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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

by 그런남자

“여기가 오빠가 제주 오면 항상 처음 오는 곳이야? 공기 너무 좋다. 폐가 깨끗해지는 느낌이야”

“나도 몇 년 전에 우연히 알고 와봤는데 그때 이후로는 제주 도착하면 항상 이곳부터 오는 것 같아”


제주에 도착하면 항상 가는 숲이 있다. 제주에 왔다는 신고식을 하는 것처럼. 그곳에 가서 천천히 걸으면서 맑은 공기로 일단 도시에서 전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의식(?)을 치른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이번에는 그녀와 함께 왔기 때문에 그녀 역시 나의 신고식에 흔쾌히 동행해 주었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이른 저녁으로 회국수로 배를 채웠다.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숙소로 향했다. 서울이었으면 저녁시간이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운전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의 저녁은 너무도 한산해서 운전할 맛이 났다. 주변 풍경은 한가 했지만 운전을 하고 있는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에게 말은 안 했지만 제주에 있는 동안 오전에는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대표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 4월 초에 꽤 규모가 있는 기관에서 IR 미팅을 진행하기로 했다. 회사에는 다행이지만 나에겐 다행은 아니었다. 여행 전에 최대한 많이 하긴 했지만 계속 수정을 해야 하는 것이 이런 자료들의 특징이기에.

그리고 담당자 역시 완성도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일종의 변태 같은 수정을 계속 하기에. 그녀에게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아니면 오전에 그녀가 자고 있는 동안 그냥 할지 등등. 머릿속의 어지러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주의 풍경과 하늘은 너무도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와~ 정말 좋다. 오빠 다시 한번 고마워. 예약해 줘서”

“응~ 나도 아주 맘에 드는 곳이네. 슬이의 보는 눈은 역시 대단해”


그렇게 도착해서 체크인 후 예약한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대로 그녀가 좋아했다. 나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숙소가 사진과 많이 다르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여행을 자주 다녀보면 사진과 꽤 많이 다른 숙소들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아니 꽤 많이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독채로 되어 있어서 각자의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곳이었다. 천천히 숙소 구경을 한 후, 우리는 사 온 것들을 정리하고 짐도 정리했다. 어느 정도 정리도 마치고 숙소와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객실에 따로 있는 노천탕에서 와인을 한 잔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3월 말 밤이라 조금은 쌀쌀한 날씨지만 제주는 역시 서울보다 따뜻한 편이라 노천탕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날씨도 맑아서 더더욱.


“좋다~ 이런 게 행복이지 뭐 다른 게 행복이겠어”

노천탕에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그녀가 한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사진 찍어 주면서 나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라니까. 근데 이곳은 좀 거창하긴 하다 ㅎㅎ”

“그러게. 나도 사진이랑 거의 비슷한 곳은 처음 보는 거 같아~ 오빠는 어때? 나보다 더 많이 다녀봤잖아?”

“맞아. 나도 꽤 많이 다녀 봤는데 이런 곳은 흔하지 않은 거 같아. 아주 맘에 들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날씨, 분위기, 기분 등등. 복잡한 내 머릿속이 하나의 오점이라 ‘완벽하지’ 않고 ‘완벽해 보이는’ 상황일 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녀의 말에 한 대 맞고 정신을 차렸다.

“뭐야? 휴가 와서 일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두 번째 말에 결정타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니야~ 그냥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한 건지 ㅎㅎ”

“하긴 오빠 오늘 운전도 오래 하고 따뜻한 물 안에서 술 마시는 건 위험하긴 하겠다~”


취기가 조금 올라오는 것 같아 먼저 샤워를 하러 간다고 그녀에게 말하고 먼저 노천탕에서 나왔다. 샤워를 하는 동안 머릿속을 정리해서 나만의 답을 내렸다. 말을 안 하고 내일 오전에 그녀가 자는 동안 일을 하는 것으로. 말을 하는 것이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혹시나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처럼 각자의 집으로 가는 상황이 아니다. 3박을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고 오늘은 고작 그 첫날이다. 지금부터 혹시나 생길 분란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불만 끄는 미봉책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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