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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Aug 19. 2020

가장 싫어하는 말이
가장 위로가 되었던 순간

"다들 그렇게 살아요."

“대리님, 육아휴직 정말 짧게 썼네요?”



첫 아이를 낳고 복직한 지 6개월이 흘렀다. 인사팀을 통해 육아휴직 잔여금 수령을 신청하는데 담당 과장님이 제출한 서류를 보더니 약간 놀란 듯 말을 붙이셨다.



"기간은 짧았는데 그 기간 동안 많이 울고, 지겹도록 싸워서 저한텐 오히려 길게 느껴져요."

- "그렇죠? 근데 그땐 다들 그렇게 힘들게 지내는 것 같아요."



아이가 둘인 인사담당 과장님에게서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어쭙잖은 위로처럼 보여도 그 바닥에 '남들도 그렇게 지내니 별스럽게 유난 떨지 말라'는 공감 제로의 폭력성이 짙게 깔린 이 문장은 내가 지독하게 혐오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과장님의 그 말에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았던 나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울컥 눈물을 쏟았다.




맞벌이 육아, 상상 그 이상의 세계

누구의 도움 없이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건 우리의 단단한 각오를 쉽게 깨트릴 수 있을 만큼 버겁고 어려운 일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힘듦과 고뇌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주변에 맞벌이 육아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있었다고 하더라도 직접 겪기 전까지는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을 테다.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줄곧 아팠고, 아이를 재운 후에도 집에서 야근하는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배달의 민족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은 휴식처가 아니라 또 다른 일터가 되었을 뿐이었다. 



겨우 어째 버티고 있는데 힘듦은 신기하게 계속 커져서, 우리를 계속 한계로 밀어붙였다. 버티다 못한 나는 대상포진에 걸려 입원을 했고, 그 와중에 둘째 고양이 나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매일 같은 시간에 어린이집 하원을 혼자 해내고 있던 남편은 친정 엄마가 도와주러 오기까지 며칠을 정상 출근하면서 혼자 아기와 아픈 고양이와 아픈 아내를 돌보았다.



어느 주말엔 이유도 모르게 열이 38도까지 오르고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저도 할 수 없이 쉬라고 말하며 영혼 없이 아이를 안고 있는 지친 남편을 보니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이 난리가 끝이 날까...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겨우 움직일만해지니 아이를 품에 안고 남편과 싸우고 말았다.  




어떻게 이혼도 안 하고 다들 이렇게 살아요?

미치도록 힘든 건 다른 게 아니다.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 없다.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고 싶어도 볼 수 없다. 배달 음식으로 매일 속이 쓰려도 다시 배달앱을 켜야 한다. 남편과 농담 따먹기 할 여유가 없다. 할 일은 많은데 피곤하니 잔뜩 예민해져서 상대에게 아픈 말을 하기 쉽고, 싸움으로 번지니 결국 입을 꾹 다물게 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육아'에선 거의 없고, 그 육아로 인해 좋았던 부부관계까지 산산조각 나기 직전이다.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은 이게 아니었다. 



우리만 이렇게 힘든 건지. 할 수만 있다면 맞벌이 육아를 하는 부부 누구든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딸 둘을 키우는 워킹대디 과장님이 다들 그렇게 산다니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거였다. 그러면서 그 뒤에 덧붙여주신 한 문장이 내 마음을 다잡게 했다. 



“그래도 포기만 하지 마세요.”



무얼 포기하지 말라는 건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우리 부부의 관계를, 커리어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인고의 시간이 녹아있는 육아 선배님의 흔해 보이는 위로 한 마디에 일하는 즐거움을, 퇴근 후 날 반기는 아이를 마주할 때의 기쁨을, 셋 일 때 행복한 순간들을 힘듦 아래 묻지 말자 다짐했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힘든 만큼 기쁜 날도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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