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잎새로 빠져 돌아 나오는 바람이 벌써 시원하게 느껴진다. 늘 오는 곳이지만 때에 따라 산소 농도가 더 조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 기분에 달린 느낌인 것 같기도 하다. 벌써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보인다.
우리 동네 뒷산의 수종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주로 리기다소나무들인데 토종 소나무들처럼 멋스러운 곡선미는 없어도 죽죽 뻗어 있어서 시원스럽다. 겨울 동안에는 고유의 푸른색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철 푸른 나무는 소나무 한 종류 밖에 없는지라 그들은 산을 찾는 이들에게 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다.
소나무류는 타종의 나무들보다 우리 인간에게 더 많은 이로움을 준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기능이 뛰어나고 피톤치드 발생량도 타종의 나무들보다 많다고 한다.
피톤치드가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자연화합물로 인간의 면역체계에 도움을 주는 항균물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소나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이 화합물이 함유된 소나무향을 맡을 수 있으므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신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니 일석이조인 것이다. 이런 천혜의 환경이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 사는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매일 소나무 숲을 산책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낀다.
요즈음 산에 올라가면 소나무들의 색이 매일,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암녹색에 누렇게 뜬 잎들이 종종 보이며 생기가 없던 것들이 그 잎들에 연두색이 가미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 이 나무들이 춘풍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신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런 우리 동네 뒷산이 맨발 걷기 성지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동네가 맨발 걷기 하는 사람들로 북적대기까지 걸린 시간은 경이로울 정도로 짧았던지라 역시 입소문이란 것은 무섭구나라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네 뒷산이 맨발 걷기의 성지가 된 유래는 이러하다. 뭐 유래씩이나, 암튼 우리 동네 산 옆의 아파트에 사시는 한 할아버지께서 무슨 중대한 지병을 앓고 계셨는데, 아마 어떤 종류의 암이 아니었나 싶다. 그분이 맨발 걷기 몇 개월 만에 그 병이 싹 나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봄부터 한여름을 거쳐 제법 쌀쌀한 가을이 될 때까지 산길 옆의 황토를 일일이 곡괭이로 판 다음 산둘레길 전체에 고르게 펴서 맨발로 걷기 좋게 만드는 괴력을 발휘하신 것이다. 당신의 병이 나은 것은 이 산의 은덕이고 그 은혜를 갚는 길은 이 산둘레 길을 맨발로 걸을 수 있게 잘 다듬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병의 치유를 맛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산으로 향하는 할아버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팔십 노인이 매일 해가 뜰 때부터 일을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곡괭이로 흙을 파서 삽으로 두드려 펴는 일을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한다고 생각해 보라. 거기에다 그분은 암을 앓았던 분이다.
정말 이것은 우리 동네 '영웅탄생기'라 할만하다. 그 할아버지의 초인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 맨발길은 지금 이 시간 이렇게 존재할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맨발 걷기가 전국적으로 붐이 일어나고 있던 와중에 이런 에피소드까지 가미되니 소문에 가속도가 붙을 만도 하다. 암에 걸리신 할아버지께서 꾸준히 맨발 걷기를 하여 거짓말처럼 중병으로부터 회복하셔서 산둘레 산책길 전체를 다 황토로 덮어 맨 발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니 어찌 주위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겠는가. '아픈 사람들 다 모여라'라고 굉고하지도 않았는데도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이곳에는 그 사연도 다양하다.
사실 할아버지께서 정말 암에 걸리신 적이 있는지 나는 확인한 바 없지만 동네지인들 몇몇으로부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들은 적은 있다. 그리고 산을 오를 때마다 그 할아버지의 중노동을 수도 없이 목격하기도 헀지만 내가 의심이 많은 건지 나는 아직 그 소문이 믿어지지 않는다.
소문의 진위는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동네 뒷산에는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맨발 산책객들이 몰려들었다. 시청에서는 산입구에 맨발 산책객들의 편의를 위해 신발장을 놓아주었고 그 옆에다 화장실을 짓고 세족을 할 수 있는 수도시설도 마련해 준다는 말이 돌았지만 그곳이 그린벨트로 묶여있는 사유지라 불가능하다고 확정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전처럼 맨발 걷기 하러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발 한번 씻으려면 우리 동네 토박이 할머니들로부터 약수터 깨끗이 쓰라는 잔소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할머니들은 맨발객들이 앉아서 발을 씻을 수 있게 의자를 놓아주시고 물통과 바가지도 준비를 해 주셨다.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 식수로 쓰는 동네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이 오염될까 봐 모두 걱정을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먼 곳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을 마냥 박대하기도 인정상 그렇게 한다는 할머니들의 마음 씀이 곱다.
나도 맨발 할아버지의 몇 번의 권유에 못 이겨 서너 번 맨발 걷기를 해 보기는 했지만 아직은 아픈 데가 없어서 그런지 귀찮은 생각만 들어 곧 포기를 해버렸다. 맨 발길을 걷고 나서 꼭 발을 씻는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고 맨발 걷기에 대한 맹신 같은 것이 내게는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둘레 길을 걷는 것은 나의 오래된 일과 중 하나이다. 신발을 신고 걷든 맨발로 걷든 소나무들이 우거진 산속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에 유익한 쪽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든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신발을 신으라 혹은 말라고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맨발 산책을 하는 사람들 중 가끔 자신의 발만 중요하게 여기고 주위 환경은 챙기지 않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서 문제다. 남의 동네 약수터에 와서 발을 씻었으면 적어도 흙부스러기는 약수터 주변에 남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더구나 물 나오는 곳에 발을 직접 대고 씻는 행위는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하는 행동 중 하나이다. 작년 가을에는 약수터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머리 감고 샤워하다가 누가 신고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제 겨울은 다 지나간 듯 하니 산입구의 개나리들도 곧 지천으로 피어날 것이다. 진달래꽃들도 산목련들도 지금 이 시간에도 꽃을 피우려 열심히 물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는 얼마나 많은 맨발 산책객들이 우리 동네 뒷산을 찾아올까 기대하는 마음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환경보전에 대한 염려부터 앞선다. 나만의 생각일까?