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준희와 혜선은 각자 한 손에 봉지를 들고 정현의 집으로 올라갔다. 혜선은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나랑 도영이만 알아"
"근데 난 이럴 때만 누르고 들어가"
"막 누르고 들어가긴 좀 그렇잖아"
준희는 셋의 관계가 꽤나 신기하고도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어렸을 적부터 친구라고 해도 개인적인 것을 공유하고 서로를 믿고 배려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왔어?"
"뭐 이렇게 많이 사왔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영이 다가왔다.
"그냥 딸기랑 이것저것 샀어"
"그럼 이제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앉아서 좀 쉬고 있어"
"금방 구울게~~"
부엌에서 정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 좀 씻을게"
밖에 나갔다 온 준희가 찝찝한 듯 얘기했다.
"풉"
"너 정현이랑 똑같아"
"나도 씻지 뭐"
혜선이 웃으며 준희를 따랐다.
정현이 세팅을 마친 식탁에는 인당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린 고기 덩어리와 아스파라거스가 있었고, 방울토마토와 리코타 치즈를 섞은 샐러드 접시 하나와 딸기는 꼭지를 따고 먹기 좋게 잘라 접시에 듬뿍 올려져 있었다.
"마실 거는 뭐 줄까?"
“이걸로 덜어먹어”
"오렌지 주스 마실래?"
정현이 컵에 주스를 따르며 앉은 준희, 혜선, 도영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냥 물 마실게"
정현은 생수를 꺼내 도영의 잔에 따라 주고는 혜선과 준희에게 주스가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맛있겠다"
"건배할까?"
준희의 말에 이어 도영이 잔을 들며 건배를 제안했다.
"그러자"
"뭐라고 하지?"
"음.."
"그냥"
"만나서 반가워-"
도영이 준희 쪽으로 잔을 들며 얘기했다. 도영의 장난에 정현, 준희, 혜선이 덩달아 웃으며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적당한 핏기와 익힘으로 구워진 고기는 입에서 녹았고 고소한 버터향이 입맛을 돋구었다. 정현의 요리 실력을 칭찬하며 연신 깔깔거리다 혜선이 먼저 둘에 대해 물었다.
"근데 너흰 어떻게 만나게 된거야?"
"그래, 얘기 좀 해봐"
"준희 너는 캘리포니아 어떻게 가게 된거야?"
"나는.."
"그냥 쉴 겸 갔었어"
"좀 쉬고 싶었어"
"그래 그럴 때 있지~"
"그리고?"
"내가 지나가다가 카페를 들렀는데"
"거기에 준희가 있더라고"
"오~~~!"
"그래서?"
"그래서 같이 얘기도 하고"
"내가 같이 놀자고 했어"
"그렇게 친구가 된거지 뭘"
"친구?"
혜선과 도영은 둘의 한계를 느낀 듯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야, 이것도 정말 인연이지"
도영은 화제를 돌리려 목소리 톤을 올렸다.
"자주 이렇게 보자"
혜선은 도영의 말이 끝나자 준희를 보며 얘기하며 웃어 보였다.
"한국에서는 뭐해?"
"아직 계획은 없는데"
"서점을 운영했었는데“
“잠깐 닫고 캘리포니아 갔었거든"
"다시 열까 싶기는 한데"
"재정비를 좀, 하고 싶어서 고민이야"
"와~ 서점?"
"다시 열면 꼭 초대해줘"
"궁금해"
"알겠어"
"놀러와"
"너희는?"
"나는 브랜딩 하고 있어"
"회사 다니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는 얼마 안 됐어"
"와~"
"멋있어!"
"아직 그렇게 잘 나가지는 않아"
"포트폴리오 올려두고 개인 의뢰받아서 조금씩 하고 있어"
"도영이는 정현이랑 똑같아"
"회계사"
"아~?"
"친구 따라 강남 간다잖아"
"정현이 따라간 거지 뭐"
도영이 너스레를 떨며 혜선의 말을 이었다.
"그것도 똑똑해야 따라가지"
"정현이랑 도영이 머리가 굉장히 좋아"
혜선이 정현과 도영을 놀리듯 얘기하자 준희가 따라 웃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사사로운 얘기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였다.
"잘 먹었어"
"이제 우린 갈게"
정현이 마무리로 내려준 커피를 마저 마시며 혜선이 말을 꺼냈다.
"!"
준희가 눈썹을 올리며 굳이 혜선을 말리지 않았다. 이에 도영 역시 눈치를 채고 혜선과 자리를 정리했다.
"몸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현관문 앞에 선 혜선이 준희와 정현을 번갈아 보며 얘기했다.
"무슨 일은"
"이제 괜찮아"
"조심히 가"
"배부른데 우리도 산책 좀 할까?"
"그릇 먼저 치워야 하지 않아?"
"그건 좀 있다가 내가 할게"
"아냐, 도와줄게. 지금 얼른 하자"
정현을 도와 준희는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고, 정현은 음식물을 정리한 후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옮겨 담았다. 순간순간 마주치는 시선에도 미소가 흘러나왔다. 준희는 테이블에 살짝 기대어 가만히 정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인기척을 느낀 정현이 돌아보며 준희를 보았다.
"아니, 그냥"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멋쩍게 웃는 준희의 얼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 했어. 가자"
정현은 씻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준희의 시선을 마주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서자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길바닥과 소나무 가지마다 눈송이들이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와"
"눈이야"
정현은 준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준희는 손바닥을 내밀어 눈을 느껴보려 했다. 머리카락만 날릴 정도의 바람에도 곧잘 흩날리는 정도의 눈송이라 손바닥의 온기에는 금방 녹아 사라졌다.
"우산 가져올까?"
"아냐, 이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아"
"저-기"
"저기 앉을까?"
아파트 단지 내 산책길에 놓인 의자와 하얀 파라솔을 발견한 준희가 손으로 가리켰다. 파라솔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뒤로는 나무 조경이 형성되어 편안한 자연 쉼터로 느끼게 했다. 그 위로 떨어지는 하얀 눈이 공기 중의 소음을 차단한 듯 둘만의 음성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손 시리지?"
"여기 근처에 편의점 있는데 따뜻한 거라도 하나 사올까?"
"음.."
"그래!"
"잠깐만 기다려"
정현은 산책길을 따라 코너만 돌면 있는 편의점으로 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샀다. 양 손에 커피를 들고 돌아가는 길에 준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양손을 짚고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어깨 뒤로 늘어져 있었고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볼과 코 끝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
"고마워"
정현은 준희에게 커피를 건네며 옆에 앉았고 준희는 뚜껑을 열어 커피의 온기를 느끼며 한입 마셨다.
"하-"
그녀의 입에서는 다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좋다"
"나도"
정현은 웃으며 그녀를 한번 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커피에 입을 대었다.
"사진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거 맡겨뒀어"
"찾으러 가야해"
"언제 갈까?"
"같이 가자"
"이번엔 꼭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