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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Dec 01. 2020

육아를 시작한 뒤, 살고 싶어졌다

육아가 기회가 된 역설에 대하여

아이를 낳고 나니 내가 원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건’ 너무나 달랐다. 영문도 모르고 손발이 묶여 사는 것처럼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숨쉴 틈을 찾아 시간을 쪼개고 쪼갰다. 대단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땐 하지 않는 삶을 살았었다. 흐리멍텅하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유했다. 그러다 '육아'가 시작된 순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그 크기는 무엇인지, 더듬더듬 한계를 인지하게 됐다. 행복을 느끼던 순간이 사라지니 그제서야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알게 됐고, 행복의 부재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게 됐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도 아니었건만 방해받지 않을 시간은 짧든 길든 꼭 필요했다. 그 어떤 역할도 아닌 그저 '나로 존재하는 시간'을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나에게 주어진 시간 중 내가 주체적으로 쓸 수 있는 틈새 시간을 찾았다.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이었다.




책 읽기 좋은, 출퇴근 시간

책을 읽지 못하면 삶이 고단했다. 그래서 독서 시간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출퇴근 시간엔 책을 읽었다. 가방엔 늘 종이책 한 두 권을 넣고 다녔다. 만원 상태인 퇴근 열차를 대비해 전자책도 애용했다.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틈새 시간을 목적을 가지고 보내니 아이 낳기 전보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올해 1분기에 읽은 책만 25권이다.



가끔 책을 읽다 글감이 생각나면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을 쓰거나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문장 몇 개를 저장해두었다. 마케팅 콘텐츠를 기획하는 업무를 하고 있으니 무엇이든 읽는 건 동기 부여에도, 콘텐츠 아이디에이션에도 도움이 되었다.



‘책의 말들’에 인용된 병든 인간의 운명




쓰기에 좋은 시간, 점심시간

시간이 없어서 회사에서 혼자 밥 먹기 시작했다. 혼자 먹는 즐거움은 다름 아닌,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아무리 혼잡한 식당이래도 단체일 때보다 혼자일 때 빨리 자리를 잡고 먹을 수 있다. 먹고 싶은 메뉴를 빨리 먹을 수 있는 것, 혼밥러의 크나큰 행복이다.



점심을 나의 속도로 먹고 커피 한 잔을 사서 사무실로 돌아오면 PC를 켠다. 주로 하는 일은 출퇴근 시간에 읽은 책을 펼쳐 밑줄 친 문장들을 온라인 공간에 옮겨 적는 일이다. 손으로 필사하는 것만 못하지만, 전자 필사는 사실 손 필사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유독 쓰고 싶은 날엔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두었던 문장들을 한 편의 글로 발전시킨다. 점심시간, 비어있는 사무실에서는 글이 정말 잘 써진다. 그렇게 쓴 글을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발행하고, 틈틈이 보면서 수정을 해나간다. 글 대부분이 그렇게 쓰여진 '런치 타임 에세이'다.



* 오래전부터 아이폰 기본 메모 앱에 기록을 쌓아왔던 터라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한다. 아이클라우드로 PC - 휴대폰 간 실시간 연동이 되니 언제 어디서든 내가 아카이빙 해둔 소중한 문장들을 펼쳐볼 수 있다.



내용에 따라 분류해둔 메모앱 폴더들





한 달에 3시간, 온라인 독서 모임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을 알차게 써서 좋았지만, 뭔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이 생각들을 나 혼자서만 보고 느끼는 것이어서 그랬다. 사람들과 조금 더 적극적인 형태로 나누고 싶었고, 들으며 자극받고 싶었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던 찰나, 트레바리에서 마케터 독서 모임을 발견했다. 코로나19 시국으로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고민하다 남편에게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3시간은 혼자 있게 해 줄 수 있냐 물었고, 남편은 ‘승인’해주었다.



(한 달에 한 번, 3시간 쓰는 것도 조율이 필요한 처지가 슬프지만, 육아를 한다면 내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온라인 모임이라서 시작할 수 있었던 독서 모임. 주말 오전 3시간은 아이에게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시간이라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냈었는데, 용기를 내어 모임을 시작한 덕에 그리고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한 남편 덕에 그 시간도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됐다.



한 달에 한 번 3시간, 온라인으로 갖는 모임의 힘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컸다.



아이를 돌보다가 모임 시간에 맞춰 줌에 접속하면 되는 온라인 모임은 늘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워킹맘에게  더할 나위 없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얻는 에너지는 육아가 1순위여서 자기 계발의 기회를 꿈꾸기도 어려운 워킹맘의 고립된 마음을 해방시켜주었다. 게다가 모임이 끝나면 한층 마음에 여유가 생겨 아이를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비대면 모임의 확산은 워킹맘에게 분명 기회였다.






내가 삶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오롯이 육아를 시작한 덕분이다. 



아이만 없었으면 아무 생각없이 실행에 옮겼을텐데, 이제 '아무 생각없이' 무언갈 하는 건 사치가 됐다. 아이라는 존재 덕에 시간과 에너지의 한정된 양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부터' 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족쇄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육아는 흐리멍텅하게 살던 내게 분명한 기회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육아라는 세계를 지나면서 오히려 나는 또렷해졌다. 육아가 나를 잃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진짜 나'를 찾도록 도와주는 거름망이었다. 시련이 닥쳐야 감사를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던가. 내 속의 '진짜 나'는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었고, 벼랑 끝에 몰리고 나서야 나는 '진짜 나'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다. 



육아는 자신을 잃는 감옥이 아니라, 자신을 되찾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어영부영 버려질 수 있는 시간을 찾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없는 시간은 도움을 받아 쓸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면 그 작은 시간들과 시도들이 쌓여 나를 숨 쉬게 하고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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