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를 일
침대 밑으로 꺼질듯한 몸으로 눈 뜬 이른 새벽, 어젯밤 마음을 가다듬으며 적은 편지 몇 장이 간이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급격하게 정현의 몸은 진통제를 뱉어내고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받아 오면서 한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날이 불가 며칠 전인데 생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인간의 나약함을 느낀 정현이었다. 두 다리를 내리고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팔, 다리 그리고 온몸의 배터리가 닳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는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생각과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입원을 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나은 선택인 순간이 가까워진 듯했다. 그 전에 남기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부엌으로 자리를 옮긴 정현은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내려 한 컵을 다 마셨다. 몸이 약해지고 나서는 소화기관을 통하는 물질의 영향이 꽤나 잘 느껴졌다. 장기에 온기가 닿으며 약하게나마 혈기가 도는 듯 했다.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하다 핸드폰을 들어 혜선과 도영이 함께 있는 채팅창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거실로 가, 창 밖을 보며 하늘이 온전히 해로 가득할 때를 기다렸다. 준희가 혹여나 메시지 알람에 깰까 조심스러웠다.
정오가 다가오는 늦은 아침, 준희는 부은 얼굴과 버석한 상태로 잠에서 깼다. 손님방에서 잠든 은영은 아직 한참 자는 듯했다. 거실로 나와 커튼과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훅 들어오자 준희의 정신을 한 번에 깨웠다.
"으"
밤새 뜨거워진 방의 환기를 시키려 잠시 창문을 열어두고 부엌으로 가 미온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치워둔 식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고 커피 캡슐을 꺼내 커피도 한잔 내렸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별다른 메시지가 없자 아쉬운 듯 프라이팬을 꺼내 계란을 깨어 반숙 후라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해?"
잠에서 깬 은영이 방을 나와 부엌으로 다가갔다.
"잘 잤어?"
"후라이 하는 중"
"잘 맞춰 일어났네"
"잠깐 앉아 있어"
"금방 돼"
"응!"
은영은 익숙한 듯 커피캡슐을 꺼내 자신의 커피도 한잔 내리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하~"
"역시 아침엔 커피"
준희는 그녀 앞에 계란과 토스트를 놓아주며 같이 앉았다. 은영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졸린 눈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응?"
"한국 왔으니까"
"뭐 다시 서점을 연다거나?"
"글쎄"
"그대로 열기보다"
"뭔가 새로 단장하고 싶은데"
"으응~"
"그래"
"뭐"
"천천히 해~"
은영이 토스트를 마저 베어 물자 준희의 핸드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정현이었다. 준희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가자 은영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야?"
"정현이"
"으음"
"뭐래?"
"그냥"
"일어났냐고"
은영이 준희를 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정현이는 어떻게 할 거야?"
"응?"
"많이 아프다며"
"..."
"내가 매정할 수 있지만 난 네 친구니까 하는 말이야"
"네가 힘들어질 거 같아"
".."
"지금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어"
"..."
"후회하고 싶지 않아"
"시간도 별로 없다면"
"그럼 더 최선을 다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는..."
"그게 뭔데?"
"..."
"내가 필요하다면 옆에 있어주는 거?"
"그럼 너는?"
"나?"
"응. 너"
"나도 원해서 그런 거니까.."
"휴"
"상태는 정확히 어떤 거야?"
"글쎄.."
"확실히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보다 많이 안 좋아진 거 같아"
"기력이 없어 보이거든"
"..."
"파티나 하자"
"연말 파티!"
커피잔의 손잡이만 매만지며 울적해보이는 준희를 위해 은영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파티?"
"갑자기?"
"응"
"정현이 친구들도 부르고!"
"얘기해볼게"
"하암~~"
"난 좀 씻을래"
"어제 그 나쁜 놈 때문에 울었더니 눈이 부은 거 같아"
"풉"
은영이 씻으러 간 사이 준희는 정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준희의 집으로 정현과 정현의 친구들을 초대해 바비큐파티를 하는 것이 어떻냐는 이야기였다. 정현은 흔쾌히 수락했고 친구들에게도 물어보겠다는 답을 해왔다. 바로 이어 혜선과 도영이 말이 나온 김에 바로 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과 정현 역시 동의한다는 답을 보내왔다. 준희 역시 정현이 어떻게 될까 하루하루가 아쉬워 수긍했다. 모두의 마음이 같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네가 했던 서점 가보고 싶어'
오늘 저녁 바비큐파티 약속을 정한 뒤, 이어 온 정현의 메시지였다. 준희는 먼지가 쌓여있을 서점을 생각하며 미리 치워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바비큐 파티 전, 조금 일찍 오라는 답을 보냈다. 서점은 준희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 있어 잠시 들릴 수 있었다. 은영이 씻고 나와 분주한 준희를 보았다.
"뭐해?"
"오늘 파티하기로 했어!"
"그리고 좀 있다가 정현이가 먼저 올 거야"
"서점 가보고 싶대"
"오늘??"
"그래 뭐, 오늘 별일 없기는 하지"
"그럼 둘이 다녀와!"
"난 그냥 누워서 쉬고 있을게"
"대충 준비는 해둘 테니까 둘이 장도 봐오고"
"그럴래?"
"그래"
"아, 그 정현이 친구들도 다 오기로 했어!"
"오! 재밌겠다"
정현은 때맞춰 준희가 파티를 제안한 덕에 도영과 혜선에게도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다 함께 보낼 시간을 고민하던 차, 준희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이다. 준희가 운영했다던 서점에도 가보기로 했다. 그녀의 공간을 하나 더 보게 되어 기대로 부풀었다. 준희네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하며 평소보다 두텁게 입은 품 안에 밤새 쓴 편지 한 통을 챙겼다. 정현은 편지가 어떻게 그녀에게 전해지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그 때 머리를 스친 것은 준희의 서점이었다. 정현은 차를 끌고 가는 대신 택시를 불렀다. 불을 켜둔 것이 없는지 집을 한번 돌아보고는 택시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섰다. 오늘도 하늘에서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차가운 입김이 눈송이들 사이로 퍼져 나가고 택시 한 대가 정현의 앞에 섰다. 택시에 오른 정현은 준희에게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편지를 품은 오늘 정현의 마음은 작은 가시에도 터질 듯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감정이 터져나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시린 바깥공기로 겨우 얼려두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자 준희네 집 앞에는 금세 도착했다. 정현이 택시에서 내리자 준희가 밖에 세워둔 차에서 내리며 그를 반겼다.
"정현아"
"어, 추운데"
"밖에서 기다렸어?"
"아니, 차에 있었어"
"가깝긴 한데 눈도 내리고 추우니까 타고 가자"
"얼마나 걸려?"
"차로 한 오분?"
"걸어서 십오분 정도?
미리 히터를 틀어 둔 덕에 준희 차 안은 따뜻했다. 정현이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한 준희의 배려였다. 출발한 지 얼마 안되 준희가 작은 가게 옆, 차고지에 차를 세웠다.
"정말 가깝네"
"응, 날씨 좋을 때는 그냥 걸어 다녔어"
준희가 가게 문을 열고 정현이 따라 들어섰다. 10평 정도의 작은 공간에 책이 띄엄띄엄 진열되어 있었고, 카운터 쪽에는 커피 머신 하나가 놓여있었다.
"머신도 있네?"
"응, 아메리카노만 같이 팔았었어"
"와"
"멋있다"
"미리 청소 해놨으면 커피 한잔 내려줬을텐데"
겨울의 찬 공기와 목재 가구 냄새가 섞여 그 공간을 가득 메웠다. 우후죽순 많은 책은 들여놓지 않은 것이 준희를 나타내는 듯했다. 여기에 커피 향을 더해 서점을 운영했을 준희를 상상하니 함께 하지 않은, 않을 순간이 궁금하고 그립기까지 했다. 준희는 서점을 둘러보는 정현을 가만히 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의 사진을 몰래 찍었다. 눈치채지 못한 정현이 카운터 주변을 서성이다 준희가 있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자"
"여기 너무 좋다"
"언제 다시 열거야?"
"따뜻해지면?"
"필요한 거 있어?"
"필요한 거?"
"응"
"글쎄.. 쓰읍"
"사주려고?"
"응"
"재오픈 선물로"
준희는 문을 잠그며 말을 이어나갔다.
"식물 하나 큰 거 들이면 어떨까 싶긴 한데"
"닫을 때 화분은 정리했었거든"
"아~"
"그랬구나"
준희는 차에 시동을 걸며 히터를 틀었다.
"으 추워"
"춥지?"
"조금"
"근데 서점 봐서 너무 좋았어"
"어떤 식물이 좋아?"
"식물?"
"음.."
"전에는 홍콩야자가 있었는데.."
"네가 주고 싶은 걸로 줘"
"음"
"그래"
"자..그럼 마트에 갔다가 가자"
"장 봐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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