하면 용감한 건데.”
“맞아. 그래서 삼촌이나 이모나 재단에 있는 다른 선생님들이 더 많은 한국 사람들한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러 가서 대신 사과하고 위로해 주는 일을 하는 거야. 엄마도 그런 일들을 주변에 알리고 도와주려 하고 있고. 네가 말했듯이 그건 엄청 용감하고 멋진 일이거든."
"나는 사과 잘할 수 있는데."
"그래 맞아. 나중에 만두처럼 베트남 친구들도 많고,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잘하는 특별한 친구들이 많아지면 두 나라가 좋은 친구가 되게 하는 멋진 일을 할 수도 있을 거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과 사과를 하려고 용기 내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일도."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내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을 20대 후반을 떠올려봤다. 베트남에서 내가 한국인임이 알려질까 조심스러워하던 기억들. 그러나 만두는 반대였다. 자신이 베트남에서 온 것이 한국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걱정을 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온 일생을 베트남에서 살았고, 베트남 학교에서 베트남 친구들에 둘러 쌓여 생활하고 있는 만두에겐 오히려 베트남의 정체성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함의 방향이 어느 쪽이든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진실이었다. 아직은 만두가 진실을 알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가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해 만두의 학교는 국제화 교육 시스템을 늘리면서 동시에 전교생이 모이는 시간에 베트남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국가나 국민교육헌장 등 애국을 강조하던 국가주의적 교육이 이 시대의 '범 지구적 평화 교육'과는 반대되는 행보라고 믿는 엄마로서 학교에서 강제로 국가를 부르게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심지어 베트남의 국가는 ‘진군가’였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1%의 다양성을 담당하는 극소수의 외국인 학생 부모로서 학교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과연 우리가 한국인이 아니라 베트남의 역사와 아무런 관련 없는 다른 국가의 부모였다면 학교에 당당하게 건의해 볼 수 있었을까?
하굣길, 엄마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 진군가를 흥얼거리는 만두에게 나는 며칠 뒤 ‘베트남 독립기념일’에 하노이 근교로 떠날 가족 여행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날이 왜 쉬는 날인지 묻는 아이의 질문에, 오래전에 박호(Bác Hồ, 호찌민 아저씨)가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로 선언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그때 한국 군인들은 없었지?”
“응. 없었어. 이제 한국 군인들은 베트남에 없어.”
듣고 싶은 말을 들어서일까 만두가 내 등에 얼굴을 폭 파 묻었다. 말랑한 아이의 살결이 느껴졌다. 한국군에 대한 아이의 질문에 내 심장도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달리는 오토바이 너머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노이 가을바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