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주는 성장통

투르게네프 <첫사랑>

by LEAN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첫사랑.


우리는 첫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 첫사랑은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무치게 그리운 세월의 한 조각일 수도 있다.


소설 <첫사랑>은 작가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첫사랑 이야기를 안타깝고도 진솔하게 풀어내려 간 이야기다.



다운로드.jpg 이렌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 르누아르


주인공 열 여섯 살 소년은 이제 갓 성인의 반열에 올라서는 풋내기이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단 둘의 가족이 있는, 귀하게 자란 외동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세련되고 냉정하고 침착한, 중년의 미남자이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연상이면서 부유하고 현실적이고 늘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이다.


어느 날, 주인공은 자기 집의 정원을 거닐다가 옆 집에서 들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주인공은 뜻밖의 풍경을 보게 되고 인생일대의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옆집 정원에서는 젊고 호리호리하며 눈빛이 빛나는, 대단한 미인이 자신을 둘러싼 여러 중년 남성들의 이마를 하나씩 장미꽃으로 톡톡 치며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까르르 웃으며 남자들을 모두 벌주고,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여자의 꽃에 닿을 때마다 기쁨에 겨워 뒤로 발라당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들의 자극적인 유희를 몰래 훔쳐보던 주인공은 곧 자신을 알아차린 한 남자에게 들켜버린다. 남자는 주인공에게 불쑥 말한다. "이봐, 남의 여자를 그렇게 훔쳐보면 안 되지." 화들짝 놀란 주인공은 군중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헐레벌떡 집으로 뛰쳐 들어와 자기 방에 쏙 들어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만다. 드디어 그는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이 때부터 주인공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만 자리하게 된다. 그건 바로, 그 아름다운 아가씨의 사랑과 관심을 조금이라도 받아보는 것. 그 날부로 그는 여왕을 따르는 한 패의 남성들 무리에 끼게 된다. 그 여왕의 이름은 지나이다였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냉혹하며, 수많은 남성을 자신의 뜻대로 거느릴 줄 아는 독재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여러 추종자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는 여왕이 몇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라고 장난스럽게 명령을 내리면 진짜로 뛰어내리고 마는, 아직은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다.


여왕 지나이다는 늘 남성들을 데리고 온갖 재미있는 놀이를 고안해낸다. 흥미롭고 허황된 이야기를 한 명씩 돌아가면서 내놓는다거나, 한 명이 눈을 가린 술래가 되어 다른 이들을 잡으러 다닌다거나,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시를 노래하는 등 지나이다의 집에서는 날마다 즐거운 유희가 펼쳐진다. 놀이가 끝나면 지나이다는 늘 자신이 직접 만든 벌칙을 남성들에게 부과하는데, 이 벌칙을 받는 남성들은 오로지 지나이다의 손길을 한 번이라도 받는데 만족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추종자 중 한 명인 루쉰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에게 대뜸 말을 건다. "이봐 젊은이, 여기서 뭐 하는 겐가?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공부도 하고 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안타까움을 억누르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네. 이곳의 공기는 자네에게 해로워. 우리처럼 늙은 독신자들이야 이곳을 드나들어도 상관 없지. 우리에게 무슨 일이야 일어날라고? 우리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자네 살가죽은 아직 부드럽단 말일세."


영문을 모르는 주인공에게 루쉰은 충고한다. "온실 속의 향기는 좋지만, 그 곳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단 말일세."


이후, 주인공은 루쉰에게 점차 호감을 갖게 되어 그와 친해지고 같이 산책도 다니게 된다. 그러는 동안 지나이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간다. 그늘과 눈물이 자꾸만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다. 그걸 본 주변의 남성들은 하나 둘 눈치를 채게 된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구나!"


자신에게 사랑의 연적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잠 못 이루고 복수심에 바들바들 떨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지나이다가 밤에 밀회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칼을 품고 가서 수풀에 몸을 숨긴다. 여차하면 연적에게 공격이든 뭐든 가할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달빛 속에 등장한 지나이다와 그녀의 연인을 보는 순간, 주인공은 손에 힘이 빠져 칼을 떨어뜨리고 만다. 눈부시게 등장한 지나이다의 연인은 멋진 말 위에 말끔한 얼굴과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자신이 항상 동경해 마지않던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26660_18674_5227.jpg 뱃놀이 일행의 오찬, 르누아르





누구나 아픈 첫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남자가 다름아닌 자신의 아버지라면 과연 어떨까? 어린 시절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멋진 롤 모델로 생각했었던 사람이라면 말이다.


<첫사랑>이라는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알아가는 성장통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정교사의 가르침만 받는 어린 시절을 거쳤던 주인공은 바깥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열 여섯이 되어 사랑에 빠지고 난 그의 눈에 새로운 사실이 하나 둘 들어온다.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척하는 교묘한 여인의 유혹, 사랑의 합일점을 찾지 못하는 부부 사이, 그리고 꿈결같지만 해로운, 온실로 상징되는 환락의 세계.


이 책을 보면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아마도 주인공은 소년에서 성인으로 발돋움하기 전, 자신의 알을 깨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알 속의 세계는 어머니의 품 속 같이 평화롭고, 따스하고, 안전하다. 하지만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외부로 나아가기 전에는 진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내면에 대해서도 반쪽만 알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쾌락이 행복을 주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해롭지만 달콤한 공기에서 벗어나려 할 때, 우리는 알에서 깨어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소설 <첫사랑>은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서 다룰 뿐 아니라, 인생에서 각자가 겪는 전환기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세월을 거슬러 여러 독자에게 무한한 공감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168cc246c6aede312e9879c4455f0def.jpg 그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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