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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다원 Feb 15. 2024

아빠의 자랑

 서른이 넘은 나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것이 많다. 덕분에 하루에도 꿈이 수차례 바뀐다. 글을 쓸 때는 작가가 되고 싶다가 일을 할 땐 꽤 괜찮은 기획자가 되고 싶어 고민한다. 어떤 날은 대학원에 진학해 학생이 되고 싶다. 그러다 문득 임신과 출산을 겪고 육아를 하는 엄마가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렇게 미래의 나는 대중없이 여러 모습으로 비쳤다 사라진다. 그런 내게도 변하지 않는 꿈이 있다면 바로 '아빠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돈을 벌기 시작한 후에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욕심이 많아져 월급을 많이 받고 싶었고 좋은 회사에 가고 싶었다. 열심히 일을 하니 조금씩 인정을 받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회사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찾으면서 나는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은 딸이 되었다. 가끔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해 드리고, 어느 날은 이유 없이 용돈을 보내드렸다. 물론 경제적으로만 아빠에게 잘해드린 것은 아니다. 자취를 시작한 지 5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아빠와 하루에 한 번씩 통화를 하며 안무를 나눈다.


 이런 나의 노력 중 일부는 약간의 죄책감에 기반한 행동이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온 아빠의 인생을 더욱 힘들게 한 존재는 아니었을까?' 나 역시 어린 시절 가난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기억 속의 아빠는 분명 본인보다 더 나은 삶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셨다. 그 덕분에 나는 가난함 속에서도 꿈이 많은 어른으로 자랐다. 하지만 아빠가 미처 누리지 못한 자유와 즐거움을 혼자 누리며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은 결국 죄책감이 되었다. 스무 살 이후 일 년에 한 번, 많을 때는 세 번씩 해외여행을 가는 딸을 아빠는 매번 미덥지 않아 하셨다. 그런 아빠에게도 여권이 있었는데, 아무런 도장도 찍히지 않은 깨끗한 여권이었다. 여행을 갈 때면 그 빈 여권이 자주 떠올랐고, 그때마다 마음속에 꽤 묵직한 캐리어 하나가 들어찬 느낌이었다. 그런 내 마음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나는 아빠와 함께 베트남으로 갔다. 아빠의 그리고 우리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베트남 여행 이후, 기분 좋은 작은 변화가 있었다. 빌려서 사용한 캐리어 대신 본인의 캐리어를 사고 싶어 했고 TV  채널을 돌릴 때 나오는 홈쇼핑 속 여행 상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낯선 언어와 문화를 마주하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처럼 느끼던 아빠가 그 두려움을 이겨내신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여행을 사랑하는 딸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내게 큰 기쁨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후 아빠가 무척이나 자주 지인들에게 딸 자랑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덕분에 행복한 감정을 느껴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 처음으로 가족 덕분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빠의 자랑이라니.'


 언젠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은퇴를 바라보고 계신 부모님이 친구들을 만나면 '자식  자랑'을 많이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머릿속으로 좋은 대학을 가지도 못하고 취업도 안 되던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곧 '우리 아빠는 어디 가서 자식 자랑은 글렀겠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내가 사실은 아빠의 자랑이었던 거다. 오래전에 어떤 책에서 '마음속의 부모님을 죽여야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때 나는 그 글을 읽고 공감하고 동의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반대다. 내 성장의 욕구에는 아빠가 있다. 아빠에게 더욱 자랑이 될 수 있는 딸이 되길, 나의 성장이 아빠의 행복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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