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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十

by 그런남자

‘응? 뭐지? 오늘이 10일인가? 어제가 10일 아니었나?’


출근길, 버스에서 들은 라디오에서 오늘 날짜를 알려주는 걸 듣고 약간의 의아함이 들었다. 근데 직장인들은 가끔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그런 직장인들 중 하나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출근을 했다.


자리에 앉아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던 시점에 박대표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오전에 다른 일정 없으면 팀 내부 규정들 정합시다’

‘네? 그거 어제 했는데 뭐 더 정해야 할 것이 있나요?’

‘어제? 나랑? 아니면 혼자서 정리해 둔 게 있다는 말인 거야?’

‘아 착각했네요. 따로 어제 리스트업 해 둔 게 있으니 10분 정도 있다 미팅하시죠’


출근길에 했던 들었던 의아함은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제야 랩탑 달력을 보니 ‘3월 10일’이었다. ’ 하루 다시 살기’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제의 오늘에 내가 한 행동들과 생각들을 회고해 보기 시작했다. 미팅 중에 휴가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고, 다음 달 초에 IR을 진행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녀와의 여행 중 오전에는 업무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반응들까지도.


이런 경험이 여전히 당황스럽지만 좀 익숙해져서인지 당황 대신 ‘오늘’은 ‘어제의 오늘’과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녀가 기분 상했던 포인트를 어떻게 넘길지를 결정해야 했다.

일단, 미팅은 ‘어제의 오늘’처럼 진행되었고 미팅 말미에 휴가를 낸다는 부분은 이야기를 했다. 예상대로 아직 미정이지만 논의 중인 다음 달 IR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이미 박대표도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어서 당연히 휴가 때 일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다.


하지만 무리해서 휴가를 사용하는 것의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회사 지분을 조금 가지고 있기에 생긴 오지랖이었는지 ‘어제의 오늘’처럼 휴가 중에도 필요하면 오전 중에 일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에게만 이야기하지 않는 걸로 스스로 합의를 한 체.


‘퇴근했어?’ 퇴근 시간이 될 즈음 예상대로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제 정리하고 나가려고’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랩탑을 닫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사무실을 나서자 이어폰에서는 전화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안녕~ 여친ㅎㅎ”

“안녕~ 색다른 전화받는 방식 마음에 들어. 종종 기대할게~”

통화내용은 ‘어제의 오늘’과 동일했다. 대만과 제주도 중 골라야 할 것 같다고, 근데 제주도에 가보고 싶은 숙소가 있어서 제주도로 갔음 한다는 말, 마지막으로 비싸다는 말까지.


“그래? 얼마나 비싼데? 1박에 100만 원 넘고 그러는 거야?”

“잠깐만 링크 보내 줄게. 3박은 안 해도 상관없는데 내 생일밤은 여기서 잤으면 좋겠어”

버스에서 그녀가 보내준 링크를 보니 가격만큼이나 상당히 좋아 보이긴 했다. 독채로 되어 있고 프라이빗한 자쿠지까지 딸려 있는. 사진과 실제가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마음에 들었다.


“봤어? 어때? 근사하지 근데 좀 비싸지?”

“응~ 좋네. 여친이 좋아할 만 해 ㅎㅎ 이런 건 어디서 찾았데? ㅎㅎ”

“오빠랑 가려고 이리저리 찾다 보니 알고리즘이 추천해 줬어~”

‘이런 걸 찾아보니까 알고리즘이 이런 걸 추천해 주는 거야’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할 뻔했다. 요즘 왜 이리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려고 하는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하며.


“그냥 여기서 3 박하지 뭐~ 대신 슬이가 비행기표 결제해 줘. 내가 여긴 예약할게”

“오 진짜? 너무 무리되지 않아? 진짜 고마워~ 최고의 생일선물이 될 거야. 비행기는 비즈니스로 결제할까?”

“노노~ 제주도 가는데 무슨 비즈니스로 결제를 해 아니야~ 그냥 이코노미로 해~ 그리고 숙소는 나도 맘에 들고 슬이가 좋아하니 괜찮아 ㅎㅎ”


다시 한번 인센티브를 받고 퇴사를 한 것이 탁월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오빠 휴가 쓸 수 있어? 회사 옮긴 지 얼마 안 됐는데? 회사는 뭐 그런 거 있지 않아?”

“아~ 있는데 아까 대표랑 이야기해서 당겨서 쓴다고 했어 4월, 5월 휴가를”

“그래도 괜찮아? 난 잘 모르니까 회사 관련된 건. 막 휴가 가 있는데 대표가 연락해서 일 부탁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응? 노노~ 그럴 일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순간 너무 놀랐다. 전화로 대화를 했기에 망정이지 마주 보고 대화 중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얼굴에서 바로 티가 났을 것이다. 그런 나의 표정을 그녀가 놓칠 리 없기 때문에.


아마도 휴가를 가기 전에 며칠은 야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근무보다 더 싫은 야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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