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인생 아는 척하는 에세이 #4
1년에 한 번 여는 호캉스 데이
대학친구들과는 벌써 15년 넘게 함께 하고 있다.
지방에서 서울 대학으로 올라와 고되고 외로울 수도 있는 삶 속에서 친구들은 나의 소중한 안식처였다.
같은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거의 모든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었으며 첫 대학친구이자 첫 미팅, 첫 일탈 등을
함께 했다. 별명만 띄우면 누구의 과거 남자친구였는지, 그 남자친구와의 세세한 사연까지 모두 읊을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20대 추억거리의 대다수를 함께 한 이들이 그들이었다.
졸업 후 누군가는 자신의 고향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서울 어딘가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정신없이 살아냈으며 바쁜 일상으로 여전처럼 식사 한 끼를 나누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카톡>이라는 문명에 힘입어 여전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직장 상사 욕부터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인지, 퇴근하고 나는 뭘 하고 있는지까지 굳이 안 궁금한 정보까지
알려주고 있기에 1년에 한 번 만나더라도 서로의 일상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다.
1년에 5만 원씩, 등급도 조금씩 업그레이드
우리의 <호캉스 데이>는 고향으로 내려간 친구가 서울로 올라오는 날로 정해진다.
친구가 연휴를 틈타 올라오겠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알려주면 거의 그날로 시간은 정해진다.
<호캉스 데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나의 제안으로 시작한 것도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하고 싶은 대화는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고 무엇보다 체력도 달리는 우리의 성향상
숙소에서 파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편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에는 신라스테이 등 저가형 숙소에서 만나기 시작했고
30대로 들어가면서 점차 수입이 늘어나자 우리는 조금씩 숙소를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숙소 어디 갈래?"
"여기 어때! 으악, 연휴라서 엄청 비싸네. 저번에 추천해 준 곳은 100만 원이여."
"뭐?! 백만 원이라고. 거기는 안 되겠다. 연휴라서 엄청 많이 받네."
남편과 저번 결혼기념일에 다녀온 여의도 페어몬트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연휴에 1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보고 1초 만에 취소됐다. 평소 30~40만 원대였는데 연휴 효과는 역시 무시 못 한다.
"용산 호텔들도 거의 다 찼네. 그래도 35만 원 호텔도 있어."
"제휴 프로그램 찾았어! 여의도 페어몬트도 45만 원대에 가능해!."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됐다.
분명 만나면 배달 음식도 엄청 시켜 먹을 테고, 다음 날 점심도 먹어야 한다.
숙소에 30만 원을 태워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좋은 숙소를 찾아 40만 원대을 태워야 할지!
심도 높은 고민을 하다 결정했다.
"올해는 30만 원대로 가자. 내년에 5만 원씩 올려서 40만 원대로 가! 묻고 떠블이다!
(현실은 더블이 아님^^)"
빠른 결정으로 30만 원대 호텔로 결정했다. 아직 40만 원대는 조심스러우니 30만 원대로 결정된 것이다.
인 당 나누게 되면 8~10만 원 꼴이니 가볼 만하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시간이니 이 정도는 사용해도 된다는 게 우리의 합의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매 해 5만 원씩 가격을 올릴수록 호텔 등급도 올라가게 됐다.
물론 딱 5만 원으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한 살씩 먹을수록 숙소 등급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다들 1년 간 열심히 살아온 자신들의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10년 넘게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20대의 인생을 함께 한 친구들과 1년 만에 만나는 자리여서 그런지 그때만큼은
닫혀 있던 지갑의 문을 활짝 연다.
친구들과 만나면 평소와 같이 언제나 똑같이 반갑고 즐겁지만 24시간을 붙어 있으면서 문득 친구들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도 조금씩 보이게 된다. 20대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이기에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살짝 인생에 대한 서글픈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다. 이들을 비추어 조금씩 나이 들어가고 있는 나를 본다.
그럼에도 작년에는 어떤 호텔을 갔는데 이런 점이 좋았다든지, 내년에는 돈을 더 모아 어디를 가자고 웃으며 새로운 추억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다.
20대, 30대, 40대. 이렇게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들이 곁에 있어줘서 그런지 조금 덜 외로운지도 모르겠다.
매해 숙소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지난날의 보상과 더불어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내년에 승진 예정이니까, 내년에는 급여가 조금 더 오르니까 그때는 숙소 가격을 조금 더 올려봐도 될 것 같아.' 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도 매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라고 외치는 우리만의 표현이 녹아져 있다.
숙소를 최종적으로 정하고 다른 친구가 말했다.
"열심히 돈 벌어서 언젠가는 우리 신라호텔 가서 우아하게 커피도 한 잔 하고 수영장에서 수영도 멋들어지게 하자!"
우리는 또 다른 추억과 목표를 향해 그렇게 다음 1년의 만남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