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지는 부스러기들
"으 춥다"
준희 손에 들린 커피가 식어갈 때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은영이네?"
"잠깐만"
"어, 은영아"
"뭐?"
"아유, 그만 울고"
"나? 정현이 만났어"
"응, 괜찮아."
"그럼 우리 집으로 와"
"응~"
"무슨 일이야?"
"은영씨 울어?"
"남자친구랑 헤어졌대"
"오늘 우리 집에서 자도 되냐고 해서"
"오라고 했어"
"!"
"그럼 가자"
"못 데려다줘서 미안"
"아니면 내가 운전해줄까?"
"그럼 너는 뭐 타고 오고"
"택시 타고 오지 뭐"
"그럼 그러던지"
"파하하"
"그냥 들어가서 쉬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오늘 퇴원했는데 좀 쉬어야지"
정현과 준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따뜻하게 열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음을 부수듯 산책길 옆 도로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쾅"
"악"
준희는 굉음에 치인 듯 다리에 힘이 풀려 쭈그려 앉으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양손 끝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준희야"
"괜찮아?"
정현은 처음 보는 준희의 모습에 놀랄 새 없이 한껏 긴장했다.
"흐으으윽.. 흐으윽"
"준희야"
"흐으윽"
정현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슬쩍 보고는 다시 준희의 어깨를 감싸며 팔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어디 사고 난 거 같아"
정현의 품에 안긴 준희는 울음소리가 잦아들면서 진정되고 있었다. 그녀의 떨림이 멈추는 것을 느낀 정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갈 수 있겠어?"
"내가 데려다줄게"
준희는 자신을 안고 있는 정현만이 느낄 수 있도록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준희의 차 운전대를 잡은 정현은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준희에게 묻지 않았다. 말하고 싶을 때 그녀가 먼저 얘기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현은 아무 말 없이 내비게이션에 찍혀 있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조용히 도로만 달린 지 20분 여정도가 지났을까 준희가 입을 열었다.
"아빠한테 차 사고가 났었어"
"나랑 통화 중이었는데.."
"그래서 그 소리가 다 들렸어"
"..."
준희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었고 차분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살짝 얼굴을 닦아내는 듯했지만 정현은 고개를 돌려보지 않고 앞만 보았다.
"아빠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나봐"
"그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어"
"...."
"아빠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바쁘다고 했어"
"..."
"그래서 목소리라도 듣자고 그날 전화를 한 거였어"
"바쁘기는..."
"피곤하고 귀찮았어"
"..."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간 거야"
"그랬구나"
"실망이지?"
"실망이라니"
"사고는 정말 사고고"
"부모 자식 간에 정말 있을만한 대화잖아"
정현이라면 진심이라는 것을 준희는 알았지만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는 것도 마음이 쓰였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 날들을 정현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
"다 왔다"
준희는 동네로 들어선 것을 알아채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마워"
"피곤하지?"
"괜찮아"
"여기야?"
"집 예쁘다"
정현은 차에서 내려 준희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들어갔다가 갈래?"
"내가 택시 불러줄게"
"올 동안 안에서 기다려"
"그럴까?"
"그럼 따뜻한 물 한잔만 줘"
정현은 준희의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작은 정원과 단정한 주택의 외관이 준희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기 바비큐 그릴도 있네?"
"응"
"저기서 해 먹으면 더 맛있어"
"다음에 같이 그릴에 해 먹자"
준희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불을 켜고 보일러를 올렸다.
"잠깐만"
부엌으로 간 준희는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내려 정현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준희가 핸드폰을 들어 택시를 부르려 하자 정현이 만류하며 자신의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금방 도착하네"
"5분 뒤에 온대"
"여기 잠깐 앉아"
준희가 정현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집이 조금 어수선하지?"
"캘리포니아 갔다 와서 치운 건 가져온 짐 밖에 없어서"
"아냐"
"깨끗한 걸?"
"이건 가족사진이야?"
"아, 응"
거실장 위에 올려진 작은 액자에 어린 준희와 부모님이 정원에서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정현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차에서 들은 준희의 사연에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택시 왔나봐"
"가볼게"
"어? 응응"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추워"
"아냐, 갈래"
준희는 정현을 따라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이미 도착해 대문 밖에 선 택시문을 열며 정현은 손을 들어 준희에게 인사했다. 준희는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대문 밖에서 바라보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 집에 혼자 남겨질 때면 공허함이 준희를 감싸곤 했지만 정현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보다 더 큰 시림이 느껴졌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자리를 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
준희는 집으로 들어가 은영에게 메시지를 남기고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고 있는 은영을 위해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이별의 속풀이를 할 그녀를 위해 매운 떡볶이와 햄버거 세트로 주문했다.
"준희야~~!!! 흐어엉"
준희의 집에 도착한 은영은 들어서자마자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를 거실 바닥에 앉히고 배달된 음식의 포장을 뜯었다.
"무슨 일이야"
"먹으면서 얘기해봐"
은영은 햄버거를 먼저 한입 베어 물며 웅얼거렸다. 은영은 남자친구에게 실망을 했고 이별을 고한 사연을 얘기했다.
"어떻게 나보다 친구가 먼저야?"
"나한테 와야 하지 않아?"
"게다가 그날 내 일정을 말했었다고!"
"으음. 그러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몰랐나?"
"됐어"
"필요할 때 없으면 그게 무슨 남자친구야"
"내가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까지 했는데!"
"난 내가 항상 먼저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렇기는 하지"
"이거 먹고 풀자"
"흐어어엉"
"그래도 눈물이 나"
은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준희는 정수기에서 얼음을 받아 콜라를 담아 건네주었다.
"자"
"끅끅"
은영은 준희가 준 콜라를 빨대로 마시며 진정했다.
"너는 오늘 어떻게 된 거야?"
"정현이 만났어?"
"아, 응"
"정현이 퇴원할 때 가서 친구들도 만났어"
"그래?"
"어때"
"정현이는 괜찮아?"
"응.."
"지금은 괜찮아"
"준희야"
"네 맘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너무 마음 주지마"
"힘들거야"
"마음대로 안되지.."
"친구들은 어때?"
"혹시 그때 공항?"
"응, 맞아"
"어릴 적 친구들이더라"
"정현이가 집에서 요리해줘서 같이 먹었어"
"우와"
"여기 너희 집에 초대해서 같이 놀자!"
"바비큐 파티도 하고!"
"풉"
"안 그래도 아까 정현이랑 그릴 얘기 했어"
"다음에 시간 맞춰보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정현은 부모님을 만났다. 정현의 상태를 자주 확인하기 위해 오신 부모님은 정현이 없자 연락하려던 차에 그를 만났다. 같은 동 위층에 살아 정현을 보러 오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정현은 기다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했던 터라 웃을 힘이 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에게 입원 생활을 권유했지만 정현은 마지막을 그저 병실 안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싶지 않음을 결심했기에 다시 한번 거절했다. 그의 단호한 결정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하라는 말만 전한 채 부모님은 돌아갔다. 정현은 부모님의 뒷모습에 왠지 마음이 아팠지만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은영의 아버지 얘기를 떠올리며 자신이 떠난 자리를 느낄 가까운 사람들이 덜 아파하기만을 바랐다. 정현은 욕실로 가 뜨거운 물로 몸과 복잡한 정신을 씻어내렸다. 가운을 입은 개운한 모습으로 허브티 한잔을 만들었고, 침실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이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