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애소설]14화 유일한 예외

예외의 허용 그 특별함

by 문화

준희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한 정현은 심란했다. 다음에 보자라는 말과 함께 준희의 전화를 끊고서 무기력한 듯 생각에 잠겼다. 그의 모습에 도영과 혜선이 쉬라는 말만 남기고 눈치껏 자리를 떴다. 정현은 이제 이렇게 아쉬워야 할 순간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럴 때마다 남겨질 준희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생각만큼 준희가 힘들어할 것이라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일말의 허전함조차 주고 싶지 않은 바람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지만 그 시간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이 얼마나 사람을 외롭게 하는지 정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잊고 누군가로 다시 그 자리를 채울 일까지 상상하는 것도 정현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준희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잊지도 않길 바라는 양가의 감정들이 정현을 혼란스럽게 했다.

한참 지났을까. 병실 창문으로 붉은빛이 들어와 채우기 시작했다. 정현은 핸드폰을 들어 준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니 생각이 너무 멀리 갔다 왔음을 느꼈다.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 밖에는 없다. 어쩌면 준희가 원하는 것도 그것일 수 있었다. 후회 없이 마음을 나누는 것.




"박정현, 괜찮아?"


다음날 이른 아침,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도영과 혜선이었다.


"응. 괜찮아."

"일찍 왔네."


"어휴, 진짜 내가 얼마나 놀랐었는데."


"너네 아니었으면 큰일났지."

"고맙다."

"집에 가서 그 닭이나 마저 먹을까봐."


혜선이 정현의 말에 웃었다.


"살아났네, 박정현"


"준희도 곧 올 거야."


"준희씨?"


"응. 많이 걱정했나봐."


"그럴만도 하지. 얼마나 놀라셨겠어."




병실 문이 열리고 준희가 들어왔다. 혜선이 보기에도 며칠 전에 본 준희와 달리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꽤나 마음고생을 한 듯 보였다. 혜선은 그녀가 안쓰러웠다. 준희의 마음을 들어보진 않았지만 끝이 보이는 관계를 시작한 그녀가 동경스럽기도 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늘 안정적인 관계에서만 마음을 내비친 자신이 계산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그녀였다. 도영이 나가자는 말과 함께 준희와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다.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환복을 마친 정현이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얘기해."


"다 챙겼어?"

"그냥 가면 돼?"


"응. 퇴원수속은 아까 부모님이 하고 가셨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


"너희가 있어 다행이라고 하시더라."

"다음에 밥이나 먹쟤."


"좋지."


"그럼 어떻게 갈 거야?"


혜선이 도영과 정현의 대화만 듣다 정현과 준희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준희랑 타고 가."


혜선이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그들에게 얘기했다. 그 말에 도영 역시 살짝 놀란 듯했으나 이어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


"그래. 준희씨랑 가. 아니, 준희"


"뭐야, 그새 너희 말 놓은 거야?"


준희가 혜선과 도영을 보고 미소 짓다 정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갈래?"

"너네도 배고프지 않아?"

"내가 만들어줄게. 같이 먹고 가."


"됐어. 그냥 둘이 놀아."


혜선은 정현의 눈치 없는 말에 핀잔을 주었다.


"아냐, 같이 가자. 먹고, 같이 놀다 가자"


준희는 정현이 혜선과 도영을 그냥 보내기엔 미안해하는 것 같아 그 마음을 도왔다.


"그럴까?"


도영은 거절 않고 정현과 준희를 따랐다. 그들의 더 자세한 얘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넷은 주차장으로 이동해 도영의 차에 혜선이 타고, 준희의 차에 정현이 올랐다. 준희의 차가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도영의 차가 그 뒤를 따랐다. 도영과 혜선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따라 가기로 한 것이다.




"어제 많이 놀랐지?"


"응"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근데 그렇게 차갑게 얘기하고.."


"그렇게 느꼈어?"

"미안"

"그때는 마음이 너무 복잡했어"


"어떻게 된 거야?"


차에 둘이 남은 정현과 준희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정현은 그날 아침부터 친구들이 왔던 것과 쓰러진 상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준희는 그 얘기를 들으며 어제 하루동안 느낀 많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정현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다시 자각시켜 주는 듯했다.

준희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정현의 집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뒤이어 도영의 차가 도착했고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현의 집으로 들어갔다. 준희는 한국에서 정현이 살고 있는 공간을 처음 보기에 낯설고 어색하게 거실로 들어섰다. 구석구석 그의 흔적이 궁금한 준희의 마음을 알아채듯 혜선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라며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어? 그럼 구경할래? 편하게 봐."


정현은 준희에게 침실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침실 협탁에는 작은 조명과 올리브 화분이 놓여있었다.


"이거 올리브야?"


"어, 맞아"


그의 침실 인테리어는 아늑하고 따뜻한 톤으로 가득했다. 왜인지 모르게 정현의 개인적인 공간은 블랙과 실버로 조합된 도시적인 느낌일 거라 상상했는데 화이트우드톤의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욕실로 가는 길목에는 정현이 사용하는 향수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정현을 처음 인식하게끔 한 그의 향이었다.


"깔끔하네 역시"


"뭐 많이 없어서 그래"

"물건을 모아두는 편은 아니거든"


준희와 정현은 혜선과 도영이 있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뭐 먹고 싶어?"


"나는 아무거나"


"한식? 아니면 양식?"


정현이 준희와 혜선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음"

"나도 둘 다 괜찮은데"


"정현아 오늘은 고기를 좀 구워봐"


도영과 준희가 다 좋다고 하자 혜선이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그럼 토마호크 구워줄게."

"그거랑 디쉬 몇 개 하지 뭐"


"집에 그런 게 있어?"


"부모님이 왔다 가셨더라고."

"가끔 본인들 거 사실 때 같이 사다주셔"


"와. 멋있다."

"그럼 혼자 있을 때 해 먹는 거야?"


"응. 자주 해 먹어"


"와~부지런해. 나는 혼자 해 먹는 건 귀찮아"


"파하하, 내가 자주 해줄게."

"근데 지금 아스파라거스랑 드레싱이 없는 거 같은데"


"그럼 우리가 가서 사올까?"


정현과 준희의 대화를 듣다 그 외 재료가 없다는 정현의 말에 혜선이 먼저 제안했다.


"아냐, 내가 가서 사올게"


도영이 대답하며 나갈 채비를 하려는 듯 움직였다.


"아냐, 내가 같이 다녀올게"


도영이 움직이자 준희가 만류하며 혜선을 따라 움직였다.




혜선은 준희와 정현의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한결 편해진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상가에 다 팔더라구"


"아~ 자주 왔었어?"


"응. 정현이가 독립하고 종종 요리를 해줬었거든."

"사람 많고 그런데보다 그냥 정현이 집에서 조용하게 먹고 노는 걸 좋아했어."


"의외야"

"정현이는 외향적으로 보여서 사람들이랑 밖에서 어울리는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럴 때도 있는데"

"정말 가까운 사람들이랑은 이렇게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거 같아."


"그렇구나"


"거짓말이 아니구 정현이 집에 우리랑 있을 때 다른 사람을 같이 초대한 건, 준희 너가 처음이야."


".. 그래..?"


"신기해"

"우린 고등학생 때 만났거든"

"정현인 자기가 만든 바운더리에 다른 새로운 사람을 넣는 편이 아니야"

"그래서 나나 도영이도 정현이의 다른 지인들이랑은 같이 어울린 적이 없어"

"그게 편하대"

"근데 준희 너는...."

"아마 도영이도 내색은 못했지만 엄청 놀랐을 걸."


"그렇구나.."


준희는 혜선과 장을 보며 표면적으로는 그녀와 채소의 신선도에 대해 토론하는 듯했으나 정신은 어떻게 정현과 만나 어떻게 이 순간에 있는지 운명에 관한 고찰뿐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그와의 순간을 꿈이라 여겼다면 한국에서는 그 꿈이 현실로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