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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0

by 그런남자

“이제 대부분 다 정한 건가? 어휴 생각보다 너무 많네”

“그러게요. 대부분 다 정한 거 같고….”

미리 정해야 할 것들을 적어둔 목록을 하나씩 체크하면서 내부 규정들 및 사내 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을 채워나갔다. 목록을 보니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휴가 규정’

“하나 남았네요. 휴가규정”

“휴가? 그건 그냥 근로 기준법에 따라서 하면 되지 않을까?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

“뭐 특별한 건 아니고 근로 기준법 휴가 규정 중에 하나 불만인 게 있긴 합니다. 그래서 우리 팀은 그건 좀 바꾸고 싶긴 한데요”


난 항상 경조사 휴가 중 결혼을 했을 때 법적으로 5일 휴가를 주는 것을 회사가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항상 불만이긴 했다. 물론, 내가 현재 미혼이라서 언젠가 사용하게 될 휴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휴가는 대부분 누구나 언젠가 사용하게 될 것들이다. 현재 기혼인 사람들 역시 언제 다시 하게 되어서 ‘결혼 휴가’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으니.


“현재가 5일이라서 대부분 주말 합쳐서 다녀오곤 하는데 전 항상 너무 짧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찌 보면 방학이 없는 직장인들에게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 쉴 수 있는 휴가이기도 한데. 그래서 우리 팀은 결혼하게 되면 휴가를 10일로 했으면 합니다. 2주”

“음…. 본인이 결혼할 걸 대비해서 미리 머리 쓰는 거 아니고? ㅎㅎ 하긴 나도 그건 동의하긴 해. 일주일 신혼여행은 조금 아쉽기도 하고 오자마자 바로 출근하는 것도 힘들긴 하지. 그건 그렇게 합시다 그럼”


“휴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달 말에 휴가 좀 당겨 사용하려고 합니다”

“응? 갑자기? 며칠이나 쓰려고 하는데?”

“3일이요 29일부터 31일까지”

“아 그래? 음… 뭐 할 수 없지 휴가를 쓰겠다는데 못 쓰게 할 수도 없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표정이 영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못마땅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뭔가 걱정스러운 표정.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제가 휴가 쓰는 것이 못마땅한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4월 초에 IR을 하나 진행하려고 논의 중인데 아직 결정이 나진 않았거든. 그것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긴 하지. 나보다는 IR은 자네가 더 잘하니까”

“그건 뭐 결정되면 알려 주세요. 휴가 가서 오전에는 업무를 해도 상관은 없을 듯 하니”

그렇게 오전 미팅은 마무리되었다. 벌써 2시간이나 지나 있다는 것을 미팅룸을 나오면서 폰의 시간을 보고 알았다. 생일 기념 여행과 관련된 그녀의 메시지 몇 개가 와 있다는 것도 함께.


‘퇴근했어?’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제 정리하고 나가려고’라고 답을 하고 하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랩탑을 닫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퇴근한다는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마치 내가 사무실을 나온 걸 cctv로 보고 있던 것처럼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ㅎㅎ 감시하는 거야? 지금 막 나왔는데”

“그래? 이게 다 관심이 많다는 증거야. 그럼 다 보여 ㅎㅎ”

“잠깐만~ 나 이어폰 좀 할게” 그렇게 가방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고 그녀의 들뜬 목소리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내가 좀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대만 아니면 제주도로 가야 할 것 같아. 오빠의 생각은 어때?”

“그럼 난 대만이 더 좋기는 한데. 슬이는 어디가 더 좋아? 슬이 생일여행이니 슬이가 더 가고 싶은 곳으로 가~”

“그래? 그럼 제주도 가도 상관없어? 나 가보고 싶은 숙소가 있어서ㅎㅎ”

“뭐야 그럼 나한테 왜 물어본 거야 ㅎㅎ 답정너였네”

“근데 숙박비가 좀 비싸긴 해. 너무 무리되면 하루만 자고 다른 곳에서 자도 괜찮아”

“그래? 한번 볼 테니까 링크 보내줘 봐”


대충 봐도 가격이 상당하긴 했다. 도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나 싶을 정도로.

“봤어? 너무 비싸지 ㅡㅡ”

“아니 아직 못 봤어. 버스에 서 있어서. 집에 가서 볼게”

“그리고 여행 가서 오전시간에는 내가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을 듯 해.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엥? 왜? 휴가인데 일을 해야 해? 지난번 회사에서는 그런 일 없었잖아. 오빠가 휴가에 일 하는 건 죄악이라는 둥, 그런 회사는 그만둬야 한 다는 둥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맞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뭐야. 회사 옮겨도 같이 여행 다니고 그러는데 지장 없을 거라고 나한테 그러더니”

이미 목소리는 이미 삐쳐있는 듯했다

“아직 정해 진 건 아니야. 그리고 한다고 해도 오전에만 하고 점심 이후로는 그냥 놀면 되니까 여행에 지장을 주거나 하진 않아”

‘어차피 오전에는 계속 잘 거잖아. 그때 내가 일을 좀 할 건데 상관없지 않아?’라는 말이 거의 입 밖으로 나가고 있는 걸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잡아서 없애버렸다. 근데, 실제로도 그렇게 될 거라서 크게 상관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이긴 했다.


“아 몰라 오빠가 알아서 해”라는 잔뜩 볼멘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나 역시 기본이 좋지는 않았다. 그리곤 다시 그녀가 보내준 링크를 보니 아까 보다 숙박금액이 더욱 비싸게 느껴지면서 하룻밤에 이렇게 많은 금액을 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못된 마음 필터가 씌워져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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