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의 오류
전화를 끊은 준희는 무기력했다. 그가 넘을 수 없는 선을 긋는 듯했다. 관계의 현실이 마음을 시리게만 했다.
"왜?"
"정현이 무슨 일 있대?"
준희의 모습에 은영은 정현을 걱정하는 듯했지만 준희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생기 있는 준희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 불과 며칠이 안되었는데 또다시 준희에게 그림자가 드리울까 노심초사했다.
"모르겠어"
"못 온다네"
"그래?"
"그럼 사진은 다음에 찾고.."
"뭐 먹고 갈까?"
".."
준희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은영에게 애써 관심을 돌리려 했다.
"배고프지?"
"은영이, 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준희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은영은 눈치챘지만 그녀를 이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불안해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아까 내가 얘기했던 거기 가자."
"거기 트리 너~무 예쁘게 해놨어~"
"사진 찍어야지. 히"
은영은 시동을 걸며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어나갔지만 준희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와~~"
"준희야, 여기 봐봐."
"나 여기서 사진 찍어줘."
은영은 호텔 레스토랑에 설치된 대형 트리 앞에서 한껏 포즈를 취했다. 준희는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연신 사진과 영상을 찍어주었다. 은영과 있는 순간순간 복잡한 마음은 잠시나마 외면할 수 있었다.
"보자.. 뭐 먹지"
"먹고 싶은 거 시켜"
"오늘은 내가 사줄게"
"뭐~~!?"
"왜!"
"공항까지 마중도 나오고 오늘도 나 때문에 나온 거잖아."
"고마우니까"
"에이~뭐 우리 사이에."
"알았어! 그럼 네가 살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은영은 직원을 불러 흡족하게 메뉴를 주문했다. 준희가 찍어준 사진을 확인하다 먼저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은영은 다시 준희를 살폈다.
"괜찮아?"
"응.."
"괜찮기는"
"....."
"준희야...."
준희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한 방울에 흠칫하며 테이블 위 티슈로 살짝 닦아내었다.
"목소리가 너무 차가웠어."
"..."
"안 좋은 일이 있는 거 아닐까?"
"..."
준희는 젖은 티슈로 눈을 다시 한번 눌러 닦았다. 직원이 음식을 서빙하는 동안 은영은 눈짓으로 음식 설명을 거부했고 직원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은영은 준희 앞에 놓인 접시를 가져갔다.
"내가 잘라줄게."
은영은 썰어진 스테이크 접시를 다시 넘겨주며 준희가 먹기를 기다렸다.
"먹어봐."
"..."
준희는 은영을 생각해 포크로 고기 한 점을 먹었다. 그런 준희를 본 후에야 은영은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준희야"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없잖아~"
"정현이가 바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가 추측해 봤자 다 추측일 뿐이야"
"오해하지 말고 기다려보자"
"..."
"은영아"
"정현이가 아프대"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왔다고 하더라고"
"흡.."
준희는 진정된 듯 해 말을 꺼내 이어가다 갑자기 북받친 감정에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랬구나.."
"준희야 네가 정현이를 많이 좋아하나봐"
준희에게 다시 한번 힘든 사랑이 찾아온 것 같아 안쓰러운 은영이 그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영은 준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렇다 할 위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다.
"많이 아파?"
"응.."
"음.."
"나는 네 친구니까 말이야?"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무 마음 주지마"
준희는 은영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지만 이미 그에게 가버린 마음이 길을 만들어 바람만 불어도 심연까지 그 온도가 느껴졌다. 은영은 한입도 더 먹지 못하는 준희를 보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휴, 가자"
"미안"
"바보"
은영은 준희의 집 앞에 다시 차를 세웠다.
"울지말구"
"네가 할 일은 울지 말고 강해지기!"
"고마워"
준희는 은영의 말에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정현을 만나 은영과 사진을 보며 떠들 생각만 했던 아침과는 전혀 달라진 지금, 준희는 옷만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몸을 뉘었다. 전화기 너머 들렸던 소리와 그의 목소리에 너무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갖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띵"
옆으로 누워 멍하니 생각에 잠긴 준희의 시선에 핸드폰이 들어왔다. 바로 핸드폰을 들어 누군지 확인했다. 정현이었다. 미리보기로 보인 그의 메시지는 통화로 얘기했던 못 가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그의 메시지가 연달아 왔다. 실은 가는 길에 쓰러져 병원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할까 말까 머뭇대던 것은 1초 남짓,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금은 괜찮아?'
준희는 그의 상태부터 물었다. 정현은 컨디션이 많이 돌아왔고 부모님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이어 했다. 메시지만 주고 받았지만 따뜻했던 정현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해 옆으로 누워 있던 준희의 베게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준희는 바로 누우며 양손으로 눈을 닦아내었고 코를 킁킁 거렸다. 막힌 코에 몸을 일으켜 티슈로 코를 풀어내며 닦았다.
'병원이 어디야?'
'가도 돼?'
'선우대 병원이야'
'내일 아침에 퇴원해'
'이런 모습 보여주기 민망한 걸'
'내일 퇴원하고 연락하려다가 혹시 네가 기다릴까봐'
'아까는 그렇게 차갑게 얘기하더니'
'만나서 얘기해'
'오늘은 좀 더 쉬어'
준희는 마음이 놓이자 피로가 몰려왔다. 날이 선 채로 하루를 보낸 탓에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 같았지만 그의 메세지 하나에 몸과 마음의 근육이 풀린듯 깊은 잠에 빠졌다.
준희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샤워를 하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그의 퇴원 길을 함께하기로 했다. 집에서 내린 따뜻한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운전석 옆에 꽂았다. 차 안에 퍼진 커피향이 마음을 좀더 안정시켰다.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출근 시간대라 차가 밀릴까 걱정했지만 조금 더 일찍 나선 덕에 정체되는 구간이 없었다. 차를 병원 주차장에 세우며 정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행여나 그가 자고 있을까 깨우지 않으려 전화는 걸지 않았다. 어젯밤 약속을 하고 온 것이라 정현이라면 일어나 준희를 맞이할 준비를 끝냈을 테지만 혹시나 다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누워있을 그에게 보채고 싶지 않았다.
정현이 알려준 병실을 찾아 가며 병원의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준희의 옛 기억을 자극하는 듯 했다. 준희에게는 서럽고도 서글픈 울음이 섞인 냄새였다. 이 냄새를 내가 또 이렇게 맡네.
정현의 병실에 닿자 안에서는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희는 의아해 하며 병실 문을 열었다.
"어!"
"안녕하세요!"
"왔어?"
"안녕하세요."
"정현아.."
"괜찮아?"
병실에는 공항에서 봤던 정현의 친구들로 보인 남자와 여자 한명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키가 큰 유쾌해 보이는 남자가 준희를 알아보고 인사했고 그 옆에 중단발을 한 청순한 듯 귀여운 얼굴을 한 여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여기 내 친구들"
"그때 공항에서 잠깐 봤지?"
"오지 말래도 자꾸 잠깐만 보고 간다고 해서."
"안녕하세요. 유도영이에요."
"전화 제가 받았었어요.놀라셨죠."
"아?"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혜선이."
준희가 도영과 인사하는 사이 혜선이 끼어들지 못하는 것 같자 정현이 그녀를 소개했다.
'혜선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준희에요. 한준희."
마주한 혜선의 눈은 맑게 빛났고 희고 투명한 피부에 분홍빛으로 올린 볼터치가 그녀를 더 귀엽게 보이게 했다.
"짐 다 챙겼어?"
"얼른 퇴원 준비해."
도영은 가만있는 정현을 재촉했다.
"옷만 갈아입으면 돼"
"그럼 우리 나가있을게."
"갈까요?"
"가자."
도영은 정현이 편하게 준비할 수 있게 준희와 혜선을 불러 병실 밖으로 나갔다. 셋이 남겨진 순간 놀랍게도 먼저 말을 건넨 건 혜선이었다.
"정현이랑 친구면..."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정현이랑 동갑이에요."
"아.."
"그럼 저희도 친구네요."
"음, 네, 뭐..그렇죠."
"말 편하게 해요."
수줍은 듯 혜선은 웃어보였다. 준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공항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맞아."
"정현이랑 친구면 저희랑도 친구죠."
"말 편하게 해요."
도영의 맞장구에 준희는 낯을 가리기에도 어색한 상황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