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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Nov 12. 2020

학부모 상담에 남편이 갔습니다

10월 말, 학부모 상담 안내문을 받았다. 상담 일정으로 언제가 좋은지, 그리고 상담 시 물어보고 싶은 것들을 써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다음날 등원 준비까지 마친 밤 11시, 펜을 들고 남편과 침대에 나란히 앉아 궁금한 것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상담은 다음 주 내내 이뤄졌고, 상담 가능 시간은 오후 1시~2시와 오후 5시~6시 중 골라야 했다.



“상담은 언제가 괜찮아?”

- “수요일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때 하지 뭐.”



언제가 괜찮냐고 물은 사람은 엄마인 나였고, 수요일이 괜찮다고 말한 사람은 아빠인 남편이었다.




시간 되는 사람이 한다

신혼부터 암묵적으로 남편과 지켜온 우리 부부의 중요한 원칙은 무엇이든 ‘시간 되는 사람이 한다’다.



퇴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주말에 일정이 없어 집에 있는 사람이 빨래와 청소를 한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합리적인 원칙인데 이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집안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과거의 남자들은 집안일을 하지 않고 돈만 벌어와도 아내와 사이가 나빠지거나 가족이 힘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맞벌이를 하는 시대에는 집안일도, 육아도, 직장생활도 모두의 일이 되었다. 모두가 바깥양반이자 안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간에 역할 분담을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하는 건 장점보다 단점이 크다. 일단 그렇게 정해서 완벽하게 지켜질 일이었으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부 싸움 수는 현저히 줄었을지도 모른다.



그 일을 해야 할 때,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반드시 있고, 부부가 어떤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맞벌이에 아이까지 있다면 그 빈도는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에게는 적성에 따른 업무분장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업무분장이 적합하다.




아빠와 아들




아빠의 학부모 상담이 특별한건가요

우리의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업무 시간 조정은 맞벌이 육아에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다행히(라는 말을 쓰는 게 참 안타깝지만) 남편은 공기업을 다니고 있었고, 공기업은 육아휴직 외에도 ‘육아시간 특별휴가’라는 놀라운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남성 육아휴직은 아무도 안 썼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주니어 직급인 남편은 ‘용기 있게도’ 하루 2시간 육아시간 특별휴가를 쓰겠다고 했다. 모든 조건을 고려했을 때 현재로선 그 방법이 맞벌이 육아를 유지하는 최선이었다. 물론 선뜻 쓰겠다는 생각을 해준 남편이 고마웠지만, 남편에게 고맙다고 생각해야 하는 현실은 전혀 고맙지 않다. 



(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남편은 그 시간을 메우기 위해 종종 점심시간에도, 퇴근하고도 일을 했다. 가끔은 정말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해서 내가 휴가를 쓰고 아이를 돌보았다.)



상담 날 당일, 나는 남편에게 상담 시 확인했으면 하는 질문들을 정리해서 알려줬고, 그날 밤,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은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온 상담 내용을 읽어주었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고, 선생님께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에게 어떤 점을 신경 써야 할지 얘기를 나눴다. 남편과 내가 비슷한 수준으로 육아에 참여하고 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아빠가 상담에 가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런 얘기까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가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다.) 그저 상담 시간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빠였을 뿐이다. 나도 굳이 휴가를 내서 상담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만큼 아이의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 아빠의 학부모 상담이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도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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