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사몽 만삭의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마룻바닥에 디뎠는데 발 끝에 찰랑찰랑 물이 닿았다. 아직 꿈 인가? 바닷가에 온 걸까? 배를 탄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발목까지 물이 느껴졌다. 으악! 오빠 일어나 봐! 사자후 소리에 벌떡 일어난 남편과 함께 주위를 둘러봤다. 커튼을 열고 들어오는 집안 온 가득 물이 고여있다. 뭐야 홍수라도 난 거야? 우리 집은 13층인데? 물의 시작을 찾아보니 주방 싱크대 밑에 있는 급수 배관이었다. 터진 배관 틈 사이로 흐른 물은 거실을 지나 집에 하나뿐인 화장실까지 갔다. 그러나 화장실에 있는 유일한 배수구엔 어디선가 흘려 내려온 젖은 종이 조각이 덮여서 결국 물이 쉽게 내려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밤새 조금씩 차오른 물은 안방과 작은 방에까지 들어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정말 단출한 신혼살림이었다. 바닥에 내려두었던 물건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물에 젖거나 잠겨서 크게 상하게 된 것들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집주인에게 통보한 이사 나가는 날이 바로 며칠 뒤라는 것이었다. 계약을 할 때 냈던 한 달치의 보증금을 온전하게 돌려받기 위해선 집을 원 상태로 복구해야 했다. 물을 빼고 짐을 정리한 뒤 우리는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남편은 걸레질을 참 잘했다. 나는 잘 굽혀지지도 않는 만삭의 몸으로 쭈그려 앉아 묵묵히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리고 이사 나가는 날, 집주인이 보낸 부동산 관리인이 찾아왔다. 짐이 빠져 더 휑해진 집에서 뭐라도 꼬투리를 잡을까 긴장했지만 관리인은 열쇠를 받고는 쿨하게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젊은 집주인은 하노이에 임대를 두는 집이 여러 개라고 했다. 세입자의 세세한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자였던 것이다. 괜히 긴장했다 싶었다. 조금 덜 열심히 닦을걸 싶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한인타운에서 3~4km 정도 떨어진 동네였다. 2008년도에 하노이가 도시 개발로 확장을 하면서 갑자기 하노이시로 편입된 동네였다. 여전히 진짜 하노이 사람들은 시골이라 생각하는 하노이의 외곽 지역이었다. 싱가포르 회사가 짓고 관리했는데, 건물을 짓는 일을 하는 남편은 베트남 계 회사나 중국 계 회사가 공사를 하지 않은 것이 일단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이 아파트의 슬로건은 ‘싱가포르 리조트에서 사는 것처럼’이었다. 다섯 개의 동이 일렬로 늘어진 아파트의 1층 한가운데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유치원, 놀이터, 슈퍼, 약국, 식당, 배드민턴 장, 탁구 장, 포켓볼 장, 농구 코트, 산책로, BBQ 테이블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있었다. 이 아파트는 정말 잘 관리되고 있는 리조트 같았다. 대로변에 위치한 달랑 한 동 짜리 삭막한 아파트에 지내다가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경비 아저씨와 청년들, 정원을 가꾸는 직원들이 어디든 보이는 이곳에 오니 누군가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걸을 곳이 있어 좋았다. 곧 세상에 나올 아이를 키우기에는 꽃과 나무 가득한 이 산책로가 꼭 필요했다. 게다가 단지 안쪽으로는 차가 들어올 수 없어서 편의시설을 이용하러 다닐 때도 차 걱정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우리는 에어컨과 침대만 있고 호숫가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 두 개짜리 남향집을 월 450 달러에 임대했다. 당시 주변에서 유일한 고층 빌딩인 데다 고급 아파트라 불리는 우리 동네의 자랑거리였지만, 한인 타운 아파트 시세의 절반이었다. 나는 집주인에게 거실과 각방의 창문에 단색의 커튼을 달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요구와는 다른 주인아주머니 취향 가득 반짝이는 꽃무늬 커튼이 달렸다.
이사 후 짐 정리를 하고, 식탁을 새로 사고, 출산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니 아이가 금세 세상에 나왔다. 외출이 어려운 출산 후부터 나는 아파트 안에서 시설을 누리며 살았다.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시간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아이가 유모차에 앉을 수 있게 되자 나는 아파트 밖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만나는 울퉁불퉁한 요철 하나 없이, 편하고 안전하게 바퀴를 굴릴 수 있는 단지 안 산책길이 너무 고마워졌다. 어딜 가든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 베트남이었지만, 유독 이 아파트에는 미취학 아동들이 넘쳐댔다.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곳이라는 내 판단이 베트남 젊은 부모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아침마다 단지 안 유치원 앞의 공터에선 50~60여 명의 유치원생들이 아침 체조를 빙자한 춤을 췄다. 온 동네 미취학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보모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그 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그 아침체조 시간에 함께하는 것은 나와 아이에게도 중요한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체조가 끝나면 나는 산책로를 걸었다. 곳곳에 다른 보호자들이 이 아파트에서 눈에 띄는 한국 아가와 엄마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 주었다. 어젠 잠을 잘 잤나, 오늘은 분유를 몇 미리 먹었나, 이제 몇 킬로가 되었나, 이는 몇 개 났나, 여기 상처는 왜 났나, 열은 내렸나, 기저귀는 언제 떼나, 유치원은 언제 보내나…… 등등 아이를 돌보는 이들의 대화는 늘 비슷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면 1km가 채 못 되는 그 산책로를 왕복하는 데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는 하루에 두 번씩, 많은 이웃들에게 관심을 받는 그 산책 시간이 참 고마웠다.
만두처럼 토실토실한 아이는 친한 이모들로부터 만두(Bánh bao)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두는 어느새 유모차에서 내려 그 산책로를 아장아장 걸었고, 곧이어 와다다다 뛰어다녔다. 만두는 베트남 할머니들이 말을 걸어줄 때마다 빵끗빵끗 잘도 웃었다. 잔잔한 한국어에 비해 오르락내리락 6개의 성조가 있는 베트남어를 유독 좋아했다. 산책로 평상에 모여 앉아 있던 할머니들 사이에 새로운 할머니가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만두를 소개를 시켜줬다.
"여기, 얘 좀 보라고! 여기 이 아기가 얼굴 크고, 눈 작고, 하얗고, 잘 웃는 한국 아기야. 귀엽지?”
“맞네. 얼굴도 크고, 까꿍! 눈도 작고, 까꿍! 피부도 하얗고, 까꿍! 잘 웃네, 까꿍! 아이고 예뻐라!”
칭찬일까 욕일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만두는 연신 꺄르르르 웃어댔다. 그런 아이가 예쁘다며 평상 위의 할머니들은 들고 있던 간식을 나누어주었다. 뭐든 엄청나게 잘도 받아먹는 만두를 보며 할머니들은 또 신기해했다. 평상 위에 핀 웃음꽃 한가운데에 만두와 내가 함께 있었다.
누군가 베트남에 사는 한국인에게 필요한 세 가지 복이 있다고 했다. 가사 도우미 복, 운전기사 복, 그리고 집주인 복. 당시 우리는 가사 도우미나 운전기사가 없었고, 집주인 복이야 보증금을 떼인 적도 없고, 매년 큰 인상이나 마찰 없이 계약 갱신을 하며 조용하게 살아왔으니 이만하면 복이 있는 편이 아닐까 싶었다. 새 집주인은 하노이 외곽 지역 공무원 출신의 50대 부부였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평생 모은 돈으로 가까운 곳에 새 아파트를 하나 사놨는데, 아파트를 물려주려는 아들이 아직도 결혼을 못해 그 사이 임대를 주는 것이라 했다. 베트남에는 양도세가 없으니 집을 사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새 집주인은 무심했던 이전의 부자 집주인과는 너무 달랐다. 집세 문제로 연락을 할 때는 물론, 거주증을 만들어야 할 때, 부엌이나 화장실에 고칠 것이 생기거나 설비를 바꾸어야 할 때도 주인아저씨는 우리 집에 찾아왔다. 유독 만두를 재우던 시간에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던 주인아저씨는 자기 집처럼 거리낌 없이, 그러나 아주 세세하게 문제를 살폈다. 그러곤 진짜 실세인 아주머니에게 전화로 보고를 했다. 아주머니의 결정에 따라 사람을 불러 수리를 해주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었고, 월세를 올린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웃 간의 문턱이 낮은 베트남 문화를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아기가 있는 집에서 아저씨의 잦은 방문을 환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기 집처럼 사는 세입자는 고마워도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집주인은 절대 반갑지 않은 것이니까. 게다가 나는 유독 화가 많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매번 전화로 굽실거려야 하는 상황도 참 불편했다. 내가 인사를 건네든, 질문을 하든, 요청을 하든 아주머니는 늘 화를 냈다. 전화를 걸어야 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아주머니의 화를 돋우지 않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던 중 만두의 짐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나는 몸과 정신이 모두 보호받을 수 있는 ‘우리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2015년 12월부터 외국인도 베트남 정부의 개발 승인을 받은 아파트, 빌라, 타운 하우스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의 은행 예금이자는 10%를 훌쩍 넘었으니 월세로 지출되는 돈을 모을 수 있다는 건 가계에 경제적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만약 집을 사게 되면 ‘언제고 엉덩이가 다시 들썩이게 될 때 이곳을 훌쩍 떠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다. 만약 우리 집이 생긴다면 이제 ‘만두는 그 동네에 있는 유치원과 학교 중 하나를 다니며 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될 텐데’ 정말 맞는 결정일까?’ 가족의 미래까지 생각하자니 걱정은 끝이 없었다. 나중에 이 집을 팔고 떠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외국인인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이 생기는 건 아닐까? 외국인의 주택 구매와 관련된 법안이 생긴 지 몇 달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집을 사고팔았던 다른 외국인들의 선례가 없어 더욱 불안했다. 그러던 중 이번에도 무엇 때문인지 잔뜩 화가 난 집주인아주머니와의 통화를 하다가 덩달아 내 목소리도 커졌고, 아저씨가 다시 한번 우리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그래, 이건 분명 세입자의 설움이다! 반드시 집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한국에서는 언제고 내 집 마련은 어려운 일이니, 베트남에서나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우린 주말마다 하노이에 있는 모든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보러 다녔다.
돌고 돌아 우리는 결국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바로 앞, 같은 싱가포르 시공사에서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한인타운과의 적당히 떨어진 거리여서 좋았고, 다른 지역의 비슷한 시설의 아파트에 비해 분양가가 저렴했다. 아직 개발이 안된 동네라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었고 인구밀도도 낮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에 비하면 느리게나마 하나둘씩 필요한 상점들이 들어서고 있는 걸 보면 발전 가능성이 있는 동네였다. 이제 개발을 시작하는 동네라는 이유로 젊은 부모 세대들이 많았는데, 페이스북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아파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내고 힘을 합쳤다. 이전 아파트의 분양사무소나 관리실이 그 주민 그룹의 힘을 무시하지 못하는 경험을 했었다. 베트남에선 3~4년만 지나면 건물이 낡아지는 만큼 관리가 중요했는데, Vin Group 등의 베트남 대기업에서 지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회사가 ‘갑’이고 주민은 절대적인 ‘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같은 회사의 아파트에 살아본 경험으로는 이곳은 베트남에서는 드물게 책임감 있는 관리를 해주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파트의 4개 동 중에 제일 먼저 입주가 가능한 첫 번째 동을 골랐다. 그 동의 몇 개 라인만이 나란히 있는 앞 아파트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이유가 컸다. 각 층마다 11개의 집이 있었는데, 집집마다 모두 크기와 구조가 달랐다. 우리는 앞 아파트에 시야가 가려지지 않는 집 중 불필요한 공간이 없는 구조, 그리고 더위와 추위를 고려한 방향의 집을 골랐다. 베트남에서는 중간층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땅에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높은 층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땅에 가까운 너무 낮은 층은 인기가 없었다. 그건 뷰가 안 좋아서 그렇다나 뭐라나.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분양가도 낮아졌다. 물론 제일 꼭대기 층인 40층이 가장 저렴했다. 어릴 적부터 고층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나는 그 높이에 익숙했지만 최상층은 복사열 때문에 너무 더웠다. 결국 우리 집은 33층으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